미루기의 기술

by 마흔로그

일요일 저녁이다. 4일 뒤인 목요일 오후, 나는 중요한 임원 보고를 해야 한다. 보고자는 나다. 하루 전인 수요일에는 팀 내부 리뷰도 잡혀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월요일과 화요일, 단 이틀뿐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전체적인 시나리오와 결론을 구상한 것이 전부다. 이상하게 불안하지가 않다. 이것은 나의 오랜 업무 스타일이다.


사람마다 각자의 업무 스타일이 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나의 원칙은 간단하다. 어떤 일에 2시간을 투자한 결과와 20시간을 투자한 결과의 차이가 미미하다면, 나는 2시간만 쓴다. 물론 내 승진이나 고과가 걸린 중요한 일이라면 다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은 그렇지 않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했던가. 신입사원 시절, 나는 우연히 『미루기의 기술』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마감 시간에 임박했을 때 나오는 폭발적인 집중력이야말로 나의 가장 큰 무기라는 것을. 미루는 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시간을 효율적으로 압축해서 쓰는 기술이다.


하지만 나의 방식은 종종 오해를 산다. ‘저 사람은 늘 한가해 보인다’ 거나, ‘일을 대충 한다’는 식이다. 그래서 가끔은 연기를 한다. 일부러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거나, 관련 없는 자료들을 화면 가득 띄워놓는 식이다. 일종의 생존을 위한 위장술이다.


그렇다고 내가 정말로 노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한 가지 보고서를 오랫동안 다듬는 동안, 나는 업무에 필요한 강의를 듣거나, 우리 부서나 타 부서의 자료를 본다. 지금 당장의 일은 아니지만 미래의 일을 위한 준비를 하는 셈이다. 겉보기에는 한가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남들의 오해는 어쩔 수 없다. 결국 나는 결과로 증명할 뿐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내 계산이 틀려 화요일 밤을 꼬박 새우게 되더라도, 수요일 리뷰에서 상사에게 호되게 깨지더라도, 그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그 리스크를 알기에 나는 내 방식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러니 오늘은 마음 편히 잠들 생각이다. 전쟁은 화요일 오후쯤 시작해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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