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신청 버튼을 눌렀다

by 마흔로그

사내 시스템에 접속했다. 몇 번의 클릭을 거쳐 '휴직 신청' 메뉴에 들어갔다. 이미 팀장님과 상무님께는 충분히 말씀을 드렸고, 인수인계 계획까지 공유된 상태라 사실상 형식적인 절차만 남은 셈이었다. 하지만 '신청' 버튼 위에 마우스 커서를 올려두고 잠시 멈칫했다.


육아휴직은 개시일 한 달 전에만 신청하면 회사가 반려할 수 없는 법적 권리다. 그럼에도 버튼을 누르기 전, 묘한 감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지난 9년 동안 매일 아침 로그인하던 이 시스템에서, 처음으로 '이탈'을 공식화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조직에 대한 미안함인지, 아니면 동료들이 고생할 것을 알기에 생기는 막연한 눈치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나만 멈춰 선다는 데서 오는 불안함인지 명확히 정의하기 어려웠다. 결국 버튼을 눌렀다. '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무미건조한 알림 창이 떴다. 이제 정말 돌아갈 수 없는 문을 넘었다.


경제적인 준비는 엑셀 시트로 끝내두었다.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췄고, 자산을 깎아먹지 않는 구조도 설계했다. 하지만 숫자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근본적인 압박감이 신청 버튼을 누른 직후부터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마흔 초반, 직장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자 가장으로서 자산을 불려 나가야 할 중요한 시기에 1년을 쉰다는 것. 단순히 돈을 축내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기회비용 측면에서 보면 사실상 큰 손실을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압박감은 '휴직 기간을 어떻게 가치 있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휴직까지 해놓고 고작 이렇게 시간을 보냈어?"라는 자책을 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무언가 대단한 성과를 내야만 할 것 같았다. AI 기술을 남들보다 앞서 공부해서 전문가가 되거나, 지금보다 수입을 더 늘릴 수 있는 새로운 수입원을 구축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몸이라도 완벽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식의 목적 지향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목적이 없는 시간은 하찮게 느껴졌고, 계획 없는 하루는 도태되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몇 달 전 퇴근길에 회사 동료와 소주 한잔을 기울이며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당시 나는 휴직을 고민하며 "막상 쉬게 되면 그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하고 싶었던 공부도 하고, 커리어에 도움 되는 일들을 다 해보고 싶다"라며 열띤 계획을 늘어놓았다. 그때 내 말을 묵묵히 듣던 동료가 툭 던진 한마디는 예상 밖이었다.


"왜 자꾸 무얼 하려고 해요? 그냥 좀 놀아요."


그는 내가 무언가를 계속하지 않으면,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닦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낙오자가 될 것 같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짚어냈다. "쉬다가 놀다가, 정말 지쳐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그때 무언가 해보세요.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못 그럴 성격인 거 아니까, 일단은 그냥 좀 놀아보라는 거예요."


당시엔 "그것도 방법이겠네"라며 가볍게 넘겼지만, 휴직 신청을 마친 지금 그 말이 다시금 생생하게 들려왔다. 나는 왜 쉬는 시간조차 '효율'과 '성과'라는 잣대로 평가하려 드는 걸까. 9년 동안 조직의 미션을 수행하며 길들여진 생산성에 대한 강박이, 나를 위한 휴식조차 스스로를 가두는 틀로 만들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루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보낸다고 해서 내 인생이 무너지지 않는다. 남들과 비교하며 뒤처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앞서나간들, 그 앞엔 또 다른 누군가가 계속 서 있을 뿐이다. 기술 변화가 아무리 빠르다지만 내가 1년 쉰다고 해서 세상이 나를 영영 버리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놀면 좀 어떤가. 허송세월 좀 보내면 어떤가. 남 눈치 보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루를 채워보는 것. 그것이 여러 직함과 타이틀을 떼고 마주하는 진짜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나를 위한 'To-Do List'를 쓸 준비가 된 것 같다. 성과를 증명하기 위한 목록이 아니라,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일들로 채워진 리스트를 말이다.


오늘부터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 대신, '어떻게 하면 잘 놀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이번 휴직을 통해 얻어야 할 가장 어려운, 그러나 가장 중요한 미션이다.


image.png


수, 금 연재
이전 05화현금흐름의 재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