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무기, 혹은 방패

ㅡ악역 전문 배우가 되고파

by 지얼


자신이 만들어내는 얼굴이 아니라 상대방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얼굴……스스로 선택한 표정이 아니라 상대방에 의해서 선택된 표정……

-아베 고보, <타인의 얼굴> 중에서




이십여 년 전.

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얼이냐? 난 윤발(가명)인데, 잘 지냈지?”

형식적인 안부 인사가 끝나자 바로 용건에 들어간다.

“다른 게 아니고… 여기 성내동에 있는 피자헛 가게인데, 여자 친구랑 왔거든? 근데 이 친구가 글쎄 운전 중 후진하다가 그만 피자헛 가게의 벽을 박아 버렸지 뭐냐….”

“이런.”

“여기 담벼락을 내가 보수해줘야 할 것 같아서…"
"어떡하냐."

”벽돌이랑 시멘트는 다 사놨거든."
"...."
"아, 그냥 그렇게 됐다고. 뭐, 꼭 너더러 여기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건 아냐."

와서 도와달라는 얘기다.


내가 급히 그에게 달려갔을 때, 그는 담 너머 골목길 한가운데에 주차해 놓은 자신의 봉고차에서 어디선가 구해온 벽돌을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여자친구는 귀가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부지런히 나른 벽돌에 시멘트를 발라 담을 세우고 있는 도중, 봉고 차 뒤편에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지나가게 차 좀 빼달라는 소리다.

윤발(가명) 군은 작업용 장갑을 낀 채로 수신호를 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 쪽으로 그냥 돌아서 가세요!”
그러자 험상궂게 생긴 30대의 남자가 내리더니 삿대질을 하며 다짜고짜 반말로 된소리를 내뱉……어야 마땅할(?) 상황이었는데, 신통하게도 그 남자는 한마디 불만도 없이 조용히 후진을 하며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상황을 목도할 때마다 나는 이 친구가 부러워진다.

그 누구도 시비 걸지 않는 인생이라니!


윤발 군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의 직업을 둘 중 하나로 추정한다고 한다.

강력계 형사,

또는 조폭.


일단 키가 185cm 정도 된다.

오랫동안 운동을 해서 근육질 몸이다.

깍두기처럼 각진 얼굴에 머리는 무진장 짧고 쌍꺼풀과 미간의 두 겹 주름은 꽤 짙다.

그는 입을 열지 않아도, 복화술을 하지 않아도 얼굴로 말할 수 있다. 그의 얼굴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까불면 뒈진다


돌프 룬드 그렌의 좀 못생긴 버전이랄까....



이런 일도 있었단다.

어떤 용감한 작자가 주행 중이었던 윤발 군의 차 옆으로 자신의 차를 바짝 붙이더니 차창을 열고는(입모양으로 추정컨대), "야, 이 개XX야"하고 소리를 지른다. 아마도 주행 중 사소한 시비가 있었던 모양.

윤발 군은 짙은 선팅(sunting)의 검은 차창을 내린 후 상대방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한마디를 조용히 내뱉는다.

“뭐요?”
윤발이의 얼굴을 확인한 상대방의 꼬리가 내려간다. 그리고는 찍소리도 못하고 알아서 꺼져준다. 아마도 '깍두기'로 오인했으리라.

나는 가끔 그의 과거가 의심스럽다.

애들 삥이나 뜯는 일진 아니었을까?

아니면 쌍칼파의 조직원 출신이 아니었을까?


이런 일도 있었다.

용감한 내가 주행 중이었던 누군가의 차 옆으로 내 차를 바짝 붙인 후에 차창을 열고는 "야! 운전 똑바로 못해!"하고 소리를 지른다. 난폭 운전에 대한 나름의 응징이다.

그는 짙은 선팅의 검은 차창을 내린 후 나를 노려보더니 한마디를 조용히 내뱉는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아저씨는 어쩌면... 교도소에서 퇴소한 지 몇 달 안 된 것은 아닐까?

그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그로부터 몇 년 후.

내가 살고 있었던 다가구 주택의 옆 방(투룸)에 누군가 이사를 왔다. 나이는 한 40대 중반쯤 되었을까? 아담한 키에 전형적인(?) 회사원의 헤어스타일, 그리고 갈색 뿔테 안경을 쓴 그 집 아저씨를 처음으로 대면했을 때 나는 그가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고 짐작했다.

소설가일까?

아니야, 분위기로 봐서 시인이 틀림없어.

뭐, 이런 생각을 했다.


인사도 없이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어느 날,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현관 입구에 앉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무심히 담배 연기를 날리는 그 아저씨를 보게 되었다.

뿔테 안경 너머의 그 공허한 눈빛.

머리 근처에서 후광처럼 부유하는, 안개 같은 담배 연기.

시상을 떠올리는 걸까?

그때,

나는 보았다.

푸르죽죽한 빛깔의 뱀이 그의 종아리를 타고 발목뼈 근처까지 내려와 있는 것을.


그러던 어느 날, 현관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옆집 아저씨다.

"술 한 잔 같이 하시겠습니까?"

말투가 엄청 정중하다. 뱀만 아니었으면 문학과 교양의 힘이리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분의 집에서 같이 술을 마시게 되었다.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아, 술을 마셔서 그런가? 왜 이리 덥냐?"

그러더니 웃옷을 훌렁 벗으시는 거다.

그때 이분의 직업은 시인이 아니라 사육사라는 것을 새삼 확신했다.

그분은 발목의 뱀 이외에 가슴과 등짝에 호랑이와 독수리도 키우고 계셨던 거다.

그래서였을까? 그분의 가슴팍과 팔뚝에는 맹수가 할퀴고 간 상흔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그날, 그 사육사 분으로부터 교육도 받았다.

먼저 유수의 동물원들 계보를 배웠다. 쌍칼 동물원의 원장님은 조 뭐시기 형님이시고 그 밑으로 사시미를 잘 쓰는 김 뭐시기 동상(생)이 있고 또 그의 의형제 강 뭐시기는 목포 동물원의... 하는 따위의 계보학(?).

그리고 실전 무예도 배웠다. 나의 배를 향해 돌진하는 칼을 피하는 법, 그리고 그 관성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팔을 꺾어 제압하는 법 등.

물론 그날의 교육을 실생활에서 써먹을 일은 이후로 전혀 없었고, 설령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더라도 실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행랑이 있는데 왜?


장난감 칼


윤발 군은 조직의 행동대장 같이 생겼지만, 실상은 순둥이 그 자체다.

옆집 아저씨는 시인처럼 생겼지만 실상은 무서운....


그런즉 사람을 외관만으로 판단하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사람은 불혹의 나이가 지나면 자신의 얼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흔히들 말하지만ㅡ그리고 어느 정도 그것을 인정하기는 하지만ㅡ그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명작만화 <엔젤 전설>은 사람들의 그런 편견을 소재로 한다. 천사의 마음을 지녔지만 얼굴이 흉폭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주인공은 학교의 일진 보스로 우뚝 선다. 주변에서 알아서 꼬리를 내린 탓이다.


엔젤 전설


사람들은 대체로 타인을 외관으로 판단하기 마련이고, 개중에는 얼굴 생김에 따라 업심의 정도를 조절하며 대면하는 이들도 있다. 만만하게 봐도 괜찮은 인간인지, 아니면 조심해서 접근해야 할 인간인지 지레짐작하여 행동한다는 거다.

내 잘못도 아닌데도 간혹 내게 시비를 거는 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내가 마동석처럼 생겼어도 그럴 수 있겠어?


윤발 군의 터미네이터 같은 외관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누군지 모를 개자식으로 하여금 업심을 유발하는 내 얼굴이 못마땅한 탓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윤발 군보다 비교적 성질도 더 더럽고 까칠함에도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고는 비교적 안심한다.

아, 진정 이렇게 오해받고 싶지 않아!


길을 가는데 교복 차림의 여학생이 애틋한 눈길을 보내며 내게 다가온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 그 눈길이 나를 향한 것임을 깨닫는다.

2m 간격을 두고 서로 눈길을 교환한다. 그 여학생은 뭔가를 요구하는 눈빛이고, 나는 뭔가를 궁금해하는 눈빛이다.

설마...

조건만남?


그녀가 멈춰 선 후 입을 연다.

“아저씨…. 죄송한데요,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안 돼요?”

부탁의 내용을 묻자 그녀가 대답한다.

“제가 살 수가 없어서 그러는데요…."
살 수가 없다니. 죽을 병에라도 걸렸다는 말인가.
"담배 한 갑만 사다 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조용히 손사래를 치며 거절한다.

그리고 뼈 때리는(?) 말을 던진다.

“담배 많이 피우면 나처럼 땀구멍이 넓어질걸?"


그녀가 그런 부탁을 나에게 할 수 있었던 근거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문득 후배 민식(가명) 군 생각이 났다. 모태 신앙을 가지고 있고 누구보다 친절하지만 역시나 얼굴이 조직의 행동대원 같이 생긴 그가 건물의 후미진 곳에서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는 고등학생 무리를 향해 "당장 안 꺼?"라고 조용히 말했을 때, 그들은 얼마나 일사불란하게 담뱃불을 꺼버렸던가.


가끔은 나도 윤발 군이나 민식 군처럼 생겼으면 할 때가 있다.

그렇게 된다면 무엇보다 악역 전문 배우가 되고 싶다. 그래서,

"죽기 딱 좋은 날씨다....갈 때 가더라도 담배 한 대쯤은 괜찮잖아?" 라거나,

"인생은 고통이야. 몰랐어?"라거나,

"도끼로 마빡을 찍든, 칼로 배때지를 쑤시든 고깃값을 번다, 뭐 이런 자본주의적인 개념으로다가 나가야지" 하는 따위의 대사를 폼나게 읊어대고 싶다. �


: 순서대로 <신세계>, <달콤한 인생>, <타짜>의 명대사.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에드거 앨런 포우의 <적사병의 가면>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시대적 배경은 전염병이 창궐한 중세의 어느 시기다. 귀족들은 적사병을 피해 성처럼 지어진 수도원에 피신한다. 외부의 전염병 환자의 출입을 차단하기 위해 빗장을 땜질해 버리고 바깥의 농노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권태를 잊기 위한 자기들만의 유희-가면무도회를 벌인다. 그러던 어느 날, 정체불명의 가면을 쓴 인물이 무도회장에 나타난다. 귀족들은 그의 가면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다가 점차 혐오하며 경악스러워한다. 그의 가면은 바로 죽음을 연상시키는 '적사병의 가면'이었던 거다.

분노한 귀족들이 그를 붙잡아 바닥에 눕힌 다음 강제로 그 혐오스러운 가면을 벗겨내려고 시도하지만 그 가면은 벗겨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적사병의 가면'은 원래부터 가면이 아니었으니까. 귀족들의 이기적 유희에 증오를 품은 어느 적사병 환자가 적사병을 퍼뜨리기 위해 외부로부터 잠입했던 것. 그가 무도회장의 깊숙한 안쪽까지 설치고 다닐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귀족들이 처음엔 그의 얼굴을 가면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거다.

가끔은 가면이 아니라 맨얼굴 만으로도 충분히 역병 같아 보였으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든다…


스크린샷 2025-04-15 오후 7.24.08.png 본 얼굴과 가면의 일치


순둥이 같은 얼굴로 세상의 시비, 혹은 딴지를 감당해야 하는 일은 피곤하다.

무기로서의 효용은 됐고, 그저 얼굴 자체가 방패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인생이 조금이 수월했을 텐데.


아마도 헤아릴 수 없이 선량하신 신께서 외모라는 하찮은 도구를 사용하여 나를 지켜주신 것일지 모르겠다.

ㅡ몽테뉴 <수상록>중에서




https://youtu.be/Ypkv0HeUvTc?si=HDBn_aqo-Eb9xLnH

혹시.....이명박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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