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노 게이치로의 독서론
초등학생 시절에 읽은 책들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한국 전래 이야기'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머리는 명석하지만 책은 단 한 권이라도 읽으려 하지 않는 한 수재가 있다. 그의 나태함을 꾸짖는 어떤 어른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저 창고에 있는 산더미 같은 책들을 보셨지요? 저걸 언제 다 읽는단 말입니까. 어차피 다 못 읽을 거, 애초에 건드리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 같아서요.”
어리석지만 일견 생각해 볼 만한 말이기도 하다. '절학무우(絶學無憂:배움을 끊으면 우환이 없다)'라고 했던가. 노자(老子)가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때로는 '아는 게 병, 모르는 게 약'이라는 의미일 터이다. '순수한 무지(無知)'를 견지할 수만 있다면 뭘 모른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문제는 미몽과 속악한 편견의 고착화에 대개 무지가 한몫을 한다는 점이다.
군대에 있었을 때 얘기다. 어느 날인가 책을 가까이하는 후임병에게 짐짓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야, 넌 대체 책은 뭐 하러 읽냐?”
“예? 뭐 하러 읽긴요. 뼈와 살이 되라고 읽는 거지.”
“이 세상에 책이 한두 권도 아니고, 평생 책만 봐도 다 못 읽을 엄청나게 방대한 양인데 어차피 열심히 읽어봤자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책은 한정되어 있잖아?”
“그런데요?”
“그러니까 내 말은… 열심히 읽어도 어차피 극소수의 책만 읽을 수밖에 없는 한, 독서는 편견의 축적에 불과하다는 거지.”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나의 견해에 대한 그의 반박은 아직도 기억에 있다.
“무지(無知)는 그보다 더한 편견입니다.”
어쩌면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무지로 인한 최악의 편견에서 가능하면 멀리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닐는지. 그렇다면 최악의 편견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벗어나기 위해 다독(多讀)이 요청되는 건 당연한 일일 터이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책 분량의 방대함이다. 애독가들 중에는 국립도서관이나 교보문고 같은 대형서점에 진열된 방대한 양의 책들을 보고 새삼 인생이 길지 않음을 한탄하는 이들도 적잖이 있을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책들을 다 읽을 필요는 없지만, 관심 분야의 책들을 독파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에 주어진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자신의 서재에 책을 2만 권이나 보유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리고 그의 독서량이 엄청나다는 것을 부정할 이유도 없지만, 확실히 그가 정말로 2만 권의 책을 한 권도 빠짐없이 모두 완독 했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다소 무리가 있는 가정이지만, 예컨대 60세의 그가 10세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에 한 권씩 완독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그가 50년 동안 읽은 책의 수는 '365 ×50=18,250권‘이 된다. 2만 권에 무려 1,750권이 모자란 수치다. 이것도 10세부터 하루에 반드시 한 권을 읽어야 한다는 무리한 가정 하에서나 가능한 수치다. 짧은 동화책이나 중편의 소설책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하루에 한 권을 독파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존 롤스의 <정의론>같이 분량이 상당할뿐더러 어렵기까지 한 책은 2만 권의 장서에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기에도 어려울 것 같다.
현실적으로 접근해 보자. 책벌레라 할지라도 일주일에 읽을 수 있는 가능한 권수는 많이 잡아야 대략 세 권 정도가 아닐까(책을 끼고 사는 작가나 학자의 경우조차 생업을 위해 소모되는 시간을 고려하면 사실 세 권도 무리다. 사회과학 서적이나 철학서 같이 쉽게 읽히지 않는 책을 포함시켰을 경우 이 수치는 더욱 내려간다). 이 경우 한 달이면 대략 10권 안팎이고, 일 년이면 대충 120권 내외가 된다. 10세 때부터 부지런히 읽어서 60세가 될 때까지, 그러니까 50년의 세월 동안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권수는 6천 권 남짓인 셈이다. 그러나 이것도 순전히 현실과 동떨어진 수리적인 차원의 얘기일 뿐, 현실을 고려하면 평생 동안 2천~3천 권 정도만 돼도 엄청나게 부지런히 읽은 셈이 된다.
사실 생업을 위한 일은 물론 취미활동이나 운동도 해야 하고 가끔 지인도 만나야 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2천~3천 권의 책을 읽는 일도 버겁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독서의 효율에 대해 강조하게 되고, 그 결과로 속독이 장려된다.
아주 오래전에 유명인사가 아닌 일반인들이 자신들만의 묘기를 공개하는, <묘기대행진>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었다. 흔히 등장했던 묘기들 중 하나는 ‘속독’이었는데, 그 장면은 비교적 선연하다. 한 학생이 방송국에서 무작위로 제시한 책들 중 하나를 굉장히 짧은 시간 내에 완독을 한다. 짐작컨대 두 페이지를 읽는 시간은 4초를 넘기지 않았던 것 같다. 해당 책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했는지의 여부는 학생이 완독 직후에 말한 대강의 줄거리로 가늠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두 페이지를 4초 이내에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실제로 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책을 건성건성 읽게 된다는 점에서 그리 권장할 만한 독서법은 아닌 것 같다.
좋은 작곡가라면, 불필요한 음을 남발하지 않는다. 작가인들 다르겠는가. 습작일지언정 소설이나 시를 써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서투른 글에서조차 한 문장 한 문장 허투루 쓴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결국 속독이란 독자의 자의적 판단 하에 집중하고픈 문장만 선취(選取)하고, 나머지는 작가가 세심하게 공을 들인 문장일지라도 그냥 흘려버리고 마는 엉성한 독법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은 그러한 속독법의 효과와 진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슬로 리딩’을 권장한다.
[‘슬로 리딩’이란 차이를 낳는 독서 기술이다. 여기서 ‘차이’란 속도나 양의 차이가 아니라 질의 차이를 말한다.(...)
소설가가 책을 느리게 읽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생각하면서 책을 읽기 때문이다. 중요한 구절을 만날 때마다 책을 놓아두고 생각에 잠긴다. (중략)… 속독이란 요컨대 머리를 사용하지 않는 독서이다. 반면 ‘지독(遲讀)’은 곧 ‘지독(知讀)’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단순히 정보처리 속도를 높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독서는 무의미하다.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 이것이야말로 독서의 본래 목적이다.(...)
양의 독서는 이제는 끝내야 한다. 앞으로는 자신에게 소중한 책을 소중히 여기며 읽는 독서를 하자. 세상에 넘쳐나고 있는 막대한 책들은, 평생 동안 아무리 애써도 극히 일부 밖에는 읽을 수 없다.]
이에 대해 에리히 프롬은 자신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를 통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존재 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깊이 아는 것’인 반면, 소유 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많이 아는 것’이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깊은 앎을 위해 지독(遲讀)은 물론, 재독(再讀) 역시 권장한다. 그것의 필요성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똑같은 한 권의 책이라도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나 의식에 따라 그 재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중략)… 자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책을 오 년 후, 십 년 후에 가끔씩 꺼내 다시 읽어보라. 그 인상의 변화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성장의 흔적을 실감할 것이다. 외관의 변화는 사진이나 동영상이 보존해 준다. 그러나 내면의 변화를 실감 나게 해주는 것은 책이다.]
혹자는 “나는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파기 시작했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근거로 히라노 게이치로나 에리히 프롬의 말을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이 반드시 ‘자신의 전공 분야만 파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각 학문의 연관성을 알고 있는 그들이 협소한 독서를 권장할 리는 만무하다. 그들이 만류하는 것은, 한 권 한 권에 대한 심도 있는 독서를 외면하고 단순히 권수(卷數)만 늘리는 식의 독서일 터이다. 소설을 예로 들자면 작가가 부여한 의미 있는 상징이나 은유를 무시하고 오로지 줄거리만 선취하는 식의 속전속결 방식이나 지문은 무시하고 대화만 자세히 읽는다던가 하는.
히라노 게이치로가 본서에서 주장하는 또 다른 내용은 ‘창조적인 오독(誤讀)’에 관한 것이다. ‘오독’이란 책을 잘못 읽는다는 의미로, 주로 저자의 의도에 반하는 의미를 유추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예컨대 반어적 표현을 직설법으로 받아들이는 것 따위). 히라노 게이치로가 말하는 오독은 그런 것이 아니라, 작가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의미를 창조적으로(그러나 타당하게) 발굴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독’에도 종류가 있다. 단순히 말뜻을 잘못 이해하거나 논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빈곤한 오독’이요, 슬로 리딩을 통해 심사숙고한 끝에 ‘작가의 의도’ 이상으로 흥미 깊은 내용을 찾아내는 것은 ‘풍요로운 오독’이다. (중략)…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오독’을 즐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작자의 의도’를 생각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본서의 중반 이후부터는 ‘슬로 리딩’의 실천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다음의 텍스트를 예로 들어 슬로 리딩의 효과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첨가하였다.
나쓰메 소세키 <마음>
모리 오가이 <다카세부네>
프란츠 카프카 <다리>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즈의 무희>
가네하라 히토미 <뱀에게 피어싱>
히라노 게이치로 <장송>
미셸 푸코 <성의 역사>
사족 :
물론 세상에는 별의별 인간이 다 있으므로, 속독으로 심도 있는 독서를 가능하게 하는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경우가 그렇지 않을까(그의 방대한 장서들을 보라). 그는 자신의 저서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서 '실전에 필요한 14가지 독서법' 중의 하나로 속독을 강조한다.
[속독법을 몸에 익혀라. 가능한 한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한 한 많은 자료를 섭렵하기 위해서는 속독법밖에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근데 나는 그게 안 된다. 따라서 히라노 게이치로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고양이 빌딩>. 건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서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