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Killing in the name of~
그들은 '심판하지 말라'라고 말하면서 그들 앞에 놓인 모든 것을 지옥으로 보내 버린다.
'응징'이나 '심판'등의 말보다 더 비복음주의적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니체, <안티 크라이스트>중에서
… 그것은 유아적 이기심의 세계이다. 범람하는 기독교의 기복(祈福)적 신앙을 보라. 그것이 어린아이들의 도덕적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자신의 병이 기도에 의해 낳았다고 해서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지구 위에 얼마나 많은 인간이 태어나고 죽어가고 있는가를 인지할 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네 살바기의 지성이고 도덕심이다.
-서우석, <말과 음악, 그리고 그 숨결>중에서
교황 프란치스코가 신의 자비에는 한계가 없다는 의미로 "신은 신앙 없어도 양심 따르는 사람을 용서"한다고 했다. 이 말을 들으니 문득 미국인 현각스님의 저서,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에 나오는 얘기가 떠오른다.
현각스님이 지하철 안에서 겪은 일이다. 어떤 남자가 승복 차림의 자신에게 다가와 말하기를, "오직 성경만 읽어라. 오직 예수님만 믿어라. 예수님만이 당신을 구원할 수 있다."
그는 또 이렇게도 말했단다.
"다른 종교를 믿지 말라. 그것들은 악마의 가르침이다. 만약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면 당신은 지옥으로 간다.....(중략) 금불상에 절하지 말라. 금불상에 절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라. 그것은 악마의 길로 빠지는 길이다. 우리가 IMF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도 우리나라에 금불상이 하도 많아 하느님이 우리를 벌주셨기 때문이다...." 이에 현각스님이 속으로 생각하시길,
'저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수십 번도 더 읽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원에서 성경을 따로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현학에 대한 단순한 자랑이 아님은 자명하다. 어쨌거나 자칭 크리스천이라는 그 아저씨는 현각 스님에게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직접 인용한다.
"당신, 미국에서 온 것 맞지요? 미국 아저씨. 미국은 예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사탄의 가르침을 믿습니까?"
그리고는 아예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지하철에 탄 사람들을 향해 "악마의 말을 전하는 사탄"이라고 소리 지르기도 한다.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한 번은 한 중년 여자가 나에게 "우리나라는 예수님 나라이니 하루빨리 한국을 떠나라"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성경만이 진리를 담고 있고 불경은 지옥으로 이끄는 죄의 말이라고 성토한 뒤 일일이 성경구절을 읽어주기도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들에게 내가 얼마나 예수님께 감사하고 있으며 예수님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하는지 성경책에서 글귀를 찾아내어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한번 시도했다가 큰 모욕을 당한 적이 있어 아예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무슨 대응이라도 할라치면 '어찌 감히 이런 옷(승복을 가리키며)을 입고 예수님 말씀을 인용하느냐'라고 따졌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나를 따라 내려 내 앞길을 막으며 나와 논쟁을 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중략)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지하철 내 옆자리에 아기를 안은 엄마가 앉아 있었다. 그 아기는 눈이 파란 사람을 처음 보았는지 자꾸 내 얼굴을 보고 방실방실 웃어댔다. 나는 아기가 웃을 때마다 같이 웃어주었다. 그러자 그 아기는 더욱더 활짝 웃으면서 이윽고 그 작은 팔을 죽 뻗어 내 옷(물론 승복)을 만지작거리면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아기엄마가 아기의 팔을 확 낚아채더니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들을 것 같은 아기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떼끼. 안 돼. 이 아저씨는 사탄이야. 나쁜 사람이야."
그러더니 아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른 자리로 옮겨 앉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놀라 가슴이 쿵쿵거렸다.
재미있는 것은 정작 (한국 입장에서는) 기독교의 종주국이라 할 미국에는 이런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중에서
한국은 90년대 말에 IMF라는 경제 위기를 맞은 적이 있다. 어떤 목사의 관점에서는 '불신지옥'의 현실적 결과가 IMF다. 별 참신할 것도 없다.
"한국에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은 배후에 마귀가 있기 때문이고, 마귀를 때려잡지 않으면 아무리 사람들과 싸워봐도 해결되지 않는다....(중략) 우리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혼돈을 가져오는 것이 원수 마귀라는 것을 알고 인터넷을 사용하는, 잘못된 신문을 사용하는 원수 마귀도 우리의 기도로 물리치자."
'잘못된 신문'이란 게 조중동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 목사는 후쿠시마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도 유사한 성격의 말을 남겼다.
"일본 국민이 신앙적으로 볼 때는 너무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와 무신론, 물질주의로 나가기 때문에 (이번 일은) 하나님의 경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전통적인(?) 사유 방식이다. 배가 좌초하는 것은 신이 노하셨기 때문이고, 심청이라도 인당수 물에 빠뜨리지 않는 한 노여움은 가시지 않을 거라는.
내가 보기에 하느님이 주신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을 제대로 가동하지 않는 한 인간은 결국 인당수 물에 심청이 빠뜨린 뱃사람들 수준에서 멈추는 것 같다.
지하철을 타게 되면 가끔 선교를 목적으로 장황한 설교를 늘어놓는 분들을 만나게 된다. 뭐, 누구든지 자신이 믿는 바를 타인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공공장소에서의 실례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아예 이해를 못 할 바는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불신지옥'을 들먹이는 건 예외다. 이 말은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불신지옥'이라는 말을 은유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지하철 안에서 이를 외치는 분들은 십중팔구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말하는 것 같다. 말 그대로 예수를 안 믿으면 사후 펄펄 끓는 유황불에 '영원히' 던져진다는 거다. 이런 분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지옥의 형벌이 무서워 믿는 것을, 당신은 '신앙'이라고 합니까? 보통 사람들은 '굴복'이라고 합니다만…. 그리고 '불신지옥'의 다른 의미는 '믿음천국'일 텐데, 그렇다면 '천국'이라는 보답을 위해 믿는 것을 당신은 '신앙'이라고 합니까? 포상금 십만 원을 타기 위하여 만 원짜리 습득물을 신고하는 건 아무래도 사리사욕 같은데 말이죠.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대사가 나온다. 알리사는 제롬에게 '보상을 바라지 않는 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니야, 제롬. 아니야. 미래의 보상을 위해서 우리가 덕을 쌓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니야. 우리의 사랑이 찾고 있는 것은 보상이 아니야. 자기 고통에 대한 보수라는 생각은 고귀하게 태어난 영혼에게는 모욕적인 말이야. 덕이란 그런 영혼을 위한 장신구가 아니야. 그것은 그런 영혼이 지니는 형식인 거야."
불신의 죗값을 '영원한 지옥불'로 치러야 한다거나, 믿음의 대가로 '천국에서의 영생'을 얻으려 하는 건 극단적인 이기주의적 발상 아닌가? 타인에게는 극한의 고통을, 자신에게는 극한의 행복을 부여하려 드는 가학적 이기주의를 그 어떤 정신 나간 자가 '윤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버트런트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이 불신지옥의 윤리적 문제점을 명확히 꿰뚫고 있다. 인용한다.
그리스도의 도덕적 성격에는 하나의 중대한 결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지옥을 믿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정말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원한 형벌을 옳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중략)
복음서에는 그리스도가 "너희들 뱀의 무리여, 독사의 세대여, 어찌 지옥의 저주를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한 것을 여러분은 알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의 설교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한 말인데, 제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최선의 말씨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지옥에 관한 이와 같은 말은 이외에도 아주 많습니다. 물론 성령을 거역하는 죄악에 대한 유명한 텍스트도 있습니다. "성령을 욕되게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이에 대한 용서를 받지 못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중략)
또 그리스도는 말하기를 "인자(人子)는 그의 천사를 보내어 그의 왕국에서 거역하는 자와 부정을 범하는 자를 거두어 이글거리는 불가마에 넣으려니 거기서 통곡하고 이(齒)를 갈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계속해서 이를 갈고 통곡하는 광경을 말합니다. 이것은 여러 절에 걸쳐 나옵니다. 이것을 읽는 사람이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통곡과 분노를 머리에 그리면서 어떤 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략)
다음에는 양과 산양을 두고 한 말을 모두 기억하실 줄로 압니다. 재림할 때 양과 산양을 분간하기 위하여 어떻게 산양에게 말하려고 했는가 들어봅시다. "너희 저주받은 자여, 내게서 떠나 영원의 불 속으로 들어가라"라고 하였고, "이들을 영원의 불 속에 넣어라"고도 하였으며, "만약 너의 한 손이 거역하면 그 손을 끊을지니 병신이 되어 생명으로 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으로 가기보다, 영원히 꺼질 수 없는 불 속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나으리라. 거기에는 구더기가 언제나 끓고 불이 꺼지지 않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말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합니다. 이 전체 교의(敎義), 즉 지옥의 불이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하는 이 교의를 저는 잔인한 교의라고 보고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이 세상에 잔인성을 퍼뜨린 교의이며, 여러 세대에 가해지는 잔인한 고문을 이 세상에 남겼습니다.
나는 예수의 이 말이 대부분 '비유'라고 믿는다. 혹자 또한 러셀 경의 견해ㅡ특히 '잔인한 고문을 이 세상에 남겼다'고 언급한 대목을 지나친 확대 해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전에 우선 러셀이 말한 바가 무엇인지는 다음의 내용으로 인용하여 보충할 수 있다.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는 스페인에서의 종교박해 기간 중에 자행된 고문에 대해서 우리는 오늘날까지 전율한다. 과연 그 시대 사람들은 사디스트이거나 살인자의 무리였는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그 시대에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권력층에서 그러한 사실을 찾아볼 수 있지만, 이러한 고문을 법제화했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문을 가하라는 명령을 마지못해 이행하면서 피해자들의 검게 구워진 시체의 냄새나 피 흘리는 모습에 역겨워했던 사람도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고문을 했는가? 그들은 이렇게 처벌받는 사람들이 무신론자라거나 천당을 가로막고서 지옥에 영원히 떨어지도록 저주하는 이교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문을 받는 동안이나 화덕에서 구워지는 동안 박해자들은 지금까지의 신념을 철회하고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의 영혼을 구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설령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그들은 이런 일이 자행되는 것을 보면서 이러한 운명에 처할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뜨거운 화덕에서의 몇 시간과 이러한 고문에 영원히 시달리는 것을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당장 그들을 고문함으로써, 박해자들은 그들의 영혼을 영원히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단 1%라도 최후의 순간에 개종할 확률이 있다면, (그들로서는)해볼 만한 모험이 아닌가? 천 명이 한 시간 동안 타오르는 불길에서 보내는 천 시간은 영원한 고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존 호스퍼스, <인간 행위론 : 현대 윤리학의 제문제>중에서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잘라버리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가 아닌 은유로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종교재판에 의한 고문과 학살을 오로지 그의 탓이라고 전가할 수는 없을 게다. 반면에 '불신지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에는 러셀 경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할 수밖에 없다. 지하철 안에서든지 어디서든지 불신지옥을 사실 그대로 믿으며 외치는 분들은 결국 예수를 욕되게 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정상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영구(永久) 화형'이라는 형벌은 그 죄가 무엇이든지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잖은가. 어떻게 종교의 윤리가 인간이 만든 사법체계의 그것보다 허접스러울 수가 있는가.
무엇보다 범죄 예방의 목적을 위한 방편의 차원으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한, 타율적 도덕이 다 무슨 소용인가.
게다가 의심이 많은 탓인지, 나로서는 그것이 진정 무신자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한 행동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떤 철학자의 말을 흉내 내자면, 그것은 타자의 부정을 통한 위계의 확립, 즉 '노예 도덕'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그들은 '이 통곡과 분노를 머리에 그리면서 어떤 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렸을 적에 동네 교회에서 무료 상영해 준 영화를 한 편 본 적이 있다. 플롯 자체는 아예 없었고, 단지 불신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영화일 뿐이었다. 지금은 다음 같은 지옥의 이미지들만이 남아 있다. 기요틴(단두대), 불, 구더기, 고통받는 사람들.
이 영화를 보면서 지옥에서 유리된 소위 '선택된' 사람들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과 조소를 읽었다면 그건 내가 워낙에 비뚤어진 탓일는지.
차이를 승인하지 않는 종교적 근본주의가 가져온 세상의 모든 잔혹과 비참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배운다. 물론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근본주의-배타적 일원주의는 본의(本意)를 은폐하는 도구로써 기능한다. 사리사욕을 위한 살육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한 것이 십자군 전쟁의 본질이 아닌가?
조지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벌일 당시에, 아버지 부시와 의논했냐는 기자의 물음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에겐 두 분의 아버지가 계시다.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는 텍사스에 계시고 한 분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다. 나는 더 높이 계시는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결정했다.” 부시의 말을 간단히 줄이면 이거다. "하느님이 전쟁하라고 시켰다."
부시의 방한 시 일부 기독교인들이 성조기를 흔들며 열렬히 환영했던 건 아마도 그가 이라크의 노약자와 어린이의 머리 위에 폭탄을 투하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목자이기 때문이리라.
물론 종교적 정당화는 기독교의 전유물만도 아니다. 소위 '명예살인'도 알라의 이름으로 행하여지지 않나. '신의 이름으로', '국가의 이름으로' 등, '~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무수한 살인들. 추상적이고 권위적인 존재 뒤에 은폐해 둔 권력자의 무수한 폭력성과 사리사욕들.
"Killing in the name of~."
일본의 승려 신란(1173~1262)은 "자기의 마음이 선하다고 죽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인즉, 자신의 선의를 너무 과신하지 말라는 의미다. 내가 살인을 하지 않는 건 마음이 선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죽여도 되지 않는 숙업을 지니고 태어났거나, 또는 살육의 환경과 시대를 운 좋게도 비켜날 수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대기근의 환경에서 내가 인육을 거부할지는 쉽게 장담하지 못한다. 만일 장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 내가 죽도록 배가 고프지 않기 때문이다.
… 살롱 인사들은 늘 옳은 편을 선점하고 있어. 살롱에 드나드는 사람치고 아침에 일어나서 비참하게 저녁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청렴을 자랑하지! 덕분에 배심원으로 나가서는 배가 고파서 당장 쓰러질 지경인 사람이 은 식기 한 벌을 훔쳤다고 거만하게 유죄를 선고할 수 있는 것이고.
-스탕달, <적과 흑>중에서
그러할진대, 상대적으로 '등 따뜻하고 배부른' 처지에서 너무나 쉽게 타인을 단죄하여 지옥행을 예고함으로써 타인들에 대한 자기만족적 정신적 우월감을 드러내는 일부 신자들의 행태에 대해 어떻게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현대의 종교적 근본주의자가 이교도 박해가 허용되는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떠하였을까?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크리스천을 구경하던 로마인들과 이교도 화형식을 구경하던 중세의 기독교인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었을까?
이는 논리적 비약일까?
1996년, 내가 묵고 있던 화계사에 세 번이나 불이 났다. 경찰은 기독교인을 범인으로 추정했다. 화계사는 불탄 절을 다시 세우고 개/보수하느라 1억여 원을 들여야만 했다. 나를 비롯한 국제 선원 스님들은 그 공사 때문에 며칠 밤낮을 매달려야 했다. 일을 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놀람과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까지 일었다.
'이곳은 우리가 사는 집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들이 믿는 신념과 우리가 믿는 신념이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사는 집에, 그것도 세 번씩이나 불을 지를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결코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행동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이 미국보다는 닫힌 나라다.
ㅡ현각,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중에서
현각스님...
국조(國祖)이신 단군께서도 그 비슷한 꼴을 당하셨습니다. 근데 사찰이라고 별 수 있었겠습니까?
ㅡ2013년 9월 13일의 글.
'
사족 :
물론 현각스님이 한국의 모든 기독교인들에 대해 이렇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글에서 사죄를 하러 온 한 목사님을 언급하며 깊은 감동을 받는다.
https://youtu.be/Ln6hJYxfLPc?si=ZoH4bRqVJs-RM8e2
ㅡ2024년 겨울, 국회의사당 앞.
나는 십자가를 든 이들에 의해 졸지에 '종북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 개신교에 대한 국민의 호감도는 14%라고 한다. 윤 씨의 지지율보다 낮은 수치다.
'일부'로 치부하며 방치한 결과가 아닐까?
일부+밀부+일부+일부+일부+일부+...........=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