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부재로서 영원히 현존하기

by 지얼

*2022년 7월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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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을 봤다.....

.... 고 말하면, 내 친구들은 어떤 질문을 가장 먼저 하게 될까?


1) 재밌냐?

2) 내용이 뭐냐?

3) 탕웨이 예쁘지 않냐?

4) 누구랑?




커트 코베인의 유서


<헤어질 결심>을 보고 나니 다소 뜬금없지만 커트 코베인의 유서 내용이 떠오른다.

따라서 이 영화의 한 줄 평은 다음과 같다.


서서히 사라지느니 불타는 게 낫다


서서히 사라지는 것ㅡ(진부한 표현이지만)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천천히 잊히는 것ㅡ보다는 한 번에 소각됨ㅡ소멸됨ㅡ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영원한 화인(火印)ㅡ미결사건ㅡ으로 남는 게 낫다....

.... 고 서래(탕웨이 분)는 생각했던 것일까? 어떤 경우에는 부재야말로 가장 강력한 현존이므로.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재는 존재들 가운데서 가장 확실하고, 가장 파괴될 수 없고, 가장 충실한 존재가 아닐까?'


평론가 이동진은 이렇게 평했다.

두 사람의 사랑을 영원으로 봉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겨 두는 것. 다시 말하자면,

사랑을 ~ing로 만드는 것=미결사건으로 만드는 것.

역설적이지만 사랑의 지속을 위해 헤어질 결심을 하는 것.


사랑이 자존감의 원천을 붕괴시킨다면 그 관계는 어떻게든 중단되어야만 한다. 자발적으로 포기하든, 혹은 나의 붕괴를 염려한 상대방에 의해 끝장나든.

그렇다고 해서 관계의 붕괴로 인한 결락감, 아니 그보다는 훨씬 날카로운 상실감의 자상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어떤 식으로든 '미결사건'으로밖에 남을 수 없는 것이다.


언젠가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연애 전의 너는 아주 유쾌한 사람이었는데, 끝장난 후에는 '고장'이 났다"라고.

'고장'이라는 말을 들으면 문득 '고장 난 고양이'가 떠오른다.

고양이 이마에 테이프 따위를 붙여놓으면 고양이는 그것을 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이상 행동을 보이는데, 마치 배터리 수명이 다 된 고양이 인형처럼 부동자세를 취한다. '고장'이 나는 것이다.


영화 속 서래(탕웨이 분)처럼 '붕괴'라는 낱말을 사전으로 찾아본다.


붕괴(崩壞)

1. 무너지고 깨어짐.

2. 불안정한 소립자가 스스로 분열하여 다른 종류의 소립자로 바뀌는 일. 또는 불안정한 원자핵이 방사선을 방출하거나 스스로 핵분열을 일으켜 다른 종류의 원자핵으로 바뀌는 일.


2번의 정의가 흥미롭다.

붕괴 : 불안정한 인간이 스스로 분열하여ㅡ스스로 핵분열을 일으켜 다른 종류의 고장 난 고양이로 바뀌는 일.




정여울 작가의 어느 사랑에 관한 문학 에세이집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잘 있지 말아요>

언젠가 후배 S 군이랑 어떤 가요의 노랫말을 들으며 실소한 적이 있다. 그 가사의 내용인즉, '비록 네가 나를 떠났지만 네가 잘 지내는 것만으로도 난 행복하다'는 얘기.

해탈과는 거리가 한참 머나먼 S 군과 나는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지X 하고 자빠졌네."

위선은 질색이다.

서래는 이별 직전에 해준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내 사진을 붙여놓고 잠도 자지 못한 채 계속 내 생각만 하게 될 거야."


불면증, 화인, 혹은 고장 난 고양이로 남아있기를 소망하는 사랑의 역설이라니.

그러니까 숙면을 위해서라도 사랑은 연필로 써라.

지우개로 빡빡 지울 수 있게.

Too much love will kill you.


하지만 붕괴를 감수하지 않는 사랑을 사랑이라 할 수 있나?

가시에 찔릴 것을 염려하면서 장미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까?

배트 미들러의 노랫말처럼 죽기를 두려워하면서 어찌 살기를 배울 수 있을까.


... And the soul afraid of dyin'

That never learns to 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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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불 속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꽃을 더듬는 내 손을 거두지는 않는다. 덤불 속의 모든 꽃이 아름답지는 않겠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꽃의 향기조차 맡을 수 없기에.

꽃을 꺾기 위해서 가시에 찔리듯, 사랑을 얻기 위해 내 영혼의 상처를 감내한다. 상처받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상처받는 것이므로.
사랑하라. 인생에서 좋은 것은 그것뿐이다."

-조르주 상드, <상처>



-랑랑이 연주하는 쇼팽의 Etude no.3 <이별의 곡>.

자신의 조국인 폴란드가 러시아의 침공을 받았을 때 상심의 마음을 담아 쓴 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Tristesse(슬픔)'이라는 부제가 붙은 거라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는 연인인 조르주 상드와의 이별에 부친 곡이라고 여기고 싶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얘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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