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몽?
자다 일어났을 때, 허벅지 아래 무릎 근처의 무수한 상처를 발견했다.
범인은 누구일까?
문을 잠그고 잤으니 이건 밀실사건이다(소년 탐정 김전일을 부를까?).
의심 가는 이들을 용의 선상에 올려본다.
1. 벼룩들
2. 프레디 크루거
3. 고양이
4. 번개맨
추론 :
1 : 벼룩들이 남기는 상처와는 상이하다.
2 : 프레디 크루거였다면, 난 벌써 죽었다.
3 : '사료랑 물 떨어졌어. 집사야 얼른 일어나. 박박~' 이랬던 걸까?
4 : 다수의 붉은 무늬로 봤을 때 번개 맞은 자국일 가능성도 있다.
확실히 고양이의 소행은 아니다.
고양이의 발톱은 저것보다 더 진한 상흔을 남기니까.
스코티시폴드 종인 '몽냥이'는 겁이 많아서 그런 것인지, 혹은 어둠을 좋아하는 것인지 대개는 소파 아래에 짱박혀 있다.
그러다가 기타 연습 좀 하려고 하면 슬그머니 나타나서는 내 허벅지 위에 올려달라고 떼를 쓴다(몽냥이는 덜떨어진 고양이라 점프력이 형편없다). 기껏 올려놓으면 오래 안 있다가 다시 내려가버린다.
역시 목적은 연습 방해인가...
믿거나 말거나 연습을 위해 여자도 멀리하는 내가 이놈 때문에 연습을 못하고 있다.
고양이는 제멋대로다.
내가 안으려고 들면 "귀찮다냥~"하고 도망가 버린다.
어떤 때는 지 맘대로 내 허벅지가 쿠션인양 잠시 머무르기도 한다.
올려달라고 떼를 쓸 때는 항상 앞발을 들어 내 종아리를 벅벅 긁는다.
문제는 반바지를 입었을 때다.
냥이의 닦달은 내 종아리에 생채기를 남긴다.
과거, 대딩 시절의 박 양과 닮았다.
그녀에게 전화로 '머잖아 함 보자'라고 했을 때, 그녀는 내게 이렇게 대답했다.
"만나면 뭐 하니. 이렇게 전화하면 됐지."
(젠장...)
그랬던 그녀가, 내가 K대(군대) 말년 병장이었을 때 하루가 멀다 하고 부대 통신과에 있었던 일반전화로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휴가 언제야? 빨리 나와."
한 달 후, 한 편의 영화를 찍으려던 기대는 산산이 박살 났다.
서리가 내리는 해변가 씬에서, 개빡친 영화 감독이 메가폰을 던지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컷! 어이, 박 양! 남주를 봐야지 어딜 보고 있는 거야?"
BGM : <질투>
넌 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야
내가 지금 여기 눈 앞에 서 있는데
날 너무 기다리게 만들지 마
웃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
그저 사랑의 눈빛이 필요할 뿐야
나의 마음 전하려 해도
너의 눈동자는 다른 말을 하고 있잖아
추억의 필름은 내 명치와 함께 여기저기 긁혔다.
꿈에서, 고양이는 여성성의 상징이라고 했나.
제멋대로다.
교훈은 있다.
그녀와 고양이 포함, 나 이외의 모든 타 존재는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아니, 때로는 나 자신조차도). 언제나 나의 기대를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사실을 좀 더 젊었던 시절에 깨달았어야 했는데.
-드라마 <반짝이는 워터멜론>의 한 장면 :
첼로를 연주하는 부잣집 영양 세경을 사랑하게 된 이찬 군. 그녀의 화려한 배경에 주눅이 들어 음악하는 선배 발산에게 울먹이며 하소연을 하기 시작한다.
"저는...가진 게....흑흑...너무 없습니다..."
선배 발산이 대답한다.
"그럼 밴드를 해야 해! 밴드맨은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어. 이 커트 코베인 형님이 증명을 하셨잖니."
이찬 군이 묻는다. "그게 누군데요?"
"있어, 그런 분이. 돈 없고 힘 없는 사람이 세계를 정복하고 미인을 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찬 군의 눈빛이 반짝인다. "밴드맨이 되는 것이야!"
하지만 현실은 이랬다.
밴드 음악을 좋아하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대해 세경이 대답하기를,
"좋아하긴. 소음 공해지."
새삼 깨달았다.
세계 정복은 차치하고, 내가 박 양을 차지하지 못했던 이유는 밴드맨 생활을 못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차피 박 양은 밴드 음악에 1도 관심이 없었다.
허벅지의,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생채기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밤 사이에 생긴 이 상처는 대체 누구의 소행이었을까?
어렸을 적에 손톱 기른 아재를 볼 때마다 극혐 했던 내가, 기타 연주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기를 수밖에 없는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어!"
추론 :
-음몽.
(꿈속에서 여성으로 변한 내가 누군가의 등짝을 벅벅 긁어댄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