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 싸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비루함
친구인 음해선생(별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아침에 뭐 해?"
"자." 무성의해 보이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아침에 나랑 일 좀 하자. 시에서 관리하는 농원에 제초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리하여 다음 날 오전 6시에 일어나 고양이 세수를 한 후에 편의점에서 산 샌드위치와 딸기 우유를 먹으면서 차를 몰았다.
15분 정도 달렸을까.
뱃속에서 약한 진도의 지진이 발생한 것을 느꼈다.
10여 분이 더 지나자 그것은 강진으로 진척되어 있었다.
현 위치는 산과 들밖에는 보이지 않는 어느 깡촌.
이른 시간의 한적한 시골이라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저 앞 도로 너머에는 가림막 역할을 능히 해낼 것 같은 웃자란 풀들이 보인다. 그리고 때마침 차 안에는 미리 비치해 놓은 일회용 휴지도 있다.
현타가 왔다.
노상방뇨, 아니 노상방변이라니... 대체 내가 뭘 생각하는 걸까?
문명인이라는 자존심을 부둥켜안고 괄약근을 더욱 옥죄었다.
이 나이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그것을 바지에 지린 적이 없다는 사실.
실로 이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초딩이 시절에 수업 도중 종종 이런 얘기를 듣게 되는 일이 있었다.
"선생님. 길동이가 바지에 오줌 쌌어요..."
하지만 생각해 보니 다음의 얘기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선생님. 길순이가 바지에 똥 쌌어요."
바지에 오줌을 지린 이유는 자명하다. 당시 숨 막힐 듯이 엄격하고 무서운 선생님에게 화장실 다녀오겠다는 요청을 수업 도중에 하기가 엄두에 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똥은 왜?
아마도 소변의 다급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급똥의 그것은 그 어떤 갈굼과 체벌조차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 절박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괄약근의 근력이 거의 소진되어 갈 무렵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2층 건물인 마을 회관 앞이다.
급히 그곳의 문을 당겼으나, 빌어먹을, 잠겨있다.
문득 끔찍한 상상이 엄습한다.
"뭐야! 바지에 똥 쌌어? 그 나이에?"
음해선생의 처연한 눈빛과 그에 반비례하는 독설이 쏟아지는 상상.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때였다.
바로 옆에 위치한 구멍가게의 문이 열리더니 초로의 구세주가 나타났다. 내가 물었다.
"저, 혹시 근처에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구세주께서 무심히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마을 회관 건물 우측으로 돌아가 보세요."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셨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한 후에 적당한 스피드를 유지하며(과속은 괄약근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다) 모퉁이를 돌아 화장실 입구로 다가갔을 때 마음속으로 외쳤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화장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던 거다.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은 후 바지의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방심은 금물이다.
최후의 안간힘이 붕괴되는 순간 채 벗지 못한 바지와 속옷은 고엽의 색채로 채색되리라.
다행히 그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수치심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영화 <친구>에서, "준석아. 니 와 그랬노?" 하는 상택의 질문에 준석은 이렇게 대답한다. "건달은 쪽팔리믄 안 된다 아이가." 그런데 어디 건달만 그럴까. 네이버를 통해 '수치심으로 인해 자살한 사람들'을 검색해 보았다.
다음의 썸네일이 눈에 띈다.
'성적 수치심에 의한 자살.'
'선생님이 교복에 생리혈 묻었다고 공개 망신 줘 결국 자살한 여학생.'
'인도 10대 여, 집에 화장실 없어 수치심 때문에 자살.'
이쯤 되면 더 이상 웃을 일이 아니다.
공통점이라면, 모두 다 생리적 현상에 관한 수치심이라는 거다.
그러고 보니 스티븐 킹의 소설 <캐리>에서, 10대 소녀 캐리의 분노심을 촉발한 것도 생리적 현상이 시작이었다. 인간의 성에 관련된 모든 것은 불순하고 악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캐리의 광신도 어머니가 생리 현상에 대한 교육조차 함구한 탓에 사춘기에 접어든 캐리는 때마침 교내의 공동 목욕탕에 흩뿌려진 자신의 선혈을 보고 멘붕에 빠지고, 급우 여학생들은 그런 그녀를 잔인하게 조롱한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스포일러이므로 여기까지.
(영화는 브라이언 드 팔머 감독이 연출한 1976년 작을 추천한다. 피칠갑 캐리의 모습은 정말이지 소름이 끼친다. 2012년에 리메이크된 작품에서는 클로이 모레츠가 캐리 역을 맡았는데, 음.... 캐리 역을 맡기에 클로이는 너무 귀엽다.)
밀란 쿤데라의 그 유명한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이런 대목이 있다.
[현대식 욕실에는 변기가 마치 수련의 흰 꽃처럼 바닥에서 자라나 있는 듯 보인다. 건축가는 육체로 하여금 자신의 비참함을 잊도록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한다. 물이 저수통에서 쏴 하며 변기통에 쏟아져 들어오면 내장에서 쏟아놓은 오물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모른다. 하수관이 촉수를 가지고 우리들이 사는 집안에까지 들어와 있는데도, 세심한 배려로 우리들의 시야에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똥의 베니스를 볼 수 없으며 이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바로 이 보이지 않는 베니스 위에 우리의 욕실이, 우리의 침실이, 우리의 무도장이, 우리의 국회의사당이 설립되어 있음에도.]
다음의 내용은 더욱 흥미롭다.
[똥은 약보다 더 다루기 힘든 신학적 문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류의 범죄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똥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인간을 창조한 분이 진다.(...)
....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의 이 같은 관찰에서 우리는 똥을 정당화시키는 일종의 신학적 정당화를 위한 열쇠를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이 낙원에 있었던 동안에는 똥을 누지 않았다. 아니면 (보다 더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써) 똥이 역겨운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인간을 낙원으로부터 추방한 순간 하나님은 인간이 얼마나 구역질 나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도록 했다.]
이어지는 대목은 아마도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요 주제 중 하나일 것이다.
[... 여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존재에 대한 정언적 동의의 미학적 이상은 똥이 부인되는 세계, 모두가 거기에서는 마치 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세계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일컫는다.
이것은 독일말로서 감상적인 19세기에 나타나 모든 언어들에 수용되었다. 너무 자주 사용한 탓으로 이 말이 지닌 원래의 형이상학적 의미는 없어져버렸다. 즉, 키치는 똥의 절대적 부정이라는 의미가 없어졌다. 말 그대로의 의미 및 전의적인 의미에서 키치란 인간존재에서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것은 모두 그것의 시야에서 제외시킨다.]
우리는 키치를 대충 저속한 싸구려 예술이라는 의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아니라고 밀란 쿤데라는 말하고 있다. 삶의 비루함과 추함이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일면-진실일진대, 그것을 외면하고 은폐하는 위선의 그럴싸한 포장지가 바로 키치라고.
교회에서 거룩과 성화를 성도들에게 요구, 혹은 권유할 때 마음 어딘가에서는 거북함을 느낀다. 단순하게는 그다지 성자의 반열에 오를 가능성이 없는 범상한 인간이 느끼는 '오르지 못할 산'에 대한 거부감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똥과 성화의 병치가 심히 불편하기 때문일 테다. 똥 싸는 주제에 무슨 성화! 뭐 이런 거다. 친구 박 모 씨처럼 똥 싸면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이 얘기는 예전에 쓴 적이 있다) 반(反)-키치적인 인간이 아예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이라면 우리는 고상한 것과 배설의 공존에 불편해한다(예컨대 배변하는 장원영을 상상하는 정상인이 과연 있을까?).
고상한 키치의 세계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키치의 세계에서 생리적인 모든 현상이 공공연하게 까발려진 개인은 능히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다.
문득 성적 수치심으로 인해 투신자살한 모 여기자가 떠오른다.
그날 이후로 나는 XX 베어즈라는 야구팀을 마음속에서 지웠다.
고딩 시절에 들었던 우스개가 있다.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똥으로 예술작품 빚기> 세계 대회가 열렸다.
많은 참가자들의 작품들 중에 단 세 명의 작품만이 본선에 올랐다.
본선 진출자 중 콩고 공화국의 응가야 씨가 사회자의 인터뷰에 응했다.
"응가야 씨. 당신은 똥으로 아이스크림을 만들었군요. 어떻게 하신 겁니까?"
응가야가 말했다.
"일단 스쿼드 자세로 똥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엉덩이를 돌려서 나선형의 똥무더기를 형성했죠. 엉덩이 회전 폭을 점진적으로 줄이는 것이 관건입니다." 관중석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그럼 이번에는 프랑스에서 오신 조올라 구리오 씨의 대답을 들어보죠. 구리오 씨, 당신은 똥으로 비엔나 소시지를 만들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사회자의 질문에 구리오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마찬가지로 스쿼드 자세에서 일단 지렸는데요, 3,4cm 길이의 똥덩어리가 나왔을 때 재빨리 괄약근에 힘을 주는 겁니다. 이때 조심해야 하는 게 있는데, 너무 강하게 힘을 주게 되면 끊어져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적절한 힘을 줘서 끊어지지 않게 그것의 굵기를 얇게 뽑아야 하는데요, 그런 다음에는 다시 괄약근에 힘을 빼서 다시 똥덩어리를 만들어야죠. 그리고 또다시 힘을 줘서 얇게 만들고.... 이것을 반복했습니다." 우레와 같은 갈채가 쏟아졌다.
잠시 감동한 사회자는 숨을 고른 후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일본에서 오신 막싸무라 씨에게 묻겠습니다. 막싸무라 씨는 무엇을 만드셨죠?"
믹싸무라가 대답했다. "저는 똥으로....마징가 Z를 만들었습니다."
"와우!" 관중석에서 놀람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사회자가 다시 물었다.
"마징가 Z를 만들었다고요? 너무 놀라운데요?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데 대체 어떤 방법으로 만드신 겁니까?"
막싸무라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손으로 빚었는데요."
그 당시 우리는 키치의 세계 따위는 가볍게 무시했었다.
품위의 좌불안석보다는 저속의 해방구에서 뛰어놀았다고나 할까.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팀의 전 감독인 알렉스 퍼거슨 경은 이렇게 말했다.
"SNS는 인생의 낭비다."
어쩌면 우정 관계의 낭비일 수도 있다.
어느 날인가, 내 페이스북의 게시글에 대한 대딩 시절의 친구 병진(가명) 군의 댓글이 미묘하게 거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뭐, 친구니까 까칠하게 반응할 수도 있겠지'하는 생각에 그러려니 했다. 한 번은 유튜브에서 오랜만에 보게 된 삐삐밴드의 영상을 링크한 후에 대충 감회의 글을 작성했는데, 병진 군의 댓글에 심히 '긁혔다.' 가장 긁혔던 내용은 이랬다.
[.... 나는 네가 예전부터 경박했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
이 댓글을 본 순간 이전 댓글의 악의가 비로소 명확해졌다. 나는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그러시겠지. 대딩 시절, 네가 민중을 위해 변증법적 유물론이니 자본론이니 하는 책들을 끼고 다니는 동안, 나라는 인간은 베짱이처럼 기타 따위나 들고 다니며 '니나노~' 했으니 말이야.]
그런 시절이었다. 교정에서는 "쪽발이, 양키 놈이 남북을 갈라/매판파쇼 앞세운 수탈의 나라"라는 가사의 운동권 노래가 종종 들려왔다.
운동권 학생들의 입장에서 매판파쇼를 앞세운 양키 놈들, 또는 제국주의자들의 음악을 하고 다니는 나 같은 인간은 얼마나 타파해야 할 반동으로 비쳤을 것인가.
....경박하다면 경박한대로 괜찮지 않은가? 왜 자신의 본질적 경박함을 다른 성질과 바꾸어 보여 주어야 한다는 말인가. 경박함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세상에서 가장 경박한 남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왜 그것을 다른 것으로 얼버무려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다자이 오사무
대학 모임을 위해 서울로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차 안에는 나 포함, 모두 네 명의 친구들이 타고 있었다.
절친인 박 모 씨ㅡ화장실에서 똥 사면서 '헨델의 <유쾌한 대장간>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클래식기타로 연주하던 바로 그 친구ㅡ는 운전석 바로 옆의 조수석에 타고 있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한 후에 잠시 정적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 순간 박 모 씨는 고개를 돌려 운전 중인 나를 지긋히 바라보며 씩 웃는 게 아닌가. 그러고 나서 3초 후,
"에이, 씨, 뭐야!"
"야, 얼른 창문 열어. 얼른!"
박 모 씨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이 인상을 쓰며 큰소리를 냈다.
박 모 씨는 이번에도 참으로 부적절한 장소에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음악을 연주하였던 거다. 존 케이지의 소리 없는 음악인 <4분 33초>를 모방하여 가죽피리로 소리 없는 연주를 시연했다.
이른바 '똥트림'이라고 하는.
그의 연주는 향기가 그윽하다.
아니, 곰팡이에 점령된 10년 묵은 된장의 내음이랄까.
근심 가득하고 심각할뿐더러 종국에는 비극일 수밖에 없는 인생에서 반-키치를 능히 추구하는, 박 모 씨 같은 일견 저열하고도 품위 없는 인간을 나는 사랑한다(익명의 공간만 아니라면).
그리고 나는 나이를 처먹어도 여전히 품위라고는 조또 없고 경박할 수밖에 없는 나를 존중한다. 음악과 문학을 논하기 전에 똥을 쌀 수밖에 없는, 다시 말해 급똥 앞에서 인간의 품위 따위는 똥통에 능히 처박을 것만 같은 나 자신을 긍정한다. 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매판파쇼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다.
안 그래도 세상은, 삶은 어차피 무겁다.
나까지 무거워지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