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진화심리학으로 배우는 나의 옛날 이야기
대딩 시절, 동아리의 한 여자 후배는 집이 다소 먼 관계로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다.
어느 따뜻한 봄날, 그녀가 나와 내 동기들에게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이번 축제 기간에 기숙사 오픈 하우스 행사를 한다니까, 놀러 오세요."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다.
"꼭 찾아가마. 마음은 무겁게, 손은 가볍게."
일 년에 딱 한 번 있는, 기숙사 오픈 행사.
일 년 중 유일하게 남학생들이 여대생 기숙사를 기웃거릴 수 있는, 변태 남학생일 경우에 패티시즘을 충족할 수 있는 순간이다.
기숙사 방의 이층 침대에 걸터앉아 사진 앨범을 구경했을 때다.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밟혔다.
"앗! 누구냐, 이 처자는?"
내 물음에 그녀가 대답했다.
"제 룸메이트인데요."
"근데 어디 갔어?"
"강의 들으러 갔어요."
계속하여 정체를 캐물어 미대생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름이 묘선(가명)이라는 사실도.
순간 묘선이라는 처자가, 우리 동아리에 적을 둔 후배 길남이(가명)의 같은 과 선배라는 걸 알아챘다.
어느 날, 길남에게 말했다.
"야, 너희 과 선배 중에 묘선(가명)이라는 여자가 있는데, 혹시 아냐?"
길남이 말했다.
"아, 묘선이 누나요? 알죠. 근데 왜요?"
"소개 좀 해 줘."
덧붙여 말하기를,
"안 그러면 너 죽어."
다음은 훗날 길남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다.
며칠 후, 길남이가 묘선 양을 우연히 만났다.
만나자마자 대뜸,
"누나, 소개팅 좀 해줘요."
갸는 이렇게 미끼를 던졌고,
"그럼 너는 나한테 뭘 해 줄 건데?"
그녀는 이렇게 미끼를 확 물어버린 것이여.
"그럼 저도 누나한테 소개팅해드릴게요."
사회성, 아니 수완이 좋은 후배다.
그렇게 하여 2:2로 미팅을 가졌다.
왜 1:1의 소개팅이 아니었냐고?
1:1은 좀 쑥스럽잖아.....
미팅 당일에 깍두기로 동참했던 친구 윤발이(가명. 근데 이 친구는 외모가 실제로 '깍두기' 같았다)가 어느 날인가 동아리방에 묘선 양을 데리고 욌다.
동아리방에서 열심히 기타 연습을 하고 있었던 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했을 거다.
'아니, 이것들이 대체 왜 같이....?'
하지만 쓸데없는 의심이었다. 윤발이가 말했다.
"복도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묘선 씨를 만났다. 생각난 김에 네 연주 좀 들려드리려고 이렇게 데리고 왔어."
대체 언제부터 기타라는 악기가 작업의 도구로 폄하되었단 말인가. 통재라.... 믿거나 말거나, 순수한 유미주의자로서 참담한 심경으로 메르츠의 <엘레지('졸라 슬픈 노래'라는 뜻)>를 연주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곡을 참 잘 치긴 했다.
며칠 후, 묘선 양과 함께 어떤 영화를 보러 그다지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는 어떤 영화관에 갔다. 작금에는 제목조차 생각이 안 나는 영화인데.... 아마도 공포 영화가 아니었을지 싶다(페노미나?). 그녀의 도파민 분비 상승을 위해서 롯데월드의 바이킹 대신 선택한 것이었을까?
아... 기억은 또 하나의 다른 기억을 부른다.
군 입대 직전, 한 선배님이 운영하시는 기타 학원에 취업, 아니 재능 기부를 했을 때다(재능 기부의 대가는 돈 대신 소주와 돼지갈비였다).
하루는 한국에 휴가차 잠시 방문한, 미국 유학생인 18세의 미나(가명) 양이 선배의 기타 학원에 등록하였다.
레슨을 하다보니 다소 친해졌다.
작금에 그녀가 내게 요구, 아니 부탁하곤 했던 말 두 가지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저씨, 담배 하나만 줘요."
또는,
"아저씨, 이매진(Imagine) 노래 좀 불러줘요."
당시 내 나이 고작 21세. 아저씨라니!
어쨌거나 마음씨 착한 나는 그녀의 요구를 거의 들어주었다.
맞담배도 허용해 주었고, 센티멘탈해진 그녀를 위해 존 레넌의 <Imagine>도 기타 반주를 곁들여 불러주었다.
일과가 끝난 후에는 선배님과 함께 돼지 갈비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미나 양은 당시 18세라 자리에 같이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술과 장미의 나날'이었달까.
아직도 귀에 선연하다.
"아저씨, 이매진 좀 불러줘요."
아,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 이 얘기는 해야겠다.
그때는 지금처럼 엉망진창의 음치가 아니었다는 것을.
어느 날, 미나 양이 말했다.
"아저씨, 영화 보러 가요."
다음날, 신사동 소재의 한 영화관에 갔다. 영화 제목은 아직도 기억에 있다. 여주인공이 읽는 공포 소설이 내용이 점차 현실화되어간다는 내용의 '하드커버(작금에 네이버로 검색해 봐도 이 영화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다)'.
도파민 과다 분비를 위해 노리고 간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시 나는 순수하기 그지없는 약관의 나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뭐 어쨌든,
영화가 중반쯤 경과되었을 때, 미나 양의 손이 뱀처럼 스르르, 나의 손가락 사이에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깍지 낀 손을 폴더니 손톱으로 나의 손바닥을 나뭇잎에 미풍이 스치듯 천천히 부드럽게 간질이기 시작하였다.
작금에 생각한다.
프랑스 영화 <연인>의 한 장면ㅡ차 안에서 중국인 아재와 프랑스 소녀가 서로의 손을 스치듯 쓰담쓰담 하는 장면ㅡ을 두고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하다'거나 '역대급으로 야하다'라고 호들갑 떨었던 그대들.
그대들은 변태가 아니다. 다만 좀 심오한 그 무언가를 알 뿐이다.
영화관을 나온 후에 식사를 위해 인근 레스토랑(작금에는 사실상 한국에서 사어가 된 낱말이다)을 찾았다.
당시의 카페나 레스토랑은 고객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자리마다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참 좋은 시절이었다.
칸막이가 쳐져 있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던 그 자리에서 식후 커피를 마시던 도중, 미나 양이 물었다.
"아저씨, 그쪽 자리로 건너가도 돼요?"
종종 생각한다.
왜 작금에는 그녀처럼 용감하고, 자발적이며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여성들이 없을까? 밀당이라는 허접하기 그지없는 얕은 수로 심리적 방패를 치는 게 아무리 진화심리학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나, 좀 당당하게 '당'만을 추구할 수는 없는 것일까?
아니다. 생각해 보니 그런 여성들이 없는 건 단지,
내가 늙었기 때문이다.
내 옆 자리로 넘어온 그녀는 내 손을 꼬옥 붙잡았고, 그녀의 확장된 동공과 그 너머 깊숙한 곳에서 무언의 갈망을 포착한 나는.....
세월이 한참 지나서, 토킹바 출신의 S양에게 이 얘기를 해주었더니 그녀가 알려주기를,
"손바닥을 손톱으로 살살 간질이는 거, 미국에서는 '오늘 밤 같이 있자'라는 신호래요."
정말일까?
사실이라고 해도 그때는 결코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윤도향의 노랫말이 머릿속에서 흘러나왔다.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늦어버린 것이 아닐까
흘려가는 세월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
뭔지 알 수 없는 미미한 악취가 나는 영화관 안에서 묘선 양이 자신의 손에 듬뿍 뿌린 향수를 내 손에 섬세하게 애무하듯 옮겨주었을 때, 순박했던 나는 아마도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연출 의도를 전혀 간파하지 못했으리라.
그렇게 철새는 날아가버렸다.
30주 넘게 아마존 판매부수 1위를 기록했던 화재의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작가는 특이하게도 동물학 박사라는 이력을 지녔다. 그래서인지 소설 곳곳에 생태학에 대한 전문지식이 나열되곤 한다. 인상적인 구절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1. 자연계에서는 2차 성적 특성이 두드러지는 우월한 수컷들이 열등한 수컷들을 제치고 암컷을 차지한다. 예컨대 뿔이 크다든지, 가슴이 넓다든지, 목소리가 크다든지....
2. 암컷은 우월한 유전자를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 그런 수컷을 선택한다.
3. 열등한 수컷들은 술수를 써서 암컷을 속인다. 부러 몸을 부풀린다든지, 부러 목소리를 크게 낸다든지 해서 교미의 기회를 시시 탐탐 노린다.
4. 예컨대 존만한 열등한 황소개구리 수컷들은 우월한 알파메일들 옆에 바짝 붙어있는다. 우월한 수컷이 다가온 암컷 황소개구리들 중 한 마리와 붕가붕가를 하는 동안, 존만한 열등한 황소개구리는 이때다 싶어 남은 암컷 한 마리와 붕가붕가를 한다.
5. 이런 사기꾼 수컷을 이른바 '음흉한 섹스 도둑'이라고 한다.
당시의, 180이 넘는 키에 근육질 몸짱인 윤발이(2:2의 미팅을 같이 했던 바로 그 친구)를 회상하며 진화심리학의 새로운 장을 펼친다.
자연계에서는 2차 성적 특성이 두드러지는 수컷들이 때로는 약한 절친 수컷에게 암컷을 유도하는 경우도 있다. "복도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묘선 씨를 만났다. 생각난 김에 네 연주 좀 들려드리려고 이렇게 데리고 왔어."
약한 수컷은 2차 성적 특성을 소리로 대체함으로써 암컷을 속인다.
그렇게 '음흉한 XX 도둑'이 예비된다. 그러나,
예비'만'되었다.
'음흉한 XX 도둑'조차 되지 못한 것이다.
이후 나는 홀로 동아리방을 '졸라 슬픈 노래'로 채웠다.
흘려가는 세월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캐릭터가 마치 <건축학개론>의 '납득이' 같은 친구, 상구(가명)가 내게 말했다.
"야, 지랄아(당시 내 별명이다). 어제 영화를 보니까 남자주인공이 여자 앞에서 기타를 친 다음에 자빠트리던데? 넌 좋겠다."
조용히 대답해 주었다.
조까
닥쳐
.....
사족 1 :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대중문화에서 많이 보이는 소위 '키치' 작품들은 진화심리학적 진실을 감성적으로 윤색하고 과학은 로맨티시즘을 날것의 진화심리학으로 진창에 처박는다.
사족 2 :
<가재가 노래하는 곳> 강추.
피비 케이츠, <Just one tou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