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탐이 여생을 줄일지언정
맘먹고 다이어트를 두 번 한 적이 있다.
한 번은 뇌경색 발발 이후에 혈압을 낮추기 위해 퇴원 후 15kg을 감량했다. 그리고 머잖아
요요가 왔다.
다시 80kg이 되고만 것이다.
지인 분의 한 살 먹은 아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무척이나 귀엽다. 문득 생각 난 바가 있어 절반쯤 농담 삼아 아기 어머니에게,
"이런 얘기 들으시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이 아이는 아기 때의 저와 똑같이 생겼어요."
정적을 뚫고 까마귀 한 마리가 지나갔다.
며칠 전, 친구인 음해선생(그의 별명이다)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나나 당신이나 이제는 얼굴에서 옛날 모습을 찾기 어렵지. 살은 처지고 턱선도 사라지고…"
문득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아기 어머니한테 "20살 때의 저는 지금처럼 안 생겼었어요"라고 둘러댄다 한들 무엇하리. 현재의 얼굴이 과거를 증거 하지 못하거늘.
문득 초딩이 신 모 양의 말이 떠오른다.
'이 아줌마(소피 마르소)는 늙었어도 예쁘잖아요. 쌤은 젊었을 때 못생겼기 때문에 지금도 그런 거예요.'
… 이어서 음해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아, 오늘부터 살 빼야지!"
순간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무슨 목적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서?
아니면 건강상의 이유?
결국 선생과 나는 다음의 내용에 동의했다.
여생의 유일한 낙은 먹는 거다.
그런데 잃어버린 턱선을 회복하기 위해 유일한 낙을 포기하는 게 좋은 일일까?
그리하여 식당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물막국수 둘에 비빔막국수 하나, 그리고 보쌈까지 먹어치웠다.
심리학자 매슬로는 인간 욕구 5단계설을 주장했다. 그 단계는 이렇다.
1. 생리학상의 욕구(기본적으로 먹을 것).
2. 안전상의 요구
3. 귀속과 사랑의 욕구
4. 존경의 욕구
5. 자기실현
음해선생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턱선을 온전히 회복하면 3.사랑과 4.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런 대답을 들었겠지.
"그 나이에?"
결국 1번의 욕구 충족에 자족하기로 결심했다. 턱선의 회복 대신에 배둘레햄을 수복, 아니 유지하기로.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랄까, 예루살렘 성전의 유적처럼 내 턱선의 흔적이 아직은 남아있다…
.... 고 믿었다.
오후에 서류에 붙일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관을 찾았다. 촬영 후 10분 후에 망연자실해졌다. 증명사진을 받아 보는 순간, 현실 파악을 했기 때문이다.
나의 턱선은 대체 어디에?
삼겹살과 소주, 그리고 막국수와 보쌈이 내 턱선의 흔적마저 지워버렸음을, 비로소 자각한 것이다.
영화 <베스트 오브 미>에서, 남주는 20년 만에 여주와 재회한다. 여주는 남주에게 감회를 피력한다. “나는 네가 지금은 대머리에 뚱뚱할 줄 알았어. 그런데 이렇게 멋있으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내게도 그런 기회가 찾아온 적이 있다. 문제는 그녀가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멋지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다만 몸매만이라도 오래 전의 그 모습을 보여줘야만 한다는 사명감의 엄습.
그래서 재회하기로 한 날로부터 두세 달 여 전 당시에 다시금 10kg을 감량했다.
....하등 쓸데없는 짓거리였다.
세월이 흘렀고,
이제는 안다.
이시하라 사토미가 '살만 빼면 사귀어 줄게요'라고 하지 않는 한 보쌈과 막국수를 포기할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시하라 사토미는 추상이고, 삼겹살은 구상이다. 인간은 구체적인 대상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나이듦의 가장 슬픈 일 중 하나는 삶의 낙에의 최후의 보루, 식도락에마저 철퇴가 내려진다는 사실이다.
노화를 예찬하는 자는 아마도 식탐이 결여된 인간일 것이다.
음해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밥 먹자."
"막국수?" 내가 대답한다.
"이번에는 한식으로 할까?"
"좋지."
"근데 오늘이 마지막이야."
"왜?"
"이젠 점심 같이 못 먹어."
"그러니까 왜 그러냐고?"
"어제 혈액 검사를 했는데, 지방간이 심하대."
그리하여 음해선생은 다이어트에 돌입할 결심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올해 그와의 마지막 점심식사가 되고 말았다.
냉장고를 열어 본다.
마시다 만 소주와 막걸리, 그리고 매실주가 있다.
매실주에 소주를 섞어먹는 것을 좋아한다.
대패삼겹살을 사다가 혼술을 할까, 생각하다가 사러 가기 귀찮다는 생각에 포기한다.
문득 생각한다.
귀차니즘이 승리할 정도로, 아직은 음주로 삶의 낙의 일부분이나마 붙들려는 절박함은 없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낙의 일부분이나마 성취하려는 것조차 귀찮아질 정도로 무기력해진 것일까?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주인공인 벤(니콜라스 케이지 분)은 죽기 위해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신다.
재즈 피아니스트인 빌 에반스는 의사로부터 헤로인 중독에 의한 죽음에의 경고를 받는다. 그럼에도 그는 일부러 끊지 않다가 결국 5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친구인 진 리스는 그의 죽음을 두고 "세상에서 가장 긴 자살"이라고 말했다.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은 한때 자살을 생각했으나, 죽으면 더 이상 술을 못하게 된다는 생각에 포기했다고 한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벤과는 반대로 술이 그를 살린 것일까?
어쨌거나,
적극적으로 술을 탐하고자 하는 능동성의 결여로 보았을 때
아아, 나의 정신은 얼마나 건강한 것인지.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하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이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린다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껶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네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꽂
아
다
오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최승자 시집 <즐거운 日記>, 中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