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서 없는 글도 나름 좋아
假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 이후 마스크를 쓰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진행된 지 한참 지났을 때는 마스크를 안 쓰고 외출하면 외려 결락감이 느껴졌달까.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해방되었을 때도 내가 일하는 학원의 초딩 여학생들은 항상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녀서 나로서는 그녀의 얼굴 생김을 정확히 알 수 없을 때가 태반이었다. 대체 이 아이는 어여쁜 눈매에도 불구하고 왜 마스크를 고집하는 걸까?
나중에 깨달았다. 미모에서 하관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크다는 것을.
약 8년 전, 컴퓨터로 밤새 미디 작업을 한 후 이른 아침에 담배를 사러 가는데... 어라, 세상이 뿌옇다. 눈곱이 꼈나 해서 눈을 비벼 보았지만 탁한 세상은 그대로다. 이후 내 망막은 (특히 왼쪽 눈) 점차 탁해지더니 2개월 만에 왼쪽 눈은 거의 실명 상태에 이르렀다. 거리의 커다란 간판 글씨조차 알아볼 수 없었던 거다.
백내장 수술 후에 광명을 찾았고 그때부터 시력에 대한 경각심이 부각되었다. 자외선 차단을 위한 선글라스는 생필품이 되었다.
교회에서 야유회를 갈 때도 선글라스를 반드시 착용하는 내게 한 집사님이 물으셨다. "오.... 꼭 주윤발 같으세요." 그때 내가 검은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농담을 하시는 분들과 대면할 때마다 "아, 제가 사실은 일찍이 백내장을 앓아서 시력에 민감합니다. 그래서 시력 보호 차원에서..." 하는 이유를 구구절절이 설명하기가 귀찮아졌다. 그렇다고 "후까시 좀 잡으려고 썼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다소 위악적이다. 하여 그저 이렇게 답변하곤 하였다.
"이 선글라스는 못생김 방지(혹은 차단)용입니다."
잠을 설친 탓에 눈이 잘 떠지지가 않는다. 특히 뇌경색 발발 이후로는 왼쪽 눈이 안검하수 상태가 되어 가뜩이나 작은 눈이 잠을 설친 이후로는 더 작아진다. 욕실의 거울을 보니 문득 초딩이 초아(가명) 양이 했던 말이 생각이 난다.
쌤
존나 못생겼어요
나도 알아 임마...
나는 일종의 언어 폭력성 체벌로서 초아 양을 응징하고자 한다. 초아 양이 어떤 연습곡의 다섯째 마디에서 자꾸 미스톤을 낸다. 선생 노릇을 오래 해서 그런지 그게 역량의 부족 탓인지 아니면 설렁설렁 대충 치려는 귀차니즘 탓인지 보면 안다. 후자인 경우 나는 초아 양을 이렇게 협박한다.
"한 번의 기회를 줄게. 미스톤을 안 내고 성공하면 오늘 레슨은 끝이야."
"정말이에요?"
"당근이지. 하지만 이번에도 틀리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데요?"
"10년 후, 대학생이 되는 너는 학교에서 나와 똑같이 생긴 남학생과 연애를 하게 되는 거지."
"그런 법이 어딨어요?"
"어딨긴 어딨어. 여기 있지. 미리 말해두지만, 내 저주는 실제로 잘 통해."
초아 양은 미션을 훌륭히 완수한다.
‘존나 못생겼어요’는 말은 단지 중2병의 질풍노도에서 나온 게 아니라 순수한 진심이었던 거다.
어쨌거나 순수한 시력 보호의 도구였던 선글라스는 ‘못생김 차단’으로 자연스럽게 용도 변경이 되었다. 내 앞에서 절대로 마스크를 벗지 않는 초딩이 민아(가명) 양에게도 그렇게 용도 변경의 순간이 찾아왔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비슷한 소재의 일본 만화를 본 일이 있다. 그 만화 속의 여학생들에게 마스크는 일종의 속옷이다. 남학생이 그녀들의 얼굴을 보게 되는 건 거의 성희롱에 맞먹는 일인 거다.
“민아야.”
“네?”
“너는 왜 마스크를 안 벗는 거니?”
“그냥요.”
“난 네 얼굴이 무척 궁금해. 어디 함 보자.” 그녀의 마스크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그녀가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악!”
“어…. 왜 그래?”
“신고할 거예요!”
“신고? 무슨 신고? 내가 무슨 죄를 졌는데?”
그녀가 단호하게 대답한다.
“성희롱이요!”
그런 일본 만화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렇게 나는 성범죄 미수범으로 전락한다.
“형, 그게 뭐야. 실내에서까지…. 그냥 벗어!” 후배 아쿠마(악마) 군이 밥 먹다 말고 마수를 뻗더니 내 선글라스를 안면에서 떼어낸다. 순간 개빡친 나는 그를 신고하고 싶어졌다. 이것의 심리적 충격은 초딩 시절에 장난기가 심한 한 학우에게 당했던 일과 대등하다. 그 학우는 운동장에 서 있었던 츄리닝 차림의 내 뒤에 닌자처럼 다가와 전광석화 같은 손동작으로 임무를 완수했다. 일타쌍피-츄리닝 바지와 빤쓰를 동시에 벗긴 것이다.
내 인생에 처음 겪은 성희롱의 가해자가 동성의 급우라니.
빌어먹을.
잠깐....그렇다면 작금의 내 와꾸에 대한 부끄러움은 당시의 내 꽈추에 대한 그것과 동등하단 말인가?
이런 씨부엉.....
외모, 혹은 신체 컴플렉스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들이 다소 있다.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소설 <코>의 주인공은 못생긴 코 때문에 괴롭다. 서머싯 몸의 장편 소설 <인생의 굴레에서>의 주인공은 절름발이 신세를 한탄하며 신을 버린다. 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의 주인공도 못생긴 코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에게 다가서지 못한다.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메리 셀리의 소설 주인공인 이름 없는 ‘괴물’이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창조자 이름일 뿐, 괴물에게는 이름조차 없다. 문득 코미디언 고 이주일 선생님의 유행어가 생각난다.
얼굴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마스크건 선글라스건, 이것들의 공통분모는 ‘가면’으로서의 역할이다. 가면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위선과 거짓 따위의 이미지를 갖기 십상인데, 기실 우리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이 가면(페르소나)의 존재일 거다. 영화 <반칙왕>의 송강호는 타이거 가면의 레슬러 페르소나로서 살 때 비로소 당당해진다. 영화 <조커>의 호아퀸 피닉스도 조커 분장을 할 때 진정으로 (사악하게) 용감해질 수 있다. 드라마 <마스크 걸>은 또 어떤가? 가면은 때론 구원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내 친구 박 모 씨(화장실에서 똥 싸면서 기타 연습하는 바로 그 인간)가 인생 영화로 꼽은 일본 영화, <헨타이카멘(変態가면)>의 주인공이 있다. 주인공 ‘교스케’는 밝히기 좀 거시기한 그 무엇(?)을 가면 삼아 머리에 뒤집어쓰는 순간 수퍼 히어로로 변신, 인질로 잡힌 여주를 구해내고 빌런들을 작살낸다.
‘헨타이 카멘’ 교스케의 탄생 비화는 이렇다. 교스케의 엄마는 결혼 전, SM클럽의 여사장이었고, 교스케의 아빠는 형사였다. 형사 재직 시절 불법 SM 클럽의 현장을 덮쳤을 때, 그는 되려 여사장에게 체포되어 밧줄에 결박 되는 처지가 된다. 여사장이 채찍으로 그를 사정없이 내려쳤을 때,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른 후에 뭔가 각성한 듯 중얼거린다.
“이것도 나름 좋아….”
처맞는 게 좋다고?
음… 이에 대해서 13세기의 수피교 신비주의자인 루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통이 개입할 때 어디에 무관심이 있는가?” 심리학자 폴 블룸의 저서 <최선의 고통>에 나오는 얘기다. “… 고통을 가치 있게 만드는 또 다른 힘이 있다. 바로 정신을 집중시키는 고통의 능력이다. 육체적 고통 또는 공포와 혐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무엇이 되었든 확실하게 주의를 붙잡는다. 새뮤얼 존슨이 말한 대로 ‘자신이 2주 후에 목이 매달릴 것이라는 사실은 주의를 훌륭하게 집중시킨다.’” 그래서일까? 소설 <이방인>에서 단두대 형을 목전에 둔 주인공 뫼르소가 해방감과 평화를 느꼈던 이유가? 하긴 동시대의 어떤 철학자도 그랬다. 고통의 순간에 비로소 자유가 열렸다고.
폴 블룸 교수는 이어서 이렇게 썼다. “양성 피학증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지배자 역할을 하는 어떤 여성이 한 말을 즐겨 인용한다. 그녀는 ‘채찍은 누군가를 지금 이 순간에 있게 만드는 좋은 수단이다. 그들은 다른 것으로 눈을 돌릴 수 없고, 다른 것을 생각할 수도 없다.’” 고통이 자아의 무게를 잊게 만들어 준다는 걸까?
위의 글을 읽었을 때, 그다지 공감할 수 없었다. 아무리 고통에 나름의 한계(절호점sweet spot)를 둔다고 해도(예컨대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의 채찍질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거다), 고통은 고통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도 나름 좋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랬던 내가...
요즘도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자주 착용하고 산다. 밝은 빛이 부담스럽기 때문이고, 자외선이 유발할 수도 있는 녹내장에 대한 공포, 그리고 마스크의 경우에는 특히 레슨이나 대화 시에 침 튀김이나 구취를 차단할 수 있는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연히 ‘셀프 촬영 모드’로 역전된 핸드폰의 액정에서 확인되는 청춘의 상실과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는 프랑켄슈타인 ‘괴물’의 자괴감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청춘~을
돌려다~오
선글라스와 마스크 때문에 귀에 염증이 생겼다. 그것들에게 귀와 얼굴의 경계 부분이 심하게 쓸렸기 때문이다. 노란 진물이 흘러나왔을 때 급히 약국에서 알코올이 적셔져 있는 소독용 솜을 구입했다. 소독을 하기 위해 그것을 환부에 갖다 대었을 때 느껴지는 찌릿찌릿한 아픔. 그러나 료스케 아빠처럼 처음으로 각성했다.
아… 이것도 나름 좋아….
흑사병이 창궐하던 중세 유럽에, '플래질런트'라는 셀프 채찍질 고행자들이 등장했다고 한다. 작금의 질병은 신의 징벌이니 자기네들도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용서를 빌어보겠다는 거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어딘가 삐딱한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당신들, 은근히 즐기는 거 아님?
소독용 솜이 환부에 닿을 때 쓰라림의 통증을 느낀다. 그것은 마치 환부의 속살을 사포로 문지르거나 불로 지지는 것 같다. 그럼에도… 왠지 자꾸만 소독을 하고 싶어진다.
뭐지?
이 쓰라린 쾌감은?
분명 쓰라린데 ‘이것도 나름 좋’은 거다. 마조히즘적 쾌감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었던가!
질병(코로나와 녹내장) 방지라는 순수한 목적의 용도가 ‘못생김 가리개’로 변태되더니 이제는 어느덧 그것들이 유발한 환부에 가해지는 고통마저도 달콤한 피학으로 지각되는 상황이다.
아…
나 역시 어느덧 헨타이 아재가 되어버렸단 말인가….
https://youtu.be/5abamRO41fE?si=p22N_InOEKbHe7W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