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얼굴도 잘 생기고 기타도 잘 치시는, 나보다 5, 6년 정도 학번이 위인 한 선배님이 계셨다. 편의상 '진호 선배'라고 호칭하겠다(물론 가명이다).
어느 봄날, 따뜻한 햇살이 내리는 교정의 잔디밭에서 진호 선배는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멀리서 있는 한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신경을 끄고 계속해서 연주에 매진했던 진호 선배가 문득 인기척을 느껴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다가온 그 여학생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진호 선배가 연주를 멈추고 말했다.
"뭡니까?"
그녀가 편지지를 내밀며 수줍은 듯 말했다.
"여기...."
진호 선배가 다시 물었다.
"이게 뭔데요?"
그녀는 대답 없이 얼굴을 붉히며 서있었다. 진호 선배는 그녀가 발길을 돌리기도 전에 접힌 편지지를 펴고 그녀의 면전에서 읽었다. 연애편지임은 자명했다.
"뭐야, 이게 대체..."
그러더니 진호 선배는 그녀의 면전 앞에서 부욱, 부욱하고 편지지를 찢어버렸다. 아니, '쫘악 쫘악 찢어발겼다'는 표현이 적확할 것이다(찢어버린 편지지 조각들을 그녀의 면전에 던져 버리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 형.... 그러면 어떡해요." 먼 훗날, 이 얘기를 들은 내가 진호 선배에게 따졌다. 진호 선배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러게..... 그때는 내가 왜 그랬을까."
"아니, 얼마나 참담했겠어요." 내가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지." 진호 선배가 말했다. "그때는 왜 그렇게 까칠했는지 몰라."
지금이라면 아마도 이런 대답을 했을 것 같다.
테스토스테론이 과잉 분비 되어서 그래요.....
테토남이었던 진호 선배의 행동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에겐남이었던 나로서는 간혹 여자 앞에서 절박하지 않은 그분의 태도가 부러울 때가 있었다.
절박한 자는 여자 앞에서 찐따 취급 당하기 마련이다.
문득 나의 찌질했던 청춘 시절의, 쫘악 쫘악 찢어발기고 싶은 한 페이지가 떠오른다.
설익은 참외처럼 시퍼런 20대 초반의 시절이다.
여사친이지만, 언젠가 반드시 여친 삼고 싶었던 수지(가명)의 생일이 머지않았던,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나는 전재산을 털어 18K 귀걸이를 구매했고, 그녀의 생일날에 그것을 전해주었다(연애 초심자들이여, 부디 이런 짓거리는 절대로 금할지어다. 상대가 바라지도 않는 비싼 선물을 증여하는 것은 호구 월드로 가는 직행열차일지니).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났을 때,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내 생일날에 사준 귀걸이 있잖아, 귀에 부착하려는데 고리 부분이 똑 끊어져 버렸어. 산 데 가서 딴 걸로 바꿔올래?
아니, 뭐 이런 그지발싸개 같은 경우가.... 뭐지? 이 당당한 태도는?
에겐남에게도 자존심은 있다.
그날 이후로 손절각을 잡았다.
씨부엉, 앞으로 한 달 동안 절대로 내가 먼저 연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2주를 버텼다.
괴로웠다.
전화를 하려다가 수화기를 내려놓기를(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었다) 몇 번이었던가. 문득 고 신해철의 노랫말이 생각난다.
너에게 전화를 하려다
수화기를 놓았네, 잠시 잊고 있었나 봐
잠시 잊고 있었나 봐. 그녀는 나를 개-호구로 봤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앞으로 전화하려고 수화기를 드는 순간, 너는 불혹이 될 때까지 총각 딱지를 떼지 못할 것이야.
그리고 또 2주가 흘렀다.
고적한 겨울이었다.
한 달여가 지날 무렵, 수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무진장 반가웠지만, 속내를 숨기고 부러 시큰둥하게 말했다.
"어... 웬일이야?"
그녀가 대답했다.
"웬일이긴. 그냥 생각나서 했지."
"그렇군.... 그러고 보니 그동안 통 전화를 못 했네. 내가 좀 바빴거든."
그녀가 말했다.
"전화했어도 내가 못 받았을 걸."
나는 그녀에게 말려들기 시작했다.
"응? 그래?" 내가 물었다. "근데 왜?"
그녀가 대답했다. "내가 좀 먼 데 있거든."
"먼 데? 어딘데?"
"꼭 말해야 돼?"
"응."
그녀는 잠시 망설인 후에 말했다.
"좀 먼 데야. 안 들려? 이 파도 소리가?"
"글쎄다.... 너 지금 어딘데?"
"여기 제주도야." 그녀가 말했다.
"제주도? 거긴 왜 갔는데?" 내가 물었다.
"왜 갔냐고? 너, 참 눈치 없다."
"뭔 눈치? 거긴 왜 갔냐니까."
"여자가 제주도에 갔다면 대체 왜 갔겠니?"
"대체 뭔 소리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나이가 꽉 찼잖아."
순간 시간은 얼음이 되었다. 고작 21살인 주제에 나이가 꽉 찼다고 말한 것의 어이없음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잠시 후, 마음을 추스르고 내가 말했다.
"너 결혼했어?"
"이제 알았니?" 그녀가 말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지만, 애써 덤덤한 척을 하고 말했다.
"그렇구나... 야, 어떻게 연락도 없이...."
잠시 후 말을 이었다.
"그랬구나. 뭐 어쨌든... 뒤늦게나마 축하해."
실로 힘없는 목소리였으리라. 감추려고 해도 짙은 상실감은 충분히 전해졌을 것이다.
혼자 망연자실하고 있는 그때, 갑자기 그녀가
"호호호호...."
하며 웃었다. 순간 깨달았다.
당했다.....
그녀가 최후의 똥덩어리를 집어던졌다.
"너 참 되게 순진하다. 그걸 믿니? 호호호..."
내가 순진한 게 아니라, 네가 여시 같은 거야.
영화 관계자가 네 연기를 봤다면 스카우트 제의를 했을 텐데.
네 얼굴이라면, 아마도.
절박한 자가 '을'이다.
절박한 자는 '갑' 앞에서 대개 찐따, 멍청이가 된다.
마크 맨슨은 <절박함을 버린 남자들>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항상 남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만나는 모든 여성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바로 당신이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당신이 데이트하는 모든 여성이 거짓말을 하고 작위적으로 행동하며 이기적이고 나쁜 태도로 당신을 대한다면, 혹은 당신이 데이트하는 모든 여성이 수동적이고 개성이 없다면, 그건 당신의 신념과 행동이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유형의 여성들만 선택하게 유도한다는 뜻이다.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당신이 자각하든 못 하든 여성과의 관계에서 얻는 결과는 항상 당신의 책임이다.
그래, 이게 다 내 탓이다.
그 이전에, 그는 이렇게 썼다.
그녀가 아무리 예뻐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그녀는 당신에게 충분히 좋은 사람인가? 진실된 사람인가? 똑똑하고 밝고 배려심이 있는가? 그녀가 당신을 모욕하거나 신뢰를 깨트리면 곧바로 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못 벗어났고, 그래서 당했다.
그 이후로 절치부심하여 체질 개선, 아니, '성질 개선'에 애썼다.
세월이 한참 흐르고.... 그리하여 에겐남에서 테토남으로의 진화를 이루어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름의 개수작을 부릴 줄도 아는 수컷이 되어 그다지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여성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라면 좀 끓여줘요.
그보다는 고양이 좀 보여달라고 했어야 했나.
참으로 하찮기만 한, 이루기 어려운 꿈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딩 시절로 돌아가 공부를 열심히 하여 전교 1등을 차지한 후 다음 시험에서는 부러 정답을 비껴가는 답안을 작성하여 모든 과목에서 0점을 받아 전교 꼴찌라는ㅡ양 극단의 성적이라는 전무후무할 대 업적을 이루는 거다.
물론 어디까지 '꿈'일 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타임슬립은 불가능하고, 전교 1등을 하는 것은 더욱더 불가능하다.
또 하나는 다음과 같다.
카페 문을 열고 주위를 둘러본다.
모서리 쪽 테이블에 수지가 앉아 있다. 경직된 표정을 보니 화가 난 것이 틀림없다.
그럴 수밖에. 나는 지금 약속 시간에 40분 늦은 것이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뭔가를 꺼낸다.
수지에게 다가가서 테이블 위에 그것을 가볍게 던져 놓는다. '짤그랑'하는 소리가 들린다.
수지가 묻는다.
"이게 뭐야?"
내가 말한다.
"보면 몰라?"
"반지잖아." 그것을 일별한 수지의 눈빛이 순간 번뜩인다.
"앗, 이건...." 그녀가 그것을 집어 들더니 눈 가까이 가져간다. "다이아잖아!"
나는 (자리에 털썩 앉은 후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허벅지 위에 올려놓으며 시선은 딴 데를 향한 채) 시크하게 내뱉는다.
"오다 주었다. 난 됐으니 너 해라."
어느 경우가 가장 불가능할까?
순위를 매겨 본다.
3위 : 타임 슬립
2위 : 전교 1등
1위 : 보석 구매(다이아몬드)
문득 이용의 <잊혀진 계절> 노랫말이 떠오른다.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다음 생에는 부가티... 아니, 페라리라도 타고 다닐 수 있게 될까.
그리하여,
"자기야, 이 다이아몬드 비싼 거 아냐?" 수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는다.
나는 훗,하고 가벼운 콧바람을 내며 대답한다.
"껌이지, 뭐."
덧없는 알파메일에의 꿈.
꿈 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