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는 과일일까, 채소일까?
머잖아 무덤 속으로 들어갈 예정에 있는, 역대급 골초라 해도 과장이 아닐 후배 S군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점심 식사를 같이 하자고. 그의 속마음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갈 때 가더라도 파스타 한 접시 정도는 괜찮잖아?'
그렇다고 영화 <신세계>에서처럼 그를 고층에서 낙하시킨 것은 아니다. <비XXX트>라는 가게는 1층 건물에 있다.
나는 버섯이 주재료인 크림 파스타를 주문했고, 그는 토마토소스로 요리된, 면인지 스테이크인지 알 수 없는( 넓적한 면과 저민 고기를 섞어 오븐에 구운) 파스타를 주문했다. 아마도 토마토가 항암에 좋기 때문일 것이다.
크림소스를 한 숟갈 떠먹는 순간 눈에서는 광명이 스쳐갔고, 머리 주변에서는 버섯의 환영이 둥둥 떠다녔다. 문득 대령숙수... 아니, 셰프에게 묻고 싶어졌다. "이 소스는 정녕 무엇이 조합되었기에 이런 풍미를 풍긴다는 말이냐?"
S군의 것을 한 젓가락, 아니 한 포크 먹어보았다. 순간 적절한 습기를 머금은 붉은색 토마토의 광채가 후광처럼 내 머리 주변을 맴돌았다.
"정녕 신묘막측한 맛이로다...."
내 몸 안에 암세포가 있었다면 그 순간 모두 멸절되어 버렸으리라.
토마토소스를 한 입 떠먹었을 때, 문득 깨달았다. 토마토를 왜 과일이라고 칭하지 않고 야채라고 하는지. 내가 알기로는 한식에 토마토를 넣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소스로도 쓰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토마토는 늘 과일처럼 날 것 그대로 먹었다. 가끔 얇게 썰어 설탕을 쳐 먹기도 했다(다 먹은 후에 남은 국물(?)이 진정 백미다). 그런즉 토마토는 채소라기보다는 당연히 과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토마토를 소스로 만들어 먹는 서양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과일보다는 야채로 인식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S군과 헤어진 후에, 직장인 학원에 와서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을 재독했다. 패니 플래그 작가의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다(이 작품에 대한 서평은 차후에). 419페이지를 읽고 있는 중에 다음의 대사가 눈에 꽂혔다.
"토마토가 과일이라는 거 알고 계세요?"
스레드굿 부인이 놀라며 말했다.
"그런가요?"
"그렇다네요."
"그럴 리가. 난 평생 동안 토마토는 야채라고 생각해 왔어요. 야채라고 생각하고 식탁에 올렸죠.... 토마토가 과일이라고요?"
"네."
"정말요?"
"네. 가정학 시간에 배웠던 걸로 기억해요."
난 반평생 동안 토마토는 과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과일이라고 생각하고 우그적 우그적 씹어먹었다. 토마토가 야채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토마토가 과일이 아니라 야채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 이후로 토마토를 먹을 때마다 영화 <매트릭스>를 만든 감독은 워쇼스키 형제가 아니라 워쇼스키 자매라고 인지해야 하는 것처럼 토마토가 과일이 아닌 야채라는 사실이 어색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토마토가 과일이라고?
적어도 소설은 그렇다고 말한다. 소설대로라면 애초의 내 판단이 옳았단 거다.
의혹이 들어서 네이버 지식백과를 검색해 보았다.
[토마토가 과일이냐 채소냐 하는 시비가 한때 미국에서 정부와 업자 사이에 논란이 있었다. 이에 대법원에서 토마토를 채소로 판결을 내렸다.]
저자인 패니 플래그 여사에게 묻고 싶었다. 저기... 아주머니... 토마토는 채소라는데요?
네이버 지식백과에 이런 글도 소개되어 있다. ["토마토가 빨갛게 익으면 의사 얼굴이 파랗게 된다."는 유럽 속담이 있다. 즉 토마토는 의사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건강에 좋은 식품이라는 뜻이다.]
오... 내가 과도한 음주와 흡연에도 불구하고 뇌졸중으로 죽지 않고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것은 어쩌면 토마토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속에는 전생에 토마토케첩을 못 먹어서 죽은 먹깨비 귀신이 있다. 감자를 재료로 한 과자는 무조건 케첩을 찍어 먹는다. 계란프라이를 먹을 때도 그것을 쳐서 먹는다. 그뿐이랴. 돈가스를 먹을 때도 돈가스 소스 대신 토마토케첩을 쳐서 먹는다.
한 번은 파스타가 너무 먹고 싶어서 찬장을 뒤졌는데 적절한 재료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우동사리에 토마토케첩을 듬뿍 뿌려 볶아먹었다. 먹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며칠 후에 친구 K군에게 이 레시피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그가 말했다.
"너나 실컷 쳐드삼."
토마토케첩의 맛과 건강상의 효능을 알지 못하는 이 무지몽매함이라니. 토마토케첩에는 항암 효과가 있다고 하거늘!
문득 후배 S군에게 나만의 독창적인 레시피로 만든 이 '토마토케첩우동파스타'를 맛 보여 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건강에 좋다고ㅡ항암효과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역대급 골초인 그에게는 좋은 음식일 수밖에 없겠지만, 아마도 이번이 아니면 그가 지상에서 이 요리를 맛볼 기회는 없을 것이다. 무덤 속에서 토마토케첩우동파스타를 요리해서 남편에게 먹일 와이프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
결국 이 요리를 해 줄 수 있는 이는 나밖에 없다.
하지만 자꾸 K군의 말이 마음에 걸린다. K군의 첨언에 의하면 '개도 안 먹을' 요리라는데, S군인들 이걸 먹을까?
그래, K군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요리는 토마토케첩 먹깨비인 나 같은 인간이나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고 한다. 결혼 전이라면, S군은 토마토케첩우동파스타일지라도 머잖아 결혼할 그의 여친이 요리한 것이라면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먹어주리라(역겨움을 억지로 숨겨가며). 하지만 무덤에서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S 군, 100% 농담이니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셈.)
오래전, 친구들이 성냥개비로 3단을 쌓은 오리온 초코파이를 케이크 삼아 내게 들이밀었다. 그중 한 친구가 말했다. "소원을 빌고 불을 꺼." 나는 소원을 빈 후('올해가 가기 전에 여친과 붕가붕가를....') 입바람을 불어 맨 상단의 초코파이에 꽂혀있는 성냥개비의 불을 껐다. 친구들이 노래를 불렀다.
"왜 태어났니~왜 태어났니~."
그로부터 약 15년 후, 내 결혼식에 저명한 음악가이신 은사께서 찾아오셨다. 축의금을 주시면서 내게 말씀하셨다.
"결혼을 애도한다."
생일이든 결혼이든, 나라는 인간은 도통 축하받을 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축하를 받을 수 없는 인간은 타인을 향한 축하에도 어색해한다.
일반적인 축하 인사말이 어색한 나는 그때 생각이 나서 축의금 봉투에 "결혼을 애도한다."라고 쓰려다가 몰개성적 흉내 같아서 관둔다.
한참을 고민한다.
이렇게 쓰면 어떨까
Welcome to the grave of love.
어쩌면 우동사리로 교살당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