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거의 이유

-네가 아프면 난 안 아프다

by 지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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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셰프> 9화의 한 장면에서,

뜨거운 차를 쏟아 손에 약간의 화상을 입은 연지영(임윤아 분)에게 왕인 이헌(이채민 분)이 말하기를,

"약조해라. 다시는 다치지 않겠다고....

니가 아프면 내가 더 아프니까."


난 왜 이런 대사만 보면 오글거림이 과포화되어버리는 걸까. 연애세포가 전멸한 탓일까, 단지 늙어서 그런 걸까.

한때 이런 대사도 있었지.

"아프냐... 나도 아프다."

젠장....

내 입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말이다.


근래 <철학자와 오리너구리(Plato and Platypus>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런 내용이 있다. 꽤 감동적이다.

[쿠퍼 부부가 치과에 갔다. 쿠퍼 씨는 전혀 감정적 변동이 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의사에게 요청했다. "마취나 다른 치료는 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바로 신경 치료를 시작해 주세요."

치과의사가 존경심을 담아 말했다. "제 환자들이 당신처럼 훌륭한 평정심을 가지면 좋겠는데요. 그런데 어느 이가 아프신가요?"

그러자 쿠퍼가 옆에 있던 아내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여보, 뭐 하고 있어. 얼른 입 벌려야지."]


위의 쿠퍼 씨와는 반대로, 고통을 호소하는 분만 직전의 아내에게 "여보... 내가 대신 아프고 싶소."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정충을 제공한 남자가 실제로 그 통증을 경험해 보지 못해서일 것이다. 만약 신이 왕림하셔서 그의 말을 들어준다면 그는 10초 후에 이렇게 말하리라.

"여, 여보, 잠깐... 바통 터치."

그러고 보면 영화 <타이타닉>의 잭은 참으로 위대했다. 얼음물 같은 바닷물 속에 입수했을 때 뗏목(?) 위의 로즈에게 바통 터치 따위는 요구하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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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아프면 내가 더 아프다..."

마음속에 습기라고는 1도 없는 내가 말한다. "뻥까고 있네!"

실증주의자로서 말하건대 '너'의 아픔을 '나'는 느낄 수 없다. 절친인 박 모 군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 피똥 싸봤냐? 안 싸봤으면 말을 마세요... 에이리언이 내장을 휘저어놓는 것 같거든." 지독한 장염 얘기다. 장이 건강한 박 모 군은 절대로 이 고통에 공감할 수 없다. 단지 막연하게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겁 없이 수면 내시경 말고 눈 뜬 채로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영화 에이리언의 유충(?)이 식도로 침투하는 상황의 고통을 이해할 것 같았다.

고통은 엄연히 경험론의 영역이다. 선험적인 (고통의) 체감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오직 내 경험만이 진짜라고 말하고픈 유혹이 있다. "나는 내가 보고, 듣고, 아픔을 느낀다는 것을 알지만, 다른 사람이 그러는 것은 알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없다. 나는 나이고, 그들은 그들이니까."

반면에 누군가에게 내 경험만이 유일하게 진짜라고 말하려니 부끄럽게 여겨진다. 그리고 나는 그가 자신도 자기 경험에 대해 똑같이 얘기할 수 있다고 대꾸하리라는 것을 안다. 이는 어리석은 궤변으로 이끄는 듯이 보인다. 나는 또한 이런 말도 들었다. "만일 당신이 아픈 사람을 가엾게 여긴다면 당신은 적어도 그가 아프다고 믿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것을 도대체 믿을 수가 있는가? 그것을 증명할 어떤 가능성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경험이라는 관념을 얻을 수 있겠는가?

ㅡ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청갈색책> 중에서


설령 연지영이 겪은 화상을 이헌이 예전에 경험해 본 적이 있다고 한들, 연지영의 화상을 보고 단지 고통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지 실제로 피부에 통증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고로 '니가 아프면 내가 더 아프다' 따위의 말은 인식론적 차원에서 순 개뻥이다.

"그게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육체적 고통을 보면 자신의 마음이 더 아프다는 얘기잖아!"라고 혹자는 항변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말도 수사적 과장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날, 신께서 왕림하사 내게 회피할 수 없는 밸런스 게임을 명하신다. 신이 내리신 문제는 이렇다.


ㅡ너는 다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야 한다.

A. 매일 1분 동안만 펄펄 끓는 기름 가마 속에 입수하기(생명은 보장)

B. 깨어있는 내내 우울증 환자로 지내기.


난 무조건 B다.

정신적 고통은 육체적 고통을 능가할 수 없다.

만일 자살이라는 것이 A의 방식으로만 가능하다면 자살자는 거의 없게 되지 않을까?


미시마 유키오의 단편 소설 <우국>에 등장하는 일본군 장교는, 국가에 대한 충성과 동료와의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상황에서 결국 할복을 선택하지만, 일본도가 자신의 창자를 끊어놓았을 때 그는 분명 후회했으리라. '우, 씨...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걍 잠수나 탈 걸. 명예는 얼어 죽을...'

잭이 로즈에게 바통 터치를 요구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심적 고통이 로즈가 겪을 추위보다 고통스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절박하게 로즈의 생명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한 가지 더, 분석철학자라면 아마도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다.

"이헌이 그렇게 말한 것은 '아프다'는 일상언어의 모호함 때문이다. 책상다리에 발가락이 찧였을 때 '아프다'라는 언어를 쓰고, 썸녀에게 대차게 까였을 때도 '(마음이) 아프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기실 괴로움의 성격이 엄연히 다름에도 일상적으로 우리는 '아프다'라는 말을 혼용해서 사용한다. 생각해 보라. 포경수술 이후의 통증과 수지에게 '우리 이제 헤어져, 너, 너무 못생겼어.'라는 말을 들은 후의 괴로움이 어떻게 질적으로 동격일 수가 있는가? 둘 다 '쓰라리다'고? 그게 언어의 오용이라니까.

한마디로 일상언어의 모호함과 오용으로 인해 이헌은 본의 아니게 연지영과 여성 시청자들을 심쿵하게 만든 것이다." 라고.***


고로 내가 이헌이라면 연지영 처자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약조해라. 다시는 다치지 않겠다고....

니가 아프다고 나까지 아픈 건 아니지만 보기에 괴롭구나."

또는,

"아프냐? 난 안 아프다(미안하다)."


하지만 상생을 위해서는 때론 오글거릴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엄밀한 과학적/논리적 언어의 세계를 사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에 기반한 시-언어의 세계를 사는 것이니까.

엄밀한 언어를 추구하는 한 독거는 필연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이렇게 말하도록 하자.

아프냐? 난 죽을 것 같다.

또는,

네가 아픈 순간, 난 이미 죽어있다(북두신권).


북두신권


*** : 이별할 때, 뇌의 전방대상피질이 활성화 되는데, 통증을 관장하는 부위라고 한다. 따라서 혹자에게는 이별의 슬픔도 진짜 '아픔'일 수 있다고 한다.



사족 1 :

내 얘기는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사족 2 :

신의 밸런스 게임에 의한 논증은 소위 유비논증의 오류 아니오?라고 반박하시는 분이 있다면 무조건 님 말이 맞습니다.


사족 3 :

장염 얘기에서, 에이리언이 내장을 휘저어놓는 것 같다고 했는데 실제로 에이리언을 경험해 본 것도 아닌 당신이 이헌의 말을 비판할 자격이 있소?라고 반박하시는 분이 있다면 이것도 무조건 님 말이 맞습니다.

(근데... 에이리언의 체내 침입을 진짜로 경험한 인간이 있기는 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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