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지상주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옥변>

by 지얼
만화로 보는 <지옥변>


Art for art, 즉 ‘예술지상주의’라 불리는 정신의 모토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한마디 말로 정의될 수 있을 거다.

“유용(有用)한 것은 추하다.”


이를 뒤집어 말하자면 ‘무용(無用)한 것은 아름답다’는 것인데, 이는 예술이 예술 이외의 그 어떤 대상을 위해 봉사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의 극단적 표현일 테다.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모든 예술은 완전히 무익하다


예컨대 모든 실용예술이나 참여예술은 '불순'하므로 글러먹었다는 것. 다시 말해 예술의 영역에 산업이나 정치나 윤리 같은 예술 이외의 '유용한' 것이 개입되면 ‘꽝’이라는 거고, 따라서 예술은 그 자체로 순수하고 무목적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거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비판한,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 같은 소설은 예술이 될 수 없다. 유미주의자의 견해에 의하면.


오스카 와일드. "선과 악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사람은 매력적이거나 지루하거나 둘 중 하나다."
"착한 것보다 아름다운 것이 더 낫다. 그러나 못생긴 것보다 착한 것이 낫다."


이 예술지상주의를 다룬 소설들 중에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지옥변>보다 더 강렬하고 막장인 것도 없다. 내용은 이렇다(스포일러 주의).


일본 봉건시대의 교토 호리카와에 예술을 사랑하는 어떤 대(大) 영주가 있다. 원숭이의 외모를 닮은 요시히데는 그 대영주의 전속(?) 화가인데 슬하에 열다섯 살 난 어여쁜 딸을 하나 두고 있다.

어느 날, 영주의 아들이 애완 원숭이를 학대하는 장면을 본 요시히데의 딸은 “소인의 아버지가 매를 맞는 것 같아 보고 있기가 민망하다”는 이유로 만류한다. 이를 본 대영주는 그 효심에 탄복하여 상을 내린다.


한편 ‘방자하고 교만하여 자기가 이 나라 제일의 화가라는 것을 코에 걸고 다니는’ 요시히데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사도(邪道)에 빠졌다’는 세간의 악평에 꿋꿋이 맞서며 “그대는 추악한 것을 좋아하는군.”하고 말하는 대영주의 말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러하옵니다. 엉터리 화가들은 추악한 것의 아름다움을 알 턱이 없습니다.”


게오르크 바젤리츠의 그림. "너희들이 추미를 알아?"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 "아.... 추하지만 아름다워..."
장 미셸 바스키아의 그림. "낙서 아님?"



하루는 대영주가 요시히데에게 지옥의 광경을 그린 ‘지옥변(地獄變:지옥변상도의 줄임말)’을 그릴 것을 명한다. 몇 날 몇 밤을 그림에 매달린 요시히데는 보다 생생한 지옥의 광경을 담기 위해 제자의 몸을 쇠사슬로 결박한다. 지옥을 그리기 위해 어디선가 잡아와 기른 뱀이 단지에서 빠져나왔을 때에도 제자가 뱀에 물릴 것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아까운 일필(一筆)을 놓친 것에 분개한다.


한번은 부러 제자 앞에 수리부엉이를 풀어서 그가 도망가는 모습을 화폭에 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히데는 영감의 부재로 인해 창작의 벽에 부딪혀 번뇌한다. 결국 요시히데는 지옥도를 위해 인륜을 저버리게 된다.

그림이 거의 다 완성되어 갈 무렵, 요시히데는 대영주에게 무언가를 요청한다(다시 한번 스포일러 주의).


“대강은 다 되었습니다만 다만 한 군데 아직도 저로서는 아무래도 그리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뭐? 그리지 못하는 것이 있어?”
“네. 저는 무엇이고 제 눈으로 본 것이 아니면 그리지 못합니다. 비록 그린다 해도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소인은 쇠사슬에 묶인 자를 본 일이 있습니다. 괴조(怪鳥)에게 시달림을 받은 자의 모습도 자세하게 베꼈습니다.(...)”
“그러면 대체 무엇을 그리지 못하겠단 말이냐?”
“저는 지옥변 병풍의 한가운데에 비단 수레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그리고자 합니다.”
(...)
“그 수레에는 한 사람의 요염한 궁녀가 불길 속에서 검은 머리카락을 날리면서 괴롭게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아아…그런데 우차(牛車) 속의 궁녀를 아무래도 그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부디 비단 수레 한 대를 소인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될 수 있으면…”
(....)
“비단 수레에 불을 지르겠다. 또 그 안에는 요염한 여인을 귀부인처럼 옷을 입혀 태우겠다.(...) 그것을 그리겠다고 생각하다니 과연 천하제일의 화가로구나. 기특한지고. 오오, 기특한지고.”



이하의 스토리는 상상하는 그대로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이 참화 앞에 선 요시히데에 대해 이렇게 쓴다.


아까까지는 지옥의 책고(責苦)에 괴로워하던 것 같은 요시히데가 지금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빛을, 마치 황홀한 법열(法悅)의 빛을 주름투성이인 얼굴 가득 띄우면서, 대영주님의 어전인 것도 잊었는지 가슴에 팔짱을 꼭 끼고 서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아무래도 그의 눈에는 딸이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오로지 아름다운 불길의 빛깔과 그 속에서 괴로워하는 여인의 자세가 한없이 마음을 기쁘게 하는ㅡ그런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가 자기 외동딸의 단말마를 즐거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는 그것뿐이 아닙니다. 그때의 요시히데는 왠지 인간으로 생각되지 않는, 꿈에 보는 사자왕의 노여움을 닮은 기괴한 엄숙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루 위의 대영주님만큼은 마치 딴사람인가 싶게 얼굴빛이 창백해지고 입언저리에 거품을 물고서 보랏빛 바지의 무릎을 두 손으로 꽉 붙잡고 마치 목이 마른 짐승같이 계속 헐떡거리고 계셨습니다.


이 소문은 금방 퍼져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개중에는 그를 욕하여 그림을 위해서는 천륜마저 잊어버리는 인면수심의 괴물이라고까지 말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저 요카와의 스님도 그런 생각에 편드시는 한 분으로서, “아무리 일예일능(一藝一能)에 뛰어나더라도 사람으로서 오상(五常: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다섯 가지 덕)을 잃으면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뒤 한 달쯤 지나서 요시히데는 즉시 그것을 저택으로 가져가서 공손하게 대영주님께 보여드렸습니다. 마침 그때 요카와의 스님도 함께 계셨지만 쭉 펼쳐진 병풍의 그림을 한번 보시더니 과연 저 일첩(一帖)의 천지에 불어 제치는 불 바람의 무서움에는 놀라셨던 게지요. 그때까지 찌푸린 얼굴로 요시히데를 노려보기만 하더니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시며 “훌륭하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대 영주님께서 쓴웃음을 지으시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후 그 화가를 나쁘게 말하는 자는 적어도 저택 안에는 거의 한 명도 없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저 병풍을 보는 자는 평소에 아무리 요시히데를 미워했더라도 이상하게 엄숙한 마음이 일어나 염열지옥의 대고간(大告艱)을 느끼게 되기 때문일까요.


예술작품이라는 위대한 결과는 그 수단을 합리화한다는 것이 저자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본심은 아닐 것이다. 그는 위와 같은 극단적인 이야기를 통해 아마도 윤리가 개입할 수 없는 순수 예술의 영역과 가치에 대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미학자 진중권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위험한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하나비(불꽃놀이) 속에서 ‘위험함’과 ‘아름다움’은 하나가 된다. 꽃불은 축제의 놀이일 수도 있지만, 전쟁의 무기일 수도 있다. 꽃불과 전쟁은 작렬하는 모양이 같고, 폭발하며 내는 소리도 같고, 자욱한 연기 속에 풍기는 냄새도 같다. 가령 여름밤을 수놓는 축제의 꽃불과, 대공포의 연화(煙花)를 헤치며 벚꽃처럼 떨어지는 가미카제는 서로 닮았다. 도덕적 판단을 접고, 순수 미학적으로 보라. 놀이와 전쟁, 어느 쪽이 더 격렬한 감동을 주는가?


문득 기타노 타케시의 영화 <소나티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기타노 타케시가 상대 폭력단을 소탕하기 위해 총구에서 불꽃을 뿜던 장면과, 천진난만한 소녀가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하던 장면의 교차 편집이 의도하는 것도 아마 이런 것일 테다.



<지옥변>의 얘기가 지나치게 극단적이라면 현실적으로 이런 건 어떨까? 예컨대 1940년대의 아우슈비츠 인근에서 콘서트를 하는 클래식 피아니스트라든가, 작품 사진을 남기기 위해 몇 백 년 묵은 금강송을 죄다 베어내는 어느 사진작가라든가…… 그들의 작품이 지고지순하게 미학적이라고 가정했을 때, 우리는 “아무리 일예일능(一藝一能)에 뛰어나더라도 사람으로서 오상(五常)을 잃으면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요카와의 스님의 말처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반면에 윤리에 괄호를 치고 예술을 보는 건 그리 생소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윤리로부터 그다지 자유스러울 수 없는 대개의 평범한 인간은, ‘소리’를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한 아버지(<서편제>를 보라)를 용납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렇게 해서 탄생한 소리의 아름다움 또한 부정하지 못한다(물론 강제 실명이 '소리'에 恨의 미학을 입혔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했을 때 말이다). 지옥도를 본 요카와의 스님처럼 "훌륭하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달까. 이런 얘기도 있다. ‘음악가로서의 바그너는 용납할 수 있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그는 참을 수 없다’는.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라고 말해봤자 그것은 예술 작품의 가치에 대한 평가에 편입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형법이 변태적 창작 행위를 단죄한다고 해서 해당 작품의 가치가 빛을 잃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그 자체로서 순수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마도 유미주의자들의 주장일 거다. 살해한 여자들의 신체에서 추출한 체취로 향수를 만들었을지라도 그 향수가 뭇 사람들을 홀리는 천상의 향기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라고.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 얘기다.


언젠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관한 기사가 실렸을 때 다음과 같은 댓글을 본 적이 있다.

"불륜을 저지른 인간의 영화 따위는 볼 수 없다."

이처럼 보통의 평범하게 착한 사람들에게, 예술과 윤리의 일도양단식 분리는 지난한 일일 듯싶다.


우리는 말한다.

"그림을 잘 그리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라."

유미주의자들은 말한다.

"그게 뭔 상관인데?"


드뷔시의 이름 앞에는 항상 '비사교적인', '사랑에 약한', '교활한', '호색적인', '방탕한', '반항적인' 등과 같은 수많은 형용사들이 따라다녔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무관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제인 스튜어트 스미스, <로뎀나무 아래> 중에서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생각에는 아포케(판단 중지) 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일까?

우리가 허용할 수 있는 창작자의 과오는 어느 선까지인 것일끼?

나는 성폭력의 가해자인 감독이 만든 수작 영화를 정서적 선을 그은 상태로 순수하게 감상할 수 있을까?


2015. 1. 23



사족 :

이렇게도 자문해 보자. '오상(五常)을 잃은 일경일능(一經一能)한' 재벌 총수의 가석방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는 뭔가? 경제는 예술과는 다르다? 글쎄다. '경제지상주의자'들이라면 같은 논리를 저들에게 적용하지 않을까.

"예술이 생의 전부는 아니잖아?"라고 하면서.


사진 촬영을 위해 금강송 12그루를 벌채한 사진작가 정 모 씨.

"(이 나무들을) 영원히 살도록 내가 해주고 있다니까요, 영원히."


클로드 드뷔시의 <Arabesque no.2>. 교활하고 방탕하며 호색한인 데다가 반항적인 인간이 작곡한 곡은 안 아름다운가?
클로드 드뷔시, 베르가마스크 조곡 중 <Clair de lune(월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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