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 만족도 나름 괜찮아
제주도.
삼다(三多 : 바람, 여자, 돌)의 섬.
현무암과 귤, 그리고 종려나무가 많은 곳.
1131 지방도인 '귀신 도로',
일출봉,
억새풀,
한라산이 있고
홍대 여신 요조가 운영하는 <책방무사>가 있는 곳.
'제주도에 가서 살까?'
… 하고 생각하다 쓴웃음을 짓는다.
이런 물음 자체는 꼭 선택의 문제인 척하는 게 문제다.
다시 말해 '여기에서 살까, 아니면 저기에서 살까?' 하는 식으로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택일할 수 있는 것인 양.
현실성 없는 바람에서 엿보이는 건 어쩌면 도피에의 의지뿐일지도 모르겠다.
이것도 일종의 보바리즘일까?
누구 말마따나 공간이 바뀐다는 것은 단지 공간이 바뀐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텐데.
중국의 사상가 린위탕(임어당)은 저서 <생활의 발견>에서 사람들의 '정신적인 조직 상태'를 다음과 같은 유사과학적 공식으로 나타낸 바 있다. 예컨대,
셰익스피어는 R4-D4-H3-S4,
시인 두보는 R3-D3-H2-S4.
[R은 Reality(현실감각), D는 Dream(이상주의), H는 Humor(유머감각), S는 Sensibility(감수성). 그리고
4는 아주 높음, 3은 높음, 2는 넉넉한 정도, 1은 낮음.]
해석하면 이렇다.
셰익스피어는 Reality현실감각이 4, Dream이상주의가 4, Humor유머감각이 3, Sensibility감수성이 4.
이 식으로 나의 정신적인 조직 상태를 나타내면 어떻게 될까?
개인적으로는 R3-D3-H3-S3 정도로 믿고 싶다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R0-D4-H2-S2 정도가 될까.
현실감각 : 전무함
이상주의 : 한가득
유머감각 : (아재개그 포함하면) 다소 웃김
감수성 : 젊을 때는 4였지만 지금은 쪼글어들어서 반타작
일출봉과 바다, 그리고 억새풀들을 생각하다가 상상으로 머리를 흔든다. 그리고,
영화 <건축학개론>이나 드라마 <웰컴 투 삼달리>로 대리 만족한다.
이상이라는 안경을 끼고 현실을 사는, R0-D4 상태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가 아닐까.
사족 :
검색해 보니 홍대 여신 요조는 현재 제주도를 떠나 서울 신촌에서 새로운 독립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 생각해 본다.
'제주도에 가서 살까?'
아니.
내가 지금 사는 곳도 꽤 괜찮아.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철학의 유일한 기능은 사업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손쉽고 유쾌하게 인생을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인생 50이 되면 은퇴할 수도 있는데 안 하고 있는 장사꾼은 내가 보기엔 철학자는 아니다. 이것은 그냥 일상적인 생각이 아니라 나의 근본적인 관점이다. 인간이 유쾌하고 명랑한 정신을 가질 때에만 세상은 보다 평화롭고 합리적으로 살만한 곳이 된다."
-린위탕, <생활의 발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