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텔게우스

-저 별은 나의 별

by 지얼
스크린샷 2025-10-29 오후 3.25.12.png <캡틴 하록> 극장판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볓빛이 물들은 밤 같이 까만 눈동자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아침 이슬 내릴 때까지


중딩 2학년 시절, 어느 봄날에 교내 합창 대회가 있었다. 위의 곡은 우리 반(2학년 7반)이 발표할 곡이었다.

대회 전에 교실에서 합창곡을 연습할 때는 담임이었던 미술 쌤이 합창 지도를 했는데, 작금에 생각해 보니 그녀는 음악에 대해서 무지했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우리들이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준비 됐지? 내가 하나, 둘, 셋, 넷 하면 시작하는 거야."


못갖춘마디(여린내기)의 음악을 '하나, 둘, 셋, 넷."하고 시작하는 것도 잘못되었지만(이 노래는 '셋'까지만 카운트를 해야 한다. 12비트 음악이므로 '하아나, 두우울, 세에엣, 저별은....' 이런 식으로) 조성을 지정하지 않고(첫 음을 제시해 주지도 않고) 아무런 반주도 없이 무조건 시작이라니, 그 결과가 어떨지는 예상되고도 남는다. 현대음악이다. 그것도 아주 난잡한 다조성 음악의 떼창.


어쨌거나 이 노래는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아니, 어쩌다가 도시의 조명이 없는 한적한 장소에서 밤하늘에 수놓아진 별들을 바라볼 때 조건반사적으로 이 노래가 떠올랐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언젠가 '나의 별'을 지정한 적이 있다(물론 아직까지 중도금은커녕 계약금도 주지 못했다).

오리온자리의 허리 부분에 나란히 배열된 별들 중에 한가운데의 것이다. '삼태성(민타카·알니탁·알닐람)' 중에서 '알니탁(Alnitak)'이 바로 내 것!



세월이 한참 지나서 내 별이 공유지임을 깨달았다.

아니면 내가 불법으로 점유했거나.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어떤 작가의 글에서, 작가가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이 별을 '찜'해 놓았다는 글을 보게 된 거다.

탐하는 것에도 공통분모가 있나 보다.


초겨울의 어느 날, 도서관에서 밤하늘을 쳐다보다가 문득 멜랑꼴리 한 기분에 빠져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삼태성 중 가운데 있는 별(알니탁)을 자주 바라보다 보면, 언젠가 멀리 있는 수지(가명)가 한 날 한 시에 이 별을 바라보게 되는 일도 생기지 않을까?

시점의 공유.

문득 어떤 경구가 떠오른다.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중에서


별을 바라본다.

별들은 나와 수지처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이렇게 외로운 겨울 밤에.

각성의 망치가 머리를 내려치고, 삼태성을 깨부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함께'에 밑줄을 치지 않겠니?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따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런 우연을 기대하는 것을 집착의 끄나풀이라고 한다.

고로 로맨틱한 멜랑꼴리는 마야(Maya)의 미몽ㅡ 백일몽 또는 망상일 뿐.


좋겠다 (지붕에서 떨어져라....)


그리스 신화에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인 오리온은 달과 사냥의 여신인 아르테미스와 연인 사이가 된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아르테미스의 오빠 아폴론.

그는 어느 날 오리온을 발견하고 동생인 아르테미스에게 내기를 청한다.

(이하 각색 주의.)

"내 동생아."

"네, 오라버니."

"저기 머얼리 뭔가 꼬물락거리는 거 보이지?"

"네. 근데 저게 뭐죠?"

"알 거 없고, 우리 저거 활로 누가 먼저 맞추나 내기 할까?"

"제가 이기면요?"

"네가 이기면? 음... 그때는 내가 네 결혼식 날에 축가 불러줄게. 그 대신 내가 이기면...."

"오라버니가 이기면요?"

"네 결혼식은 없던 일로 하자."

내가 누군가. 사냥의 여신 아닌가. 자신감이 뿜뿜 뿜었던 원샷 원킬의 아르테미스는 화살을 겨누고 결국

오리온의 머리에 헤드샷을 날린다.

자신이 오리온을 죽였음을 알게 된 아르테미스.

"오, 오, 오리온.... 아, 아, 아폴론, 이 ㅆㅂㅅㄲ..."

그녀의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 제우스는 오리온을 밤하늘의 별자리로 만들고

아폴론은 빤쓰런을 친다.


수지(가명)도 언젠가 언어의 화살로 헤드샷을 날렸지.

달랠 필요가 없었는지 제우스가 내 별자리는 만들어 주지 않더군.

그때 결심했지.

내 별자리, 아니 내 별은 내가 만들 거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렇게 특별한 것이 하필이면 공유지라니, 마음에 안 든다.

미몽에서 깨어난 나는 알니탁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다른 별을 찾기로 한다.

멀리 갈 것 없이 오리온자리에서 찾는다.

오리온의 (내 쪽에서 봤을 때) 왼쪽 어깨에 있는 별.

베텔게우스.


이 별은 이제 제 겁니다


태양보다 900배나 큰 베텔게우스


태양계로 옮겨 중앙(태양의 자리)에 두면 화성을 넘어 목성까지 닿는다는, 태양보다 900배나 큰 초-거성 베텔게우스.

나는 지구를 떠나 우주로 향하는 마지막 장면의 캡틴 하록처럼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코딱지만 한(?) 알니탁 따위는 너나 가져라

거대한 베텔게우스는 내가 갖겠다


참고) 알니탁 크기 : 태양의 20배


스크린샷 2025-10-29 오후 2.43.24.png 창백한 푸른 점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수수께끼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크기와 나이는 인간의 일반적인 이해력을 넘어섭니다. 광활함과 영원함 사이의 어딘가에서 우리의 고향, 작은 행성인 지구가 헤매고 있습니다.

(...)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우주를 잘 이해하는가에 크게 좌우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주 안을 떠다니는 우리는 이른 아침 하늘의 티끌과도 같습니다.

-칼 세이건



베텔게우스(이하 '베텔'로 약칭) : 네가 나를 갖는다고? 코딱지... 아니, 우주 먼지 만한 네가?

나 : 크기가 중요한가?

베텔 : 그럼 안 중요하냐? 이 모래 알갱이 만한 놈아.

나 : 윌리엄 블레이크가 말했어. 한 알의 모래 알갱이에서 우주를 본다고.

베텔 : 블레이크? 그거 미친놈 아니냐?

나 : 미친놈이 아니고 현자야.

베텔 : 너는 <코스모스>도 안 읽었냐?

나 : 안 읽었는데?

베텔 : '창백한 푸른 점' 몰라?

나 : 몰라.

베텔 : 지구로부터 60억 Km 떨어진 우주에서 보이저 1호가 찍은 지구의 사진을 모른다고?

나 : 모른다니까. 근데 뭐 어쩌라고?

베텔 : 칼 세이건 쌤이 그 사진을 보고 그랬잖아. 이 점을 봐라, 저곳이 지구다, 우리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나 : 그런데?

베텔 : 한마디로 너는만 한 모래알, 아니 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거지.

나 : 크기가 존재적 중요성에의 척도야?


스크린샷 2025-10-29 오후 3.33.26.png 하록 선장 극장판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의 한 장면


베텔 : 좋아. 그렇다면 수명으로 할까? 거북이만큼도 오래 못 사는 놈아.

나 : 그러는 너도 밥숟갈 놓을 날(초신성 폭발하는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하던데?

베텔 : 흠, 어디서 들은 건 있군. 하지만 너는 나의 죽음을 결코 목격할 수 없을 걸.

나 : 천체 망원경으로 보면 되지.

베텔 : 안 되지. 만약에 내가 지금 죽는다고 해 보자. 그래봤자 내 최후를 볼 수 있으려면 2665년에야 가능할걸?

나 : 네가 그렇게 멀리 있다고?

베텔 : 아니. 졸라 가까워. 고작 640광년 밖에 안 되거든.

나 : .....

베텔 : 근데 '고작' 640년 후에 너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나 : 어떻게 되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건 없건...' 뭐, 이 상태가 되겠지.

베텔 : 이제 주제 파악이 좀 되나?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너는 그냥 먼지야.

나 : 흥, 영원의 관점 아래에(sub specie aeternitatis)서 보면 너도 한순간이고 한 점일 뿐이야.

베텔 : 영원의 관점?

나 : 그래.

베텔 : 정말 하루살이가 거북이 장례식 걱정하는 소리 하고 자빠졌구나.


스크린샷 2025-10-29 오후 3.32.30.png


내가 아는 배관공 한 사람은 길가에 핀 꽃을 볼 때마다 차를 세우고 잠시 내려 꽃향기를 맡는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잠깐 섰다 가야 해. 내일은 저 꽃이 없을지도 모르거든."

-로먼 크르즈나릭, <인생은 짧다, 카르페 디엠> 중에서


Scorpions, <Lady starlight>


Walking through a winter night

Counting the stars

And passing time

I dream about the summer days

Love in the sun

And lonely bays


겨울 밤거리를 거닐며

별을 세고

그렇게 시간을 보냅니다

난 여름날을 꿈꾸어요

태양 아래의 사랑과 고적한 바닷가


I see the stars, they're miles and miles away

Like our love

On one of these lonely winter nights


별을 봅니다, 그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요

우리의 사랑처럼

이렇게 외로운 겨울 밤에


Dreaming through a winter night

Memories of you are passing by

It seems to me like yesterday

I think you knew I couldn't stay


겨울 밤에 꿈을 꾸면

당신에 대한 추억이 스쳐 지나갑니다

내겐 바로 어제처럼 느껴져요

내가 머물 수 없었다는 걸 당신도 알 거라고 생각해요


I see the stars, they're miles and miles away

Like our love

Lady starlight, help me to find my love

Lady starlight, help me tonight

Help me to find my love


별을 봅니다, 그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요

우리의 사랑처럼

별빛이여, 내 사랑을 찾게 도와주세요

별빛이여, 오늘밤 날 도와주세요


Walking through a winter night

Counting the stars

And passing time

Snow dances with the wind

I wish, I could be with you again


겨울밤 거리를 거닐며

별을 세며

그렇게 시간을 보냅니다

내리는 눈은 바람과 함께 춤을 추네요

다시 당신과 함께 있기를 소망합니다


Lady starlight, help me tonight

Help me to find my love


별빛이여, 오늘밤 날 도와주세요

내 사랑을 찾게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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