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짱이의 변
밥물은 대강 부어요
쌀 위에 국자가 잠길락말락
물을 붓고 버튼을 눌러요
전기밥솥의 눈금은 쳐다보지도 않아요!
밥물은 대충 부어요. 되든 질든
되는대로
대강, 대충 살아왔어요
대충 사는 것도 힘들었어요
전쟁만큼 힘들었어요
목숨을 걸고 뭘 하진 않았어요
(왜 그래야지요?)
서른다섯이 지나
제 계산이 맞은 적은 한 번도 없답니다!
-최영미, <밥을 지으며>
"아, 일하기 싫다."
J 군의 푸념에 내가 답한다.
"일하고 싶은 인간도 있냐?"
다시 생각해 보니 일하고 싶은 인간이 있을 것 같다. 취준생, 명퇴자, 빚쟁이, 워커 홀릭, 창작자 등.
그러나 80%의 인간은 일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말했다.
"어떻게 내 주변에는 나 같은 인간만 있냐."
'내 주변'의 인간들이란, 친구들을 말한다.
"유유상종이지, 뭐." H 군이 대답한다.
셋이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도중, J 군이 내게 말한다.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려면 주변 친구들을 보면 된대."
H 군이 주억거리며 J 군에게 말한다.
"네 주변을 봐. 나나 이 인간(나를 지칭함)이나, 게을러터져 가지고 돈 벌 생각이 별로 없잖아?"
"돈 벌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능력이 없는 거임." 내가 말했다.
"능력이 아니라 생각이 없는 거야. 남들이 주식이니 부동산이니 하며 쫓아다닐 때 넌 기타 치고 있었잖아?"
"근데?"
"돈 생각이 간절했다면 하루 종일 기타 치느라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겠지."
결국 사람은 간절한 것을 쫓아가기 마련이다.
H 군이 내게 말했다.
"야, 안 되겠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얘(J 군)를 우리 주변에서 쫓아내자."
"응?"
"얘라도 잘 살아야 될 것 아니냐?"
"그건 그렇지."
"주식이나 부동산, 아니면 사업에 유능한 사람한테 말야."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어?" 내가 물었다.
"........."
"........."
환경 탓을 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나 자신이 게으르다고 일축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공유되는 생각이 있다.
나는 왜 돈이 안 되는 일에만 열심일까
20대 후반의 어느 날에 석촌동 근처의 지하철 입구에서 한 걸인을 봤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도 저렇게 되는 게 아닐까?'
'저렇게'라는 말에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타인의 처지가 어떠하든 그의 삶을 평가하는 건 온당하지 않으니까.
다행히도 이 나이 되도록 그럭저럭 굶지는 않고 있다.
"형, 요즘 목표가 있어요?"
한 후배가 이렇게 물었다.
"목표? 있지." 내가 말했다. "'여생은 대충 살다가 때 되면 가자'는 거."
말하고 나니 어리석게 느껴져서 첨언했다.
"그런데 대충 살다 가는 게 제일 어렵더라고."
전쟁만큼 어렵다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여력이 많지 않기 때문일 거다.
목숨을 걸고 뭘 하진 않았어요
(왜 그래야지요?)
작금의 나이에서는 연주가로서의 내 한계도 알고(천재성의 부재와 더불어 뇌경색 환자였으므로) 열정이 예전 같지 않음도 잘 안다.
그래서 나 역시 이렇게 묻는 걸까?
왜 그래야지?
체념의 물음, 혹은
의도적 가치 박탈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실존적 게으름?
실존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에 정해진 의미 같은 건 없다
그러니 의미는 네 자신이 구축하라
인생이 공허하다는 한 젊은이의 말에 법륜스님은 이렇게 답하신다.
"딱 보니 머잖아 죽겠구만."
자살할 거라는 얘기다.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이나 나나, 둘 다 인생은 별 의미가 없고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당신은 그래서 죽겠다는 거고
나는 그래서 마음이 편하니 중으로 살고 있는 것.
<파이 이야기>의 작가 얀 마텔이 우리나라에서 강연을 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의 의미는 해석에 있다고.
문득 궁금해진다.
그리 멀지 않은 날의 노쇠한 베짱이는 죽고 싶어질까, 아니면
마음을 비우며 살아가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