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재다

-찬 바람이 불면

by 지얼


아주 오래전,

친구 영준(가명) 군이 여자 문제로 인해 술병을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구 씨처럼 쌓아놓았을 당시에 나는 염장이라도 지르듯이 옆에서 조용히 노래를 불러 주었다.


다시는 생각을 말자

생각을 말자고

그렇게 애타던

말 한마디 못하고


가왕 조용필 쌤의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이다.

(정말이지 당시의 나는 못돼 처먹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었던 또 다른 친구인 수혁(가명) 군이 질타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리 가

영감 냄새나…


<백만 송이 장미> 이외의 아재 냄새 풀풀 나는 내 애청곡은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과 <Q>, 그리고 <바람이 전하는 말>등이다.

이 노래들을 들으면 심금의 G현이 울린다.

노래도 노래이지만 정말 양인자 쌤의 가사는 '개쩐다.'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홀로 지샌 이 밤이여


또는,


아, 아~돌아서면 잊으리

아, 아~눈 감으면 잊으리


반어법의 교과서다.

<서울, 서울, 서울>의 가사도 심금을 울렸지.


이별이란 헤어짐이 아니었구나

추억 속에서 다시 만나는 그대


캬.... 이쯤 되면 술잔을 들지 아니할 수가 없다.

양인자 쌤의 노랫말 중 압권은 <바람이 전하는 말>이다.


너의 시선 머무는 곳에 꽃씨 하나 심어놓으리

그 꽃나무 자라나서 바람에 꽃잎 날리면

쓸쓸한 너의 저녁 아름다울까

그 꽃잎 지고 나면 낙엽의 연기

타버린 그 재 속에 숨어있는 불씨의 추억


뭐, 사실 이 노랫말은 마종기 시인의 시 <바람의 말>을 각색(?) 한 거라지만 그래도

진심 마음을 울린다...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곁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마종기, <바람의 말> 전문



표절해 본다.


나 오늘 그대 몰랐던

동네 주점 한 귀퉁이에

소주병 하나 둘 쌓아놓으려니

그 소주병 모여서 푼돈 되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알코올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서늘함이 감지되는 계절이면 삼겹살을 안주 삼아 월하독작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소주 한 잔(사실은 한 병)에 마음이 젖어들 즈음에 <바람의 말>이나 <바람이 전하는 말>을 감상하면서.

그러고 보니 한때 김지연 언니의 노래도 엄청 심금을 울렸었지.


찬 바람이 불면

내가 떠난 줄 아세요

스쳐가는 바람 뒤로

그리움만 남긴 채


박혜원의 <찬 바람이 불면> 리메이크


아무리 젊은 시절에 얼터너티브 롹과 인더스트리얼 롹, 그리고

EDM을 듣고 자랐다고는 하나 어쩔 수 없이

나는 아재다.



이런 말을 할 때 마다 친구 수혁(가명) 군은 내게 일침을 놓는다.


아재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아재가 아니라 영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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