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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흥 없는 크리스마스

ㅡ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by 지얼



누군가 내게 말한다. 기억력이 좋다고.

과연 그런가? 고등학생시절에 달달 외웠던 근의 공식이나 원의 방정식은 다 잊어버렸다. 명색이 화학 학사인데 웬만한 화학식도 다 잊혔다(H2O가 뭔지는 안다). 반면에 쓸데없는 기억의 잔존물들이 있다. 오래전에 헤어진 그녀들의 전번과 생일 따위들.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았음에도 어쩔 수 없이 기억이 나는 그것들은 마치 대뇌의 기억세포에 새겨진 화인 같다.

그러고 보면 수학이나 과학 분야만 제외하면 기억력이 좋은 편에 드는 것 같긴 하다.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아니 현재를 오히려 잡히지 않게 만드는, 하등 쓰잘머리 없는 기억력이기는 해도.

좋은 기억력으로 기억의 편린을 헤집어 본다. 포대기에 싸여 엄마의 등 뒤에 업혔던 시절, 누구 소유인지 모를 어느 집의 지붕에 연결된 반투명 플라스틱 재질의 처마 위로 떨어지던 빗소리를 아직도 기억한다. 뭐라 형용할 수 없었던,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듯한 아늑한 소리를.


또 다른 기억. 여섯 살 무렵이었던가… 집 바로 옆에 위치한 구멍가게에서 계란 두 개만 외상으로 얻어 오라는 엄마의 명령을 거역했다가(어린 나이에도 외상은 창피한 일이었다) 실오라기 하나도 걸쳐지지 않은 채 집 밖으로 쫓겨난 적도 있다. 이 일은 이렇게 증명된다. 하루는 어머니에게 당시의 일을 얘기해 주었더니 “네가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라고 되물은 적이 있다. 그때 생각했다. 피학의 기억만큼이나 가학의 기억도 오래가는가 보다,라고.


살면서 좋은 기억만 남는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어떤 기억은 비록 트라우마의 지경까지는 다다르지 않더라도 약간의 쓴맛을 남긴 채 장기기억의 세포 안에 보존되어 있다. 사소한 따돌림의 기억도 그렇다.


어떤 책을 읽다가, 작가가 자신의 흔한 이름에 대해 언급하는 장에서 문득 이 작가의 이름과 똑같은 한 동네 친구가 떠올랐다. 2;8 가르마에 금테 안경을 쓰고 공부도 나름 잘했던ㅡ전형적인 범생이 스타일의, 초등학생시절 친구. 그의 집은 우리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다.

하루는 그의 방에서 같이 놀고 있었는데, 방문이 빼꼼 열리더니 그의 누나가 뺑덕어멈 같이 생긴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명원(가명)아, 잠깐 나와 봐.” 그렇게 나간 그는 5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별다른 할 일도 없었던지라 집에 가기 위해 방문을 열고 나와 거실을 가로질러 가는 도중에 부엌 쪽에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보니 그 친구와 누나,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맛있게 김치전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이 마주쳤을 때, 뻘쭘함을 숨기기 위한 그들의 멋쩍은 웃음을 아직도 기억한다.


며칠 후, 신문을 통해 부산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접하게 되었다. 범인은 A 씨를 살해한 후 유기를 위해 분리된 사체를 여행가방에 넣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여행가방을 강이나 바다에 유기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지인인 B 씨 집의 건넌방에 놓여있는 피아노 뒤에ㅡ피아노와 벽면 사이에 두고 왔다는 사실이었다. 왜 그랬을까? 누명이라도 씌우려고 그랬던 걸까?

상상력이 풍부했던 탓인지, 당시의 나는 그 여행가방이 끼어있던 피아노와 벽면, 그리고 그 방을 상상했다. 그 끔찍한 상상 속에서 그 방은 바로 명원이의 방이었다.
뒤끝, 혹은 원한 감정에 싸인 11살짜리의 상상력(이것이 심리학자 K. G. 융이 말한 ‘그림자’라는 것일까?) 치고는 다소 역겹고 발칙한 것은 차치하고, 그때의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을 보면 기억력이 좋기는 한가 보다



스크린샷 2024-12-22 오전 3.50.12.png 때로는 차라리 망각이 행복이지...



물론 이런 망측한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처마 위나 마당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마냥 행복해했던 순간들이나, 반투명의 창문을 투과하는 햇빛을 받으며 마냥 평온했던 순간들, 그리고 크리스마스 시즌이 오면 교실에 장식된 온갖 반짝이들을 주시하면서 지복에 이른 순간들도 있다. ‘지복'이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어쩌면 네로가 파트라슈와 함께 승천하기 직전에 성당의 벽에 걸려있는 루벤스의 <승천하는 그리스도>를 봤을 때의 감동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햇빛을 좀 느껴 보세요. 자신의 감각에 대해 한 번 행복을 느껴 보란 말입니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도 느껴 보는 게 좋을 테지요. 그리고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에 몰두해 보세요. 그것이 자기 자신을 알게 되는 기본 전제입니다. 기초는 감각입니다. 살아있는 체험의 기본은 결코 오성이 아닙니다. 감각을 한 번 열어 보세요. 그리고 일어나는 것에 신뢰를 가져 보세요. 우선 감정적이 되어서 이런 체험을 해야 합니다. 햇살과 바람에 대해 마음을 여는 것이 자신을 스스로에게 더 가까이 가져다준다는 것을 느껴 보아야 합니다.”

ㅡ페터 라우스터, <사랑에 대하여> 중에서


작금의 나는 이 말을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각의 문이 정화된’ 11세의 나는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거리에서 흔하게 캐럴이 흘러나왔던 그 시절의 크리스마스 시즌은 저작권 때문에 거리에서 캐럴이 사라진 작금에 비하면 얼마나 포근했었던가. 한 가지의 큰 장점 때문에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듯이, 겨울은 크리스마스로 인해 좋아하는 계절이 되었었다. 중 1 국어교과서에 실린 <따뜻한 겨울>이라는 수필과 대하소설 <초원의 빛>중에서 <긴 겨울> 장을 얼마나 좋아했었던지.


별다른 일이 없었던 1995년의 크리스마스를 어떤 의미에서는 잊지 못한다. 한 선배님이 운영하는, 반포 소재의 한 기타 학원의 어스름한 조명 아래에서 바흐의 칸타타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를 들으며 홀로 보냈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피터 허포드의 파이프 오르간과 존 윌리암스의 기타처럼 이중주를 이루며 마음을 흔들었지만 그것은 차라리 달콤한 비애감이었다.


스크린샷 2024-12-22 오전 3.52.35.png 세상에서 가장 슬펐던 이야기



작금에는 겨울이 지긋지긋하다. 크리스마스는 단지 휴일의 하나일 뿐이고, 벅차오르는 기쁨이든 달콤한 비애감이든 그 어떤 감흥도 거의 다 사라졌다. 마치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에 나오는, ‘해골 잭’처럼 크리스마스를 싫어하지나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기라도 하듯이.

크리스마스에 눈을 기다리는 것도 이상하고(아기 예수가 태어난 곳은 사막 지대라 눈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크리스마스가 연인들 축제의 장이 되어버린 것도 이상하다. 괜한 호들갑 아닌가.

문득 서머싯 모옴의 말이 생각난다. 인간은 나이 먹고 현명해지면 에덴동산을 상실한다는.


이제는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외로움에 가중치가 부여되는 것도 아니고 독거의 달콤한 슬픔 따위도 없다. ‘달콤한 슬픔’이 없는 것이 아니라 슬픔 자체가 아예 없다. 물론 좋은 일이다. 홀로서기에 성공했는지의 여부를 알고 싶으면 ‘나 홀로 크리스마스’에 기분과 상태의 자가점검을 해보면 된다.

화가 들라크루와는 이렇게 말했다. “(모름지기 위대한 예술가란) 자신의 지력이 최고조로 달하는 나이가 되기까지 젊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뜨거운 감동의 여력을 일부 남겨놓은 사람”이라고. ‘일부’라는 말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 들라크루와는 나이 듦에 따르는 정서적 감응의 퇴화를 인정하는 것 같다.
이석원 작가는 <보통의 존재>에서 이렇게 썼다. “너무 일찍 사라져 버린 많은 것들 중에 특히나 아쉬운 것으로는 정서적 퇴화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좋아하던 비가 어째서 이제는 단지 맑은 기분을 어지럽히는 흙탕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을까. 아름답고 환상적이며 푸근했던 눈은 어찌하여 그저 교통을 방해하고 곧 있으면 세상을 지저분하게 만들 뿐인 번거로운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는가. 마음의 노화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꿈을 앗아가 현실밖에는 남지 않은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크리스마스를 수놓는 형형색색의 양초를 보면 문득 초등학생 6학년 시절이 생각난다. 친구였던 기석(가명)이와 나는 12월의 어느 날인가 컬러캔들을 제작하였다. 알코올램프로 하얀 양초와 크레파스를 따로 녹인 다음에 비커에 부어 넣는다. 이어서 다른 색상의 크레파스와 양초를 녹여 섞은 그것을 비커 안에서 응고된 양초 위에 부어 넣는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3단 색상의 양초를 여러 개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 32살 무렵에 가진 동창회에서 기석이가 말했다. “그때 우리 집이 좀 가난했잖아. 그때 내가 얼마나 돈을 벌고 싶었던지, 컬러캔들 만들어서 반 애들에게 팔아 수입을 좀 챙겼지.” 처음 듣는 이 얘기에 다소 놀랐다. 왜냐하면 나는 공동 창업자로서 그로부터 배당금을 받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에라, 이 치사한 자식…


그렇다고 그게 그렇게까지는 서운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돈 벌려고 시작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따라서 그 무시무시한 여행가방이 그의 사무실 캐비닛에 숨겨져 있는 불순한 상상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명문대를 졸업한 기석이는 여의도 소재의 한 건물에 게임을 개발하는 벤처기업을 차렸고 CEO가 되었다. 그 이후로는 연락이 끊겨 소식을 알 수 없지만, 이변이 없는 한 그는 부자가 되었으리라. 그리고 나는 '감동의 여력을 일부’ 남겨는 놓은 것 같은ㅡ머잖아 어쩔 수 없는 정서적 결락과 핍진을 부둥켜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무명의 고장 난 예인으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가끔 반추한다. 어스름한 조명 아래에서 의자에 반쯤은 누운 채로 바흐의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를 듣던 젊은 날의 내 모습을. 어쩌면 기억의 왜곡일지도 모르겠지만, 고적함마저 달콤한 비애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그 시절을. 어느 가을날, 학교 예술관 건물 입구의 포치 아래에서 친구와 바투 앉아 페르난도 소르의 <위안(L`encouragement op.34)>을 연습했을 때, 바람에 날려가 버린 악보들을 주섬주섬 주워 챙겼던 일을. 더 과거로 가서… 얼어붙은 손을 녹이느라 입김을 호호 불며 컬러캔들을 만들던 어린아이를.

아무런 실익도, 유용함도 보장받지 못했던 것에 대해 집중했던 그 순간들을.


https://youtu.be/ez8tO8bosio?si=KHS6H0L190I-TyD0

편곡/연주 : 나




… 나도 한때는 그렇게 자작나무를 휘어잡는 소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걱정이 많아지고, 인생이 정말 길 없는 숲 같아서
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얼얼하고 간지러울 때

그리고 작은 가지가 눈을 때려 한쪽 눈에서 눈물이 날 때면
더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진다.

이 세상을 잠시 떠났다가 다시 와서 새 출발을 하고 싶어 진다.

그렇다고 운명의 신이 고의로 오해하여
내 소망을 반만 들어주면서 나를

이 세상에 돌아오지 못하게 아주 데려가버리지는 않겠지.

세상은 사랑하기에 알맞은 곳.

이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
ㅡ로버트 프로스트 <자작나무>중에서



https://youtu.be/z21aS7Tdh3A?si=sgMJ0YreP-Etzr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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