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겸손에 대하여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ㅡ잠언 16장 18절
가끔 칭찬이라는 것을 들을 때가 있다. 아마도 누군가 나라는 고래를 춤추게 하고 싶어서 그러나 보다.
누군가 내게,
얼굴이 넘 잘 생겼어요
현빈 형님 되세요?
동양 버전의 알 파치노 같아요…
…라고 말할 리는 없고, 그저 “기타 연주가 너무 좋아요”같은 칭찬인데 뭐, 그럴 때는 감사한 마음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편이다. 다만 분에 넘치는 과도한 칭찬을 받을 때 몸 둘 바를 모르게 민망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만약 내게 일억 원의 빚을 진 그 누군가가 “당신은 일급 연주자”라거나, “대한민국 원탑” 같은 과도한 아부성 칭찬을 한다면, 그 진의를 충분히 의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이렇게 대답하였으리라.
우리나라에서 저보다 잘 치는 사람을 줄 세우면 일렬종대로 연병장 10바퀴는 더 돕니다
라거나,
그러게요 어제 뉴스를 보니 그러더군요
대한민국의 일류 연주자들이 깡그리 급사했다고
라거나,
일급 연주자 맞습니다
일반 시급(시간당 9천6백2십 원)을 받는....
…라고 말하는 식으로 애써 민망함을 회피한 후 결국 분노의 한마디를 던졌으리라.
돈 내놔
겸손하기 때문에? 아니다. 나는 내가 속한 세계의 깊이를 충분히 알고 있고, 상대적으로 나의 얕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나로서는 '사실 명시'인데 상대방은 겸손의 미덕쯤으로 여기면 한층 더 민망해진다.
하지만 동시에 지나친 겸손이 부덕이 되는 경우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지나친 겸손은 교만'이라는 말도 있는 것일 테다. 사실은 훌륭한 인성이 아니면서, 겸손한 척하여 '나는 이렇게나 겸손한, 훌륭한 사람입니다'라고 어필하려는 수작이랄까. 지나친 겸손도 나르시시스트의 전략일 수도 있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태도는 겸손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어필을 위해 겸손한 척을 하는 것도 아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단지 '사실 명시'일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자존감이 낮아지는 일은 없다(자존감이 낮아지는 순간은 여자에게 까이는 때뿐이다).
이번 생에 여기까지 밖에 못하면
다음 생에 더 잘하면 되지, 뭐
대충 이런 생각으로 살고 있다.
구독자 400만 명의 저명한 틱톡커이자 QWER의 기타리스트인 냥뇽녕냥(혹은 히나)의 본명은 장나영이다. 장원영을 닮았는지 주변으로부터 '혹시 장원영 언니 아니세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한다. 이름이 장나영이니 더욱 그럴 것 같기는 하다.
이에 대해 냥뇽녕냥은 이렇게 답변했다고 한다. “아니요, 어떻게 제가 감히….” 처세를 위한 겸손일까, 아니면 그만큼 장원영이 월등하다는 반증일까?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지나친 겸손은 자만' 운운하기 이전에 누구나 다 어쩔 수 없이 사회적 가면(페르소나)을 쓸 수밖에 없다. 겸손이란 어쩔 수 없이 절반은 위선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소설 <자기 앞의 생>의 한 구절처럼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가 없'으므로.
영화 <위플래쉬>에서, 주인공인 앤드류 네이먼의 방 벽에는 전설적인 재즈 드러머 버디 리치의 명언(?)이 적혀있는 종이가 한 장 붙어있다. 내용인즉,
재능이 없으면 롹밴드에서나 연주하게 되겠지
그러니까 명 재즈 드러머의 관점에서 롹 드럼은 다소 하찮게 보였던 모양이다. 하긴, 변화무쌍한 재즈의 드러밍을 생각하면 버디 리치 같은 연주가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 싶긴 하다만....
클래식 기타리스트 존 윌리암스가 70년대 중반 즈음에 아트롹 성향의 밴드 <스카이>를 결성하고 전기기타를 들었을 때, 클래식기타의 거장 안드레스 세고비아는 이렇게 씹었다. "내가 스테이지 위에 올려놓은 기타를 다시 끄집어 내렸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단다. "일렉트릭 기타? 화음도 제대로 처리 못하는 그것을 어찌 기타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이오? 그것은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마땅합니다."
이 얘기를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그래, 니 똥 굵다’하며 일축하였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다.
거장이란,
거만한 장인
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만약 내가 음악계의 거장이 되어 거만한 말을 남발한다면 어떻게 될까?
예컨대, 한 인터뷰어로부터 다음의 질문을 받게 되는 상황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뉴진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면 이렇게 대답하는 거다.
ㅡ엄청 신기하죠. 인형이 노래를 하고 춤까지 추다니
클림트의 그림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나요?라고 물을 때는,
ㅡ뭐… 발로 그린 것치고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거다.
그 외에,
기타리스트 마르코 타마요나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ㅡ그들은 연주를 스포츠로 승화시킨, 진정한 스포츠맨들입니다.
제작가 그렉 스몰맨이 제작한 기타에 대해서는?
ㅡ훌륭하죠. 조난시에 뗄깜으로 탁월합니다.
드러머 존 본햄의 연주에 대해서는?
ㅡ경의를 표합니다. 한 팔로도 충분히 칠 수 있는 것을 구태여 양팔 모두 사용하는 성실함에.
지드래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ㅡ글쎄요, 제가 아직 그 영화를 못 봤습니다만…
배우 박은빈의 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ㅡ뭐… 일단 대본을 외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 아니겠습니까?
미슐랭 3 스타인 안성재 셰프의 요리를 먹어 보셨나요?
ㅡ아, 물론이죠. 하지만 지금은 우리 집 뽀삐의 간식으로 애용하고 있습니다.
영부인의 외모에 대해 한 말씀만 해주시죠.
ㅡ현대 의학에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과거의 저를 반성합니다.
공식석상은 물론 평상시에도 겸손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졸라 거만하게 처세를 하면 어떻게 될까? 만약에 어떤 처자가 내게 “쌤…쌤 앞에서 현빈은 한 마리 오징어에 불과해요”라거나, “쌤은 양조위의 한국판 상위 버전이에요”라고 말할 때, "고마해라, 마이 무거따 아이가...맞는 얘기도 마, 한두 번이지 매번 그라믄 지치뿐다..."라고 대답한다면?
사회적 생매장이지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나도 거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 “기타를 정말 잘 치시는데… 하루에 기타는 몇 시간이나 연습하시나요?”라고 물을 때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으면.
연습이요?
그딴 거 안 하는데요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ㅡ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중에서
새삼 연습 같은 건 안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