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급하면 체한다
예전에 화가 밥 로스 쌤이 진행하는 <그림을 배웁시다>라는 프로그램이 EBS를 통해 방영된 적이 있다. 밥 로스 쌤은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화를 30분 만에 완성한다. 혹자는 이발소 그림이네 뭐네 하며 폄훼하기도 하였지만, 내게는 마법으로 보였더랬다.
밥 로스 쌤은 레슨 중 이런 멘트를 잘 던지곤 했다.
여러분도 한번 해보세요
참 쉬워요
또는,
어때요 참 쉽죠?
이것은 마치 젊었던 시절, 배우 임시완을 매우 닮은 친구 원석(가명)이가, 무수한 처자들의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그의 수첩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고 있던 내게 무심코 던진 얘기처럼 공허했다.
여자 꼬시는 거, 별 거 아냐
그렇지. 네게는 별 거 아니었겠지만 내게는 나와 하등 관련 없는 별건이었지.
나도 때로는 밥 로스 쌤이나 원석이처럼 저런 멘트를 던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만일 기타 레슨을 하는 유튜버였으면 밥 로스 쌤을 흉내... 아니, 보다 레벨 업을 해서,
<샤콘느>의 빠른 스케일(음계) 연주, 여러분도 해보세요
손가락이 달려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라든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 나오는 트레몰로, 참 쉽죠?
조금만 노력하면 발가락으로도 할 수 있어요
하는 따위의, 시범 없이 주둥이만 터는 노이즈 마케팅으로 구독자 50만 명을 채웠을 텐데.
내가 아는 한 기타쌤께서 해주신 얘기다. 스페인 유학 시절의 얘기인데, 그 음악원의 기타쌤은 스케일(음계)을 무진장 빨리 치셨단다. 그런데 그 쌤께서 말씀하시기를,
자, 이렇게 그냥 빨리 치면 돼 후루루루루루루루룩~
자, 봐 이렇게.... 이게 안 돼? 우다다다다다다다다다닥~~
인간은 원래 자기중심적이라 자기에게 별로 어렵지 않은 테크닉을 남이 행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납득이 안 가기 마련이다. 마눌이나 여친에게 운전연수를 시켜보면 안다.
잘난 척을 좀 하자면, 나는 유치원에도 안 갔으면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이미 한글을 다 깨쳤다(5세 때 읽은 동화책 제목은 아직도 기억에 있다. '굵은 다리의 베르트 공주'). 그랬던 내가 입학을 하고 보니 2학년이 되도록 국어책을 못 읽는 아이들이 종종 있는 거다. 그때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어휴, 저 븅딱.....
하지만 신께서는 이런 나의 교만함을 방지하려고 그러셨는지, 수학이나 산수에는 평균 이하의 능력을 주셨으니.....아직도 기억한다. 고딩 2학년 시절의 그 참담했던 수학 시험 점수를.
10점이라니!
모든 문제가 주관식이었다면 아마도 0점을 받았겠지..
국어에서의 자만심은 그렇게 상쇄되고 말았다.
어쨌거나 오해가 있을 것 같아 하는 말이지만, 아마도 밥 로스 쌤의 '참 쉽죠?'는 나의 '어휴, 저 븅딱'과는 전혀 다른 마음에서 나온 말이었을 거다. 그의 '참 쉽죠?'는 일종의 격려였을 테니까.
드럼 연습을 하는 중에, 오른손으로 16비트 하이햇을 무진장 빨리 치는 테크닉에서 좌절한 나는 며칠 동안 관련 테크닉 동영상을 다 훑었다. 그 결과 거개의 것들이 오른손의 동작(다운&업 스트로크)을 소개하는 데 그치고 말뿐, 정작 특별한 노하우를 전수해주지는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건 내가 보기에 그저 '자, 이렇게 그냥 빨리 치면 돼 후루루루루룩~'에 불과하다. 빨리 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기보다는 '난 이렇게 빨리 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그치고 만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같은 업종의 쌤으로서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나 역시 클래식기타의 빠른 아르페지오를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 당연히 그것에 관련된 기술을 설명은 하겠지. 그래도 초심자 입장에서는,
그래 방법은 알겠어 근데
속도는 어떻게 올리는 거냐고
하며 물을 게 빤하다.
이 학생이나 드럼 초보의 나나, 예컨대 장미란 선수에게 "용상 자세로 186kg짜리 역기는 어떻게 드는 거임?"하고 물은 꼴이나 다름없다. 장미란 선수가 자세와 기술에 대해 알려준다고 한들 우리가 그걸 들어 올릴 수가 있을까?
예전에 기타의 거장 안드레스 세고비아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아들들과 같아. 너무 빨리 속도를 내려고 한다."
step by step.
one step closer.
이 진리를 종종 망각하곤 한다.
글타.
소싯적에 썸녀와의 관계를 망쳤던 것도 모두 다 이 빌어먹을 성급함 때문이 아니었던가.
오늘의 교훈 :
고백하기도 전에 호텔방 예약하지 말지어다
밑줄 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