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
7년여 전, 대학 동아리 동기들과 학원 인근의 고깃집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다.
파장에 이르렸을 무렵 알코올에 지배된 탈(脱) 경제적인 정신은 '고작 13만 원쯤이야...'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술값과 고깃값을 치렀다. 그리고 합리화.
"멀리서 벗이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즐거우니까 내가 산다.
하지만 뼛속 진심은 이럴 것이다. "1인당 3만 원씩 각출!" 아, 하지만 이렇게 말하자니 왠지 '가오(오픈사전 정의 : 남자의 자존심)'가 안 선다.
자리에 돌아오고 나서 얼마 후, 내가 지불했다는 걸 알아차린 여자 동기가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게 5만 원을 건네며 말했다.
"너, 다음부터 가오 잡지 마."
그 순간 영화 <베테랑>의 황정민처럼 말하고 싶어졌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거지 똥꼬에서 콩나물을 뽑아 먹을 생각이 전혀 없는ㅡ내 통장 잔고의 바닥을 걱정해 주는ㅡ마음 씀씀이가 갸륵하다. 진심으로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2차는 나머지 친구들이 계산했다.)
돈은 없어도 가오가 있는 유명 인물들 가운데서는 단연 프레더릭 쇼팽이 으뜸일 것이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발췌한다.
"... 그의 학생들은 모두가 최상류 층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는 수업료 명목으로는 한 푼의 돈도 받지 않았다. 대신에 학생들이, 쇼팽이 창 밖을 내다보거나 손톱을 다듬고 있는 동안에 그의 눈에 띄지 않게 이십 또는 삼십 프랑 정도의 돈을 벽난로 선반 같은 곳에 올려놓고 나오곤 하였다. 그는 자존심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자신이 궁색하다는 내색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음악학원에서 '레슨비 봉투'가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이다. 재수강할 때가 된 원생들에게 "레슨비 내라!"라고 말하는 대신 레슨비 봉투를 슬쩍 건네기만 하면 되니까(어쩌면 쇼팽은 레슨비 봉투조차 가오가 안 서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슨비를 지불하지 않는 원생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쇼팽처럼 가오 잡고 창 밖을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있어야 할까. 이럴 때 아마도 원생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아, 선생님께서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수지 생각)을 하고 계시는구나...'
어떻게 하면 가오 안 상하고 제때 레슨비를 받아낼까 고심하는 중이거든?
여자 동기가 5만 원을 내게 건네는 순간, 입과 마음이 따로 논다. 가오 잡는 입은 "됐어, 얼마나 한다고... 그냥 다음에 네가 사면 되잖아"라고 말하지만, 마음은 역시 가오보다 경제적 현실을 선택한다. 자의식 과잉에 의해 분열되어 유체이탈한 하나의 '나'가 호주머니에 슬쩍 5만 원을 집어넣는 또 하나의 '나'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린다.
존나 가오 안 서는 새끼...
노후를 걱정한다는 것은 어쩌면 '기버-기브 앤 테이커-테이커'라는 인간 존재의 세 영역에서 먼 훗날 나 자신이 철면피의 '테이커(받기만 하는 놈)'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순발(가명)아!"
"왜?" 그가 대답한다.
"짜장면 먹으러 가자."
우리 동네 중국집 'XX상회'의 요리사는 가히 장인의 경지다.
"안 돼." 그가 대답한다. "오늘부터 살 빼야 해. 안 그러면 당뇨 온다고 의사 쌤이 경고했거든."
나는 이준구, 아니 악마의 탈을 쓰고 무책임하게 제안한다.
"갈 때 가더라도 짜장면 한 그릇 정도는 괜찮잖아?"
결국 계산은 그가 했다.
식당을 나선 후에 일주일 내내 외식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말한다.
"비만도 걱정이지만.... 우리 이렇게 만날 사 먹고 다녀도 되는 걸까?"
한마디로 돈 좀 아끼자는 얘기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위장에 간짜장 곱빼기와 탕수육이 빵빵하게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가 다르다고나 할까.
"돈이 문제가 아니라 비만이 문제야." 그가 말한다.
"그것도 그렇지만 연금이 없는 우리 같은 사람은 (아껴 쓰지 않으면) 노후에 뭐 먹고사냐?" 배가 부르니 근심이 비약된다. 천하태평 순발 군이 말한다.
"그때는 종이박스 주우면서 살면 되지."
이어서 말한다.
"그런데 지금 뭐 하러 그때 일을 걱정해?"
종종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살아 있을 때는 아직 죽음이 찾아오지 않았고 죽을 때는 내가 죽었다는 인식조차 없을 테니 죽음은 두렵지 않다고 말한 에피쿠로스의 말에 덧붙여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비틀스가 한참 활동하던 시기에 나는 이 세상에 있지도 않았잖아?
태어나기 전의 무(無) 존재를 걱정하지 않는다면 대체 왜 죽은 후의 무를 근심하는가? 뭐, 이런 얘기다. 그러고 보니 2000년 전에 로마의 한 현자가 이미 이런 얘기를 했다.
그들의 도움이 아니더라도, 근심은 대개 죽음이 아니라 생 자체에 스며들어 있다.
종이박스를 주우며 살자고?
그거 하루 종일 해봤자 담배값도 안 될 텐데?
고양이 사료값은 어떡하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뭐 하러 걱정하냐'라고 생각하며 반려묘인 '몽냥이(스코티시폴드 종)'를 쓰다듬는데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퍽치기처럼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몽냥이는 이제 겨우 두 살이다.
집사를 둔 고양이의 평균수명은 약 15년이고, 재수 없게(?) 장수라도 하게 되면 20년을 훌쩍 넘길 수도 있다고 한다(기네스 북에 오른 최장수 고양이는 무려 38년이나 살았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은데?
내가 죽으면 얘는 어떡하지?
과도한 술과 담배로 인해 내 여생이 고양이 수명보다 짧을 것 같은데?
내 생각이 짧았다. 역시 죽음도 생만큼 커다란 문젯거리다.
밥값 계산으로 인한 가오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고양이는 법정스님의 난초보다 존재론적으로 훨씬 무겁다. 법정스님이 인신을 속박하는 난초를 남에게 줘 버린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재분양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불특정 다수 중 하나일 그 누군가에게 어떻게 믿고 맡긴단 말인가. 난초 애호가에겐 죄송한 말이지만, 포유류인 고양이는 난초 같은 풀떼기가 아닌데.
어느 날, 내가 급사라도 하게 되면 몽냥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
굶어 죽는 건 아닐까?
"형, 괜찮아." 내게 몽냥이를 넘긴 한 수의사 후배가 말했다.
"뭐가 괜찮아? 내가 죽으면 쟤도 죽는데." 내가 말했다.
"안 죽을 걸?"
"왜? 집안에 갇혀 굶어 죽을 텐데?"
"형이 있잖아."
"나는 이미 죽어있다니까."
그가 말귀를 못 알아먹은 건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죽은 형이 몽냥이의 밥이 되어 줄 거야."
문득 자신이 죽으면 화장 후에 남은 재를 변기에 쏟아 흘려보내라는, 순발 군의 부인 님 말씀이 떠올랐다. 부인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거(재)는 나 아냐. 그냥 쓰레기일 뿐이야."
재고해 보니 수의사 후배의 말이 옳다. 사후에 몽냥이의 밥이라도 될 수 있다면 차라리 다행으로 여겨야 하리라.
그거(시체)는 내가 아니다. 그저 육회 사료일 뿐이다.
말도 안 되는 호러블한 얘기라면, 몽냥이를 위해 내가 무덤으로 또다시 기어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
결혼이라는 무덤으로.
그리하여 죽는 날,
여보....
몽냥이를 부탁해...
(꼴까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