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대지

-중구난방 서평

by 지얼



한때는 남녀 간의 애정에 관한 내용으로 국한해 버린,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생텍쥐페리의 경구는 다음과 같다.


사랑한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경구를 선별하는 데에도 기레기 식의 낚시질이 통용되는 것 같다. 언젠가 본 인터넷 뉴스의 썸네일은 다음과 같다.


배우 손예진, 백두산 정상에 올라 "가슴이...."


백두산 강풍에 브래지어 블라우스가 벗겨져 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궁금하여 기사를 열어 본 순간 낚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백두산 정상에 오르니 가슴이 벅찼다'는 내용이었던 것. 현타가 왔다.

한심한 놈.....

생택쥐페리의 자전적 소설 <인간의 대지>에 있는 위 경구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외부의 공동의 목표 안에서 형제들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숨을 쉰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배웠다. 사랑한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임을. 같은 대열 안에서 하나로 묶이고 동일한 고지를 향할 때 동료가 되는 것이다.


생텍쥐페리의 거시적(?) 형제애, 다시 말해 공동체 의식과 목표에 관한 이 글을 남녀상열지사로 축소해 버리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고딩 시절,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님'의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국어 시험 문제에 대한 답이 '조국'이라는 것에 얼마나 분개했던가. 사랑스럽고 그리운, 구체적 '그대'를 '조국'이라는 추상명사로 강제 전락시켜 버리는 것에 대한 분개. 다소 과장하여 말하자면 포스트모던한 이 시대에 아직도 거대 담론 따위의, 개인의 소박한 추억에 대한 침식을 허용한단 말인가, 하는 우려 같지도 않은 우려.

시가 쓰인 시대적 정황의 고려 따위는 엿이나 먹으라는 듯이.


소박한, 아니 쪼잔한 나는 여전히 그 '님'을, 조국 따위(?)가 아니라 만해 선생의 연인으로 축소한다.

하지만 생텍쥐페리의 저 경구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생텍쥐페리의 저서들

위의 말 이후에 그는 이렇게 썼다.


같은 행성에 태어나 한 배를 탄 팀인 우리는 굳게 결속되어 있다. (...) 우리가 해방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목표를 알려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우리 모두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그 지점에서 목표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몇 페이지를 더 넘기면 생텍쥐페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깜깜한 암흑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 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이기적 무관심을 지혜로 여긴다. 하지만 이들의 지혜는 허망하다! 동료들, 나의 동료들이여, 나는 당신을 이 질문의 증인으로 삼는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꼈던 것은 언제인가?


다른 사람을 향해 다리를 놓으라는 것은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말한 대로 (서로를) 길들이라는 얘기처럼 들린다. 어쨌거나 이 질문과 맞닥뜨리는 순간, 현재의 처지가 새삼 각성되었다. 우리가 가장 행복했다고 느꼈던 순간과 작금의 현실이 너무나 대비되어서다.

저자는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꼈던 것은 언제인가?" '나의 행복'이 아니라, 그는 '우리'라는 공동체의 행복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나름의 공동체라 불릴 만한, 다시 말해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료들이 있었지만 작금에는 독야청청과는 거리가 먼, 영락없는 독거노인의 삶이 아닌가. 어쩌면 우리들 대개는 화폐와 노동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고립되어 가는 듯하다.

위의 질문에 앞서 생텍쥐페리는 당시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우리는 해방되기를 원한다. 곡괭이 질을 하는 사람은 그 노동이 갖는 의미를 알고 싶어 한다. 도형수가 하는 곡괭이질은 그를 수치스럽게 만들기에, 광맥을 찾는 자의 곡괭이질과 결코 같지 않다. 광맥을 찾기 위한 곡괭이질은 그를 성장시킨다. (...) 아무 의미도 없이 곡괭이질을 하는 곳이 도형장이다. 곡괭이질을 하는 사람을 인간 공동체와 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말했다. 삶의 이유가 있는 사람은 거의 모든 삶의 양상들을 견딜 수 있다고. 삶의 이유는 삶의 의미와도 같다.

위 문장의 곡괭이질 언급을 보니 문득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노랫말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간다.

<Breathe>의 가사 일부는 다음과 같다.


Run, Rabbit run.

Dig that hole, Forget the sun.

And when at last the work is done,

Don't sit down, It's time to dig anothe one.


달려라 토끼야, 달려.

구멍을 파. 태양은 잊어버려.

그리고 마침내 작업이 끝나더라도

앉지 마, 또 다른 구멍을 팔 시간이야.


이것은 목적과 의미를 상실한 노동에의 개탄이지 직업적 성실함에 대한 독려가 아님은 자명하다.




아마도 위 가사의 첫 행은 존 업다이크의 소설 제목 <달려라, 토끼>에서 인용한 것일 테다(이하 스포일러 주의). 이 소설에서 주인공 해리 앵스트롬은 왕년에 '잘 나가던' 농구 선수였으나 지금은 주방 용품 세일즈맨으로, 어린 아들과 알코올 중독인 아내를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빈한한 소시민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의 심부름을 하던 중 무슨 생각인지 그대로 차를 몰아 정처 없이 빤스런을 친다. 하지만 현실적 중압감을 회피하기 위한 가출은 이튿날 막을 내리고 가정으로 복귀한다. 난장판 그 자체인 홈 스윗 홈으로.

고딩 시절의 농구 감독을 만나 여자를 꼬시러 시내에 간 해리는 루스라는 여자를 만나 외도를 하게 되고, 그 결과 루스는 해리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그즈음에 그는 아내 재니스의 해산 소식을 병원으로부터 듣게 되고, 마음을 다잡는다. 하지만 외도를 눈치챈 아내의 조롱과 비난을 못 이긴 해리는 또다시 가출을 감행하고, 그 사이에 아내는 술에 취한 채로 신생아를 목욕시키는 도중 그만 아이를 익사시켜 버리고 만다.

도주한 해리는 루스를 만나지만 그녀에게도 버림받게 되고, 또다시 정처 없는 곳을 향해 달리며 소설을 끝을 맺는다.


'토끼'에는 아마도 이중적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고딩 시절, 해리는 움직임이 빠른 농구 선수로서 '토끼'라는 별명을 얻었었다. 작금에는 끊임없이 현실을 도피하는, 겁 많은 토끼로 전락한다.


"어딘가에 가 닿기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달리는 것뿐이었다."


도착지, 혹은 탈출구는 없다. 남은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자신의 몸에 부착된 낚싯대의 끄트머리에 매달린 당근처럼, 아무리 내달려도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눈앞의 그것을 쫓아가든지, 아니면 '태양은 잊어버린 채 열심히 구멍을(도형수처럼 곡괭이질을 하며) 파든지.


"... 래빗은 그냥 텅 빈 느낌이야.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그냥.... 행동할 뿐이야."


이유와 의미 따위는 묻지 말고,

달려라, 토끼야.



해리 앵스트롬을 비난하며 그저 '남 얘기'일 뿐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까? 아마도 해리보다는 다소 도덕적일지라도, 우리들 마음 기저에는 회피와 도주에의 바람이 침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중년 남성들에게 인기 있는 TV 프로그램 중의 하나가 <나는 자연인이다>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오해는 말자. 나는 자연인 생활이 모두 회피와 도주의 수단이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니까.


위에서 언급한 핑크 플로이드의 명반 <The Dark side of the moon>에서, 곡들이 <Breathe>, <on the run>, <time>의 순으로 배열된 것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어 보인다. '달려라 토끼'를 외치는 <Breath>에 이어서 <On the run(도주 중)>이 나오고, 시간을 무의미하게 허비하는 것을 질타하는 내용의 <Time>이 배치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일 테다.


가히 아포리즘의 향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간의 대지>에서 생텍쥐페리는 "곡괭이 질을 하는 사람은 그 노동이 갖는 의미를 알고 싶어 한다."라고 썼다. 그리고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든 견딜 수 있다고 했다. 기실 해리 앵스트롬은 삶의 의미와 이유를 상실한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대체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생텍쥐페리의 말을 더 들어본다.


우리는 자신의 역할을 자각할 때, 아무리 하찮은 역할이라도 깨달을 때 비로소 행복해진다. 평화롭게 살다가 평화롭게 죽음을 맞을 것이다. 삶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 죽음에도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역할에 대한 자각, 즉 소명 의식의 부재와 도구적 가치만 중시되는 소시민적 삶의 공허한 상태를 그는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교외로 가는 열차에 빼곡히 몸을 실은 무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인간이라 믿겠지만,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어떤 압박을 받아 마치 개미처럼 쓸모로만 평가된다. 자유로운 시간에 그들은 무얼 하며 그 부조리하고 평범한 일요일을 보내는가?


유럽에는 2억 명의 사람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살아가며, 그저 다시 태어나기만 바라고 있다. 산업의 변화로 농업 종사자들은 언어를 빼앗기고, 검은 객차들이 들어찬 조차장 같은 거대한 게토에 갇혀 살게 되었다.(...) 또 어떤 이들은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업무로 인해 개척자의 기쁨, 종교적 기쁨, 학자의 기쁨을 금지당했다. 사람이 성장하는 데엔 옷을 입히고 음식을 먹이는 등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기만 하면 된다고 믿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들 내면에 서서히 쿠르틀린의 작품 속 소시민이, 마을의 정치인이, 내면생활이 거세된 기술자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역설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창작을 하라며 빵을 주면 그걸 받은 이는 잠을 잔다. 승리를 거둔 정복자는 기세가 누그러지고, 너그러운 사람도 부를 얻으면 수전노가 된다.



Pink Floyd,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 뮤비.


이렇게 주체적 자아를 방기하고 타인(대중)의 욕망을 비판 없이 추종하는, 니체의 표현대로 '시장의 파리떼' 같은 인간 군상을 두고 에리히 프롬은 '자동인형'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핑크 플로이드의 음반 <The wall>에 맞춰 제작된 알란 파커 감독의 영화에서 학생들이 학교라는 이름의 거대한 제면기(라기보다는 소시지 가공 기계) 속에 떨어져 소시지로 가공되어 나오는 장면이 암시하는 것처럼, 자동인형화 되어 가는 인간을 바라보며 생텍쥐페리는 "그들은 대체 어떤 끔찍한 거푸집을 통과했기에 이런 자국이 남았을까?"라고 묻는다.


정원에서 돌연변이로 장미꽃 장미 한 송이만 피어도 정원사들은 감동한다. 그들은 그 장미를 따로 옮겨 심고는, 좋은 환경을 제공하며 잘 키워낸다. 하지만 인간은 그 정원사가 될 수 없다. 어린 모차르트는 다른 아이들처럼 거푸집에 찍혀 나올 것이다. 모차르트는 악취가 나는 술집에서 연주를 하며 썩어빠진 음악의 고양된 기쁨을 누릴 것이다. 모차르트는 죽을 날을 받은 사형수다. (...)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움푹 팬 구멍이나 추함 같은 것이 아니다. 바로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깃든, 죽어가는 모차르트다.


알란 파커 감독의 <더 월> 한 장면


흔히 '작업(?)의 기술'로 오해되는 <사랑의 기술>에서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썼다.


(...) 인생의 으뜸 조건으로서의 안전과 안정을 고집하는 사람은 누구도 신앙을 가질 수 없다. 격리와 소유를 자기 안전의 수단으로 삼는 방어 체제 속에 자신을 가두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죄수로 만드는 것이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데에는 용기가, 즉 어떤 가치룰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판단하고 ㅡ이러한 가치에 뛰어들며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달려라, 토끼>에서, 해리 앵스트롬이 지역의 목사와 종교적 담론을 나누는 것도 기실 본 회퍼 목사가 언급한 '값싼 복음'을 구하려는 안일한 태도에 다름 아닐 테다. '십자가 짐 같은 고생' 또는 '좁은 문'을 감당할 각오는 없고 그저 가볍고 안전한 넓은 문을 향한 안일한 추구만이 있을 뿐이다. "외로운 사람에게 사라짐이란 얼마나 위대한 유혹인가"라는 시 구절도 있다지만, 고립에 가까운 해리의 사라짐(도피)은 용기 결핍의 귀결인지라 위대할 이유도 없다(그리고 해리의 이야기는 다름 아닌 내 얘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고립된 죄수의 곡괭이질은 인간 공동체와 이어주지 않는다.

고립은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란 말은 마치 '국가'와도 같은 추상명사처럼 어스름하게만 느껴진다. 빅터 프랭클은 삶의 추상적인 의미를 찾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보다 구체적인 소명이나 사명에 대해 언급한다.

종교의 권위가 끝나버린 현시대에 삶의 의미는 개인이 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지만, 막연하기 그지없는 얘기다. 만약에 내게 자식이 있는데, 그가 "나는 그 어떤 목표조차 없이 그저 평생 방에 처박혀서 게임만 하는 게 삶의 의미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다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게임 행위 자체에 목표 지향적인 무언가가 있다면 또 모를까.


혹자(예컨대 법륜스님이나 고전 인문학자 고미숙 같은 분들)는 '삶의 의미는 그저 삶 그 자체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이와 비슷하게 어떤 철학자는 "삶의 의미는 죽어 있지 않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때로는 빅터 프랭클이나 앙투안 생택쥐페리가 경험한 것처럼, 극심한 고난이 삶의 의미를 인각 하게 하는 것 같다. 빅터 프랭클은 홀로코스트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생텍쥐페리는 비행기 불시착으로 인한 사막에서의 조난 경험을 통해 각자의 의미를 찾았으리라.

생텍쥐페리의 각성을 정리하자면 대충 이럴 것이다.


-도구적 가치만이 통용되는, 안주하는 현실에 대한 회의. "우리는 그러한 도형장에서 탈주하기를 원한다."

-풍요와 만족이 행복을 온전히 보장한다는 믿음에 대한 회의. "창작을 하라고 빵을 주면 그걸 받은 이는 잠을 잔다."

-개성화와 정신의 자유에 대한 긍정. "오직 '정신'만이 진흙에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한다."

-공동체 의식에 의거한 목표와 개인의 소명이 조화를 이루는 삶에 대한 동경. "깜깜한 암흑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 다리를 놓아야 한다."


다시 생텍쥐페리의 질문을 듣는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꼈던 것은 언제인가?"

독거노인이나 다름없는 내가 대답한다.

"지금은 아니고,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대딩시절의 우리들이...."


공존의 여지를 남겨놓은 창조적/선택적 고독은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고립은 나쁘다.

고립은 공동체와의 완전한 절연을 의미한다.




생텍쥐페리의 친구인 앙리 기요메는 언젠가 비행기 불시착으로 인해 4,500미터 높이의 안데스 산맥 어딘가에서 조난을 당한다. 그는 피켈과 로프, 그리고 식량도 없이 영하 40도의 추위를 견디며 며칠을 꼬박 걸어가고, 결국 구조된다.

차라리 잠들어 버리는 것이 평안이었을 그 고통 속에서 그가 생의 의지를 다잡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눈 속에서 사람은 대화하려는 본능을 모조리 잃어버린다네. 이틀, 사흘, 나흘을 걸으면 머릿속에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아. 간절히 자고 싶었지. 하지만 속으로 생각했네. '아내는 내가 살아 있다고, 지금 내가 걷고 있다고 믿고 있겠지. 동료들도 내가 걸음을 멈추지 않을 거라 믿겠지. 그들은 전부 나를 믿고 있다. 그러니 발걸음을 멈춘다면 나는 머저리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강력한 이유는 자신의 사후, 아내의 생계에 대한 걱정이었다. 실종 사건이 법적인 사망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4년을 기다려야 했으므로 그는 아내를 위해서라도 죽을 수 없었던 것.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하여 조난을 당하게 되었을 때, 주인공(생텍쥐페리)은 친구와 함께 나눠 먹었던 오렌지 반쪽을 먹으며 이렇게 말한다.

"... 내 손에 쥔 이 오렌지 반쪽이 생애 가장 큰 기쁨을 주는구나..."

그리고는 그제야 사형수에게 담배와 럼주 한 잔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게 된다.


위에서, 나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 물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그것이 거시적 관점의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의미는 거창한 것에만 있지 않을 테니.

책을 덮으며 생각해 본다.

작금에 나를 위한 오렌지 반쪽은 무엇일까?


야간 비행, 밤하늘에 빛나던 헤아릴 수 없는 별들, 그 평화로움, 몇 시간을 지속되던 절대적 힘,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없다.

힘겨운 비행 구간을 지나 발견한 새로운 세계의 면모. 새벽녘 우리에게 주어진 생기로 상큼하게 물든 나무와 꽃, 여인, 미소. 우리에게 상으로 주어진 소박한 것들의 합주, 그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다.



Pink Floyd의 기타리스트 David Gilmour가 노래하는 <Breathe>와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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