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가 갖고 싶다

-안티 페미니즘 극복기

by 지얼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누가복음 6: 42


사진 출처 : 블로그 <주언니네 맛과 여행 일상>


7 년여 전,

여사친 포함, 대학 동아리 동기들과 인근의 카페에서 만남을 가졌을 때다.

카페의 한쪽 벽에 선반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작금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접시들과 커피잔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여사친인 K양(이라기보다는 K 아줌마)이 말했다.

"저 접시랑 커피잔, 정말 예쁘지 않니?"

"예쁘네." 영혼이 누락된 내가 말했다.

"나도 결혼 초기에는 저런 것들 참 많이 모았었는데."

"저런 거, 비싸냐?" 내가 물었다.

"케바케지 뭐. 내가 산 것들 중에 가장 비싼 것은 한 50 정도?" 그녀가 말했다.

"50만 원?" 눈이 휘둥그레진다.

"응. 3,40만 원짜리도 있었고..."

"역시..."

"역시 뭐?" 그녀가 추궁하듯 물었다.

"여자란 존재는 사치스러워."

"뭐라고?"

"그렇잖아. 어떻게 접시 한 개를 50만 원이나 주고 사냐. 돈이 썩었냐?"


페미니즘의 반동분자에게 그녀가 쏘아붙였다.

"그러는 너는?"

"내가 뭐?"

그녀가 결정타를 날렸다.

"그러는 너는 3만 5천 불짜리 기타 가지고 있잖아!"

"야, 저런 사치품이 악기하고 같냐?" 내가 항변했다.

"뭐가 다른데?"

"기타는 직업적 도구이지만 접시는 아니잖아?"

"왜 아냐? 나도 주부로서 접시를 사용하거든?"

음, 일리는 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그건 그냥 장식용 아니냐?"

"아니. 난 가끔 쓰는데?"

그녀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에 내 전 재산과 오른팔을 걸고 싶지만, 입증할 방법이 없다.

"50만 원은 3만 5천 불에 비하면 껌값 아니냐?" 그녀가 확인사살을 한다.

뭔가 억울하다. 내 예술을 위한 도구를 그깟 사치품과 비교하다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시 숙고해 본다.

내가 주부가 아니어서 그런 걸까.

비싼 기타는 괜찮지만 비싼 접시는 곤란하다는 내 견해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기타는 예술을 위한 도구야!'라고 말하려다가 관뒀다. 답변이 빤히 예상되어서다.

요리도 일종의 예술이거든?


니 똥 굵다, 젠장.



위의 일로부터 1,2 년여 전,

아는 동생의 가방을 보고 내가 말했다.

"가방 예쁘네."

그녀가 말했다.

"이거 비싼 거야."

루이비통인가. 음....

한 번은 그녀의 반지를 보고 말했다.

"불편하게 뭐 이런 걸 끼고 다녀. 빼 버려."

그녀가 말했다.

"이거 다이아거든?"

안물안궁이거든?

이보다 훨씬 더 오래전, 적을 둔 음악학원의 플루트 쌤에게 말했다.

"와, 플루트 색깔이 죄다 노랗네요. 금인가?"

"네. 금박이예요." 그녀가 대답했다.

"좋아 보여요. 비싼 건가?" 내가 물었다.

"조금... 이요. 한 8천만 원 정도?"

"팔, 팔천이라고요?"

"아마도요." 그녀가 말했다. "근데 전 이 악기 맘에 안 들어서 갖다 버리고 싶어요."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 아빠의 정체는 대체...

당시에 그녀를 잘 꼬셨더라면 내 팔자는 지금보다 나았을까?

"버리려거든 저한테 버리세요."

찌질한 놈.

그것도 작업이라고....


안 쓰려고 노력하는 낱말 중에 '된장녀'와 '김치녀'가 있다.

여성비하적인 낱말을 입에 올림으로써 내 품위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았던 거다.

한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항상 여성의 입장을 변호했던 내가 안티-페미니즘의 마초적 선봉장이 되어 버린 계기가 있었으니... 이름 붙이기를, '뚜벅이 굴욕 사건'이다(예전에 한번 언급한 적이 있다). 이태원의 한 카페에서, 며칠 전에 클럽에서 만난 예쁜이에게 차가 없다는 이유로 대차게 까였던 것.

그러나 사실은 내게는 안티가 될 자격조차 없음을, 그전에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


뚜벅이 굴욕 사건이 있기 2년여 전의 어느 날.

대학 동아리 후배인 S군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뭐 하고 놀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마도 만화책을 보거나 기타 치며 술이나 마셨겠지.

밤 10시쯤 귀가하려는 그를 현관에서 배웅하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청탁의 말을 툭 던졌다.

"다음에 놀러 올 때는 여자도 데리고 와라."

그다음 주 토요일에 S군은 정말로 여자를 데리고 왔다.


그녀의 외관은 아직도 기억에 있다. 짧은 치마와 검은 스타킹은 날씬한 다리 선을 감출 수 없었다.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했다. 셋이서 극장에서 영화를 본 후 집에 돌아왔을 때, 그가 입을 내 귀에 가까이 대고 말했다.

"형, 쟤랑 잘해보세요. 잘하시면 형은 셔터맨이 될 수 있어요."

<타짜>의 김혜수처럼 대놓고 뻐기지는 않았어도 그녀는 이대 나온 여자였다.

이대 약학과.

그들이 떠난 후에 귓가에 S군의 말이 잔향처럼 맴돌았다.

잘하시면 셔터맨이 될 수 있어요.


하지만 잘하지 못했고, 셔터맨의 꿈은 날아가 버렸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다만 이 얘기는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런 주제에 안티-페미니즘의 선봉장이 되겠다고?



셔터맨의 꿈이 날아가 버린 그날로부터 7,8여 년 전.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K대(군대)에서 이 사무실 저 사무실을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한 권의 책을 수습한다.

저자는 바이올러 클라인이고, 제목은 다음과 같다.


여자란 무엇인가


책을 들춰보았을 때, 나는 이 책이 누군가에게 소장되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러다니게 된 연유를 간파할 수 있었다. 대딩 시절, 남학생들에게 선택과목 중 단연 인기가 있었던 것은 <여성학>이 아니었던가.

멍청한 놈들.

에리히 프롬의 책 <사랑의 기술>이 남자들에게 잘 팔렸던 이유와 같은 것이었겠지.

<여성학>은 여성의 신체 구조를 공부하는 학문이 아니었고,

<사랑의 기술>은 '작업'의 기술이 아니었으며,

<여자란 무엇인가>는 '작업'의 기술이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습득해야만 하는 여성의 성심리에 관한 책이 아니었다.

제목만 보고 누군지 알 수 없는 발정 난 수컷이 서점에서 집어 든 것이리라. 겉표지의 제목만이라도 자세히 봤다면 돈 버릴 일은 없었으련만.

표지의 제목 아래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여자란 무엇인가

-이데올로기의 역사


그렇다.

이 책은 여성의 성심리에 관한 책이 아니라 페미니즘의 역사를 다룬 책이었던 것이다!



비록 불순한 계기로 집어든 책이었지만, 기특하게도 끝까지 완독했다.

여성 해방이 곧 남성 해방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이 작금에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아예 허투루 읽지는 않았나 보다.

책 후반에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이 인용되었다.


소녀들이여,

나는 여성(woman)이지만,

항상 인간(human)으로 간주되려 하고 있다.

-윈칠시 부인(1661년 출생)


'상징계(Symbolique)'가 부여한 여성의 정체성에 저항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글 일부도 인용되었다.


아아 슬프도다, 펜을 쥐려고 하는 여자는,

이런 건방진 자야말로, 그 잘못은,

어떠한 덕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고 간주된다.

세상은 우리가 성()과 길을 잘못 들었다고 말한다.

…유행, 댄스, 의상, 연극이 우리가 원해야 할 취미이며,

글을 쓰거나, 읽거나, 생각하거나, 탐구하는 것은

우리의 아름다움을 해치고, 청춘을 시들게 할 것이며,

굴종적인 가정의 따분한 일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기술과 가치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책이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는지, 20대 초반의 나는 이렇게 페미니스트로 태어난다.


"나, 다시 돌아갈래!"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의 시간 진행은 역순이다. '대과거--> 과거-->현재'의 순으로 진행되지 않고 '현재--> 과거--> 대과거'로 역행하는 것이다. 극 중 '영호(설경구 분)'가 순수한 대학생에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사상경찰을 거쳐 졸부 사장으로 타락해 가는 것을 목도하다 보면, 감독이 왜 역순으로 배치(편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시간의 역순으로 한 존재의 타락을 순수로 회복시키기 위함이랄까.

하지만 시간의 가역반응은 환상일 뿐이고, 그래서 이런 편집은 애잔함을 더한다.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니 이 또한 애잔하다.

위의 글처럼 내 삶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 보니 페미니스트로서의 면모를 갖춘 20대의 순수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


순수한 페미니스트 <--- 셔터맨 따위로 여자 등쳐먹으려는 븅신 <--- 된장녀 척결을 외치는 여혐 찌질이


여혐... 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성에 대한 부정편향이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너 자신을 알라'는 테스 형의 가르침으로 인해 그런 부정편향이 사실상 심리적 투사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도.


영화 <박하사탕>의 한 장면


에르메스, 샤넬, 루이비통 등 명품을 선호하는 처자들을 보면서 얼마나 혀를 찼던가. 게다가 50만 원짜리 접시에도 게거품을 물었던 내가 아니었던가.

'저런 건 단지 타자의 욕망에 자신을 맞춤으로써 존재감을 확인 받고자 하는 소위 인정투쟁이랄까...'

'유명 연예인이 광고하니까 자신도 그 연예인처럼 멋있어질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거겠지.'

뭐, 대충 이런 생각이 아니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 내 눈 속의 '들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여성들의 명품 구매에 대한 나의 비난은 단지 투사에 불과했음을.


약 2년여 전,

너튜브의 알고리즘을 통해 여성 뮤지션 'Memi'의 뮤비를 접하게 된다.

곡명은 <와이키키>.

순간 확 꽂혔다.


오.... 간지 작살....

(일반적인 스트랫 모양의 전기기타에서 픽가드 부분을 제외하고 모든 부위를 제거해 버린 여행용 기타, <트래블캐스터>다. 아래 사진의 기타들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좌측이 트래블캐스터 기타.)



메미의 연주 영상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지름신의 가르침을 받아) 그리 오래 망설이지 않고 영상의 그 기타를 해외직구로 구매했다. 가격은 대충 50만 원 정도?

위의 접시 값에 불과한 기타가 과연 소리가 좋을까? 그럴 리가 없다. 가격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애초에 그런 기대는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메미의 <와이키키>는 아마도 비교적 고가의 기타ㅡ아마도 펜더 기타ㅡ로 연주했을 테고, 뮤비의 트래블기타는 단지 핸드싱크용 액서세리일 뿐이었이리라).


오... 저렴한데?


그런데 왜 질렀냐고?

외관이 멋있었으니까.

아니, 메미가 연주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으니까. 메미의 연주 모습은... 정말이지 '개쩔었다!'

그리하여 당시 개털 신세인 내게 지름신께서 왕림하셨다.


지름신 : 질러라.

나 : 돈이 없습니다. 흑....

지름신 : 네가 언제는 돈이 있어서 질렀더냐?

나 : 요즘 진짜 개털입니다. 흑흑....

지름신 : 믿음이 약한 자여. '(지름의) 행위가 없는 탐심은 구원받지 못한다'라는 말을 듣지 못하였느냐?

나 : 저도 너무나 지르고 싶습니다. 그러나 통장잔고가 심히 염려되는걸요. 흑흑흑.....

지름신 : 명심하거라. 소유에 따른 만족은 통장잔고에 대한 우려를 초극한다는 것을.


결국 믿음의 열매는 배송되었다.



친구 순발(가명) 군이 배송된 기타를 보고 말했다.

"야! 이건 뭐 하러 샀어?"

"멋있잖아..." 내가 말했다.

"이게 멋있다고?"

나는 그에게 메미의 <와이키키> 뮤비를 보여준 후에 말했다.

"거봐. 개 멋있잖아."

맷돌 손잡이(어이)가 없는 눈빛을 하며 그가 말했다.

"쟤는 젊은 여자고 날씬하니까 멋있지. 하지만 너는 늙다리 남자인 데다가..."

기어이 현실인식의 짱돌을 던지고 마는 순발 군.

"뚱뚱하잖아!"

그의 추가적인 설명은 이렇다.

메미가 든 트래블기타는 그녀의 몸에 맞는 패션이지만, 내가 든 그것은 마치 거목에 들러붙은 매미 같다고.


그땐 미처 몰랐지.

메미에게 멋있다면, 내게도 멋있을 줄 알았지.

'상상계(Imaginaire)'로의 퇴행이랄까.

그때 테스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거야.

너 자신을 알라는.



이제는 그녀들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동화되어가고 있다. 남성 호르몬의 감소 탓일까?

인터넷 쇼핑을 검색하며 삿된 욕망을 불태운다.

저 환상의 Green.....

...진품의 에메랄드 목걸이가 갖고 싶다...


이렇게 안티-페미니즘은 극복되었다.



매미, <와이키키>
이걸 보니 펜더 기타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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