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마음
아주 오래전.
친구인 J 군과 간만에 바다를 찾는다.
모래도 빛을 잃어버린, 어스름한 해변가.
밤이 오자 저 멀리 실루엣으로 드러난 곶을 향해 느린 걸음을 옮긴다.
목적도 이유도 없는 걸음이다.
하늘이 청회색으로 물든다.
밤이 되어도 인근 가게들의 조명 탓에 어둠은 제 구실을 못하고, 별들은 보이지 않는다.
흐린 하늘을 볼 때 가끔 상상으로 이 노래를 듣는다.
검은 구름 하늘을 가리고
이별의 날은 왔도다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고
서로 작별하며 떠나리
알로하 오에(안녕 그대여)
알로하 오에
꽃 피는 시절에 다시 만나리
알로하 오에
알로하 오에
다시 만날 때까지
파도 소리가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가리지는 못한다.
애초에 고적함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폐허만이 그것을 기대할 수 있고, 이곳은 폐허가 아니었기에.
말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하나의 기억을 소환한다.
나는 '∼었기에'라는 말이 너무 싫어.
내가 묻는다. 왜?
몰라, 그냥. 그녀가 말을 잇는다. 그냥 '∼때문에'라고 말하면 되잖아.
그때 처음 봤다. '∼었기에'라는 말을 싫어하는 여자를.
싫어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아니면 내막을 알 수 없거나.
그에 반해 우리의 이별은 너무나 명확하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풍등을 날리고 있다.
허공에 떠오른 풍등의 불빛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어린 시절에 한강 인근에서 날린 방패연은 청공의 한 점이 되었었다. 풍등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인근 가게에서 풍등을 구매한다. 푸른색이다.
비닐 포장지를 뜯으며 그에게 묻는다.
기왕이면 반지도 실어 날려 보내지 그래?
그럴까?
그게 좋겠다.
이거 비싼 건데.
얼만데?
한 50만 원쯤?
아깝네.
아깝지.
안 되겠다.
그렇지? 전당포에 팔아 환금해야지.
그걸로 50만 원어치 술 마시면 되겠네.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어 풍등 하단에 있는 고체 연료에 불을 붙이고 손을 번쩍 들어 풍등을 비 내릴 것 같은 청회색 어둠 속으로 날려 보낸다.
빗물이 불빛을 꺼트리게 될까?
시간이 빗물의 역할을 대신하리라는 것을 잘 안다.
머잖아 그것은 빛을 잃은 한 점, 아니 수명을 다한 위성이 될 것이다.
위성은 박제된 별이 아니다.
그러므로 애써 찾아볼 이유가 없다.
공수표가 되어 버린 반지는 그의 호주머니 속에서 잠들어 있다.
문득 모르도르의 용암 속으로 반지를 던져 버리지 못하는 프로도가 생각난다. 한갓 사랑이라는 것도 권력욕만큼이나 삿될지 모르지만 중량은 만만찮다. 그래서 풍등에 실리지 못하는 것일까?
형식적인 의식에 불과할지라도 그는 결코 허공으로 던져 버지지 못한다.
사물에 부여한 의미를 형식으로나마 박탈하지 못하는 한 기억의 족쇄는 풀리지 않는다.
형은 참 심지가 센 사람 같아. 후배 J군이 말했다.
왜? 내가 물었다.
헤어진 후에 뭘 남기지는 않잖아.
뭘 남겨? 이메일? 아니면 반지?
전번이나 사진 같은 거.
그런 걸 뭐 하러 남겨.
그러니까 센 거지.
모진 거겠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센 것도 아니고 모진 것도 아닐 거야.
그럼 뭔데?
단지 약해 빠져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
이별 선고, 혹은 헤어질 결심 후 사진과 전번, 그리고 문자 메시지를 삭제하는 데에는 1분도 안 걸린다.
결단력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모질어서도 아니다. 시니컬함의 겉멋을 알아서도 아니다. 다만 심리적 진지 구축에 능할 뿐이다. 조건반사적인 방어 메커니즘이라고나 할까.
마음과 신체를 제외하고 남겨진 끄나풀 같은 것들이 가하는 강습이 두려운 거랄까.
아니, 어쩌면 자기 위로에 불과할 뿐인, 결코 가닿지 못할 졸렬한 카운터펀치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하나.
이도저도 아니라면 기억의 무게를 최대한 털어내려는 퍼포먼스라고나 할까.
내 존재의 결락감은 너를 서둘러 삭제함으로써 망각될 수 있는 것.
그럼에도 내 무형의 반지는 풍등보다 가볍다.
아니, 가볍기를 바란다.
이별은 중량의 재난이 아니라 경량의 예정이기에.
검은 구름 하늘을 가리고
이별의 날은 왔도다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고
서로 작별하며 떠나리
알로하 오에(안녕 그대여)
이상하다. 아니,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단 한순간도 로망에게 돌아가 문을 두드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건 어쩌면 내 안에 있는 나약함이나 호의 때문일 수도 있다. 그건 마치 내게 무언가를 주면 받지만, 다시 가져가면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내게는 떠나는 일이 정말 쉽다. 만일 내가 남자였다면 이런 마음을 가진 여자, 이를테면 무정한 여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는지 자문해 본다. 무정? 아니,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 가벼움. 그게 더 낫다. 나는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크리스티앙 보뱅, <가벼운 마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