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삶이 끝이라고?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설파하였다. 사람들은 동굴 안에서 바깥 세상으로 향하는 입구에 등 돌린 채 오로지 벽에 비친 바깥 세상의 그림자만을 바라보며 이것이 진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람들 중 아주 일부만이 바깥 세상을 보게 된다. 그는 사람들에게 다가와서 여기는 진짜 세상이 아니고 등 너머의 저 바깥 세상이 진짜(이데아)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한다. 미친놈.
이 비유에서 '사람들'은 바로 대개의 우리들이다. 그리고 바깥 세상을 본 이들을 소수의 사람들은 '견자', 또는 '깨달은 자'라고 칭했다.
지난번에 <마음을 바꾸는 방법>에 대해 간단히 리뷰를 하였다.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전문가의 통제가 전제된다면, LSD나 실로시빈 같은 향정신성 화합물은 각종 중독이나 우울증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고, 자아를 해체시킴으로써 영적인 각성을 일으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지난번의 글을 카피해 본다.
[소위 '우주적 각성', 혹은 '인식의 확장' 같은 영적 체험을 한 이들의 대략적인 소감은 다음과 같다.
ㅡ이 세상이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ㅡ불교에서 말한 자타불이의 세계ㅡ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강렬하게 느낀다.
ㅡ강렬한 지복과 신의 존재를 느낀다.
이것 말고도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이 세상 너머의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문득 '지각의 문을 정화하면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무한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도 생각난다.]
이런 각성을 유도하는 촉매제로서 LSD나 실로시빈 같은 화합물이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소위 '마약'으로 여겨지는 것이 '영성'을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니, 이것 참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
나쁜 소식과 기쁜 소식이 있다. 나쁜 소식은, 비록 미국의 몇 개 주와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 위 약물들의 연구가 재개되었고, 합법화의 바람도 불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는 대체로 불법이라는 거다(따라서 복용 시 철창행이다). 좋은 소식은, 철창행을 무릅쓰지 않고도, 그리고 돈을 한 푼도 안 쓰고도 위의 영적 각성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이다.
명상이다.
영적 각성? 깨달음? 대체 그게 뭔데?
이런 물음에는 다음의 의문이 숨겨져 있다. 깨달으면 대체 어떤 이득이 주어지는데?
영국의 심리학 교수인 스티브 테일러는 저서 <보통의 깨달음>을 통해 위의 의문을 해소해 준다. 대충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복을 느낀다.
-나와 타 존재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느낀다.
-나와 타 존재 사이에 경계가 없음을, 다시 말해 모두 하나라는 것을 느낀다.
-재물, 명예 등 세속적 가치가 무가치하게 느껴진다.
-무한한 사랑을 느낀다.
-자연이 더욱 명료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이타적으로 된다.
-이 세상을 초월하는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지각한다.
-이 세상을 아우르는 근본적 일자, 다시 말해 신의 존재를 깨닫는다.
-근본적 일자와 '내'가 분리되어 있지 않음(범아일여梵我一如)을 깨닫는다.
위의 체험을 한 문인들은 많다. 랭보, 로맹 롤랑, 외젠 이오네스코, D.H. 로렌스, 월트 휘트먼, 윌리엄 워즈워드, 윌리엄 블레이크 등... 이들이 겪은 체험과 각성에 대한 사상ㅡ인간이 체험을 통해서 궁극의 실재를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사상ㅡ을 이른바 '신비주의'라고 하는데, 각각의 종교적 차이점을 초월하는 이러한 신인합일의 체험과 각성을 올더스 헉슬리 같은 문인은 '영원의 철학'이라 명했다. 저서 <영원의 철학>에서 헉슬리는 역사적으로 저명한 '깨달은 자'에 대해 일목요원하게 정리해 놓았다. 십자가의 성 요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윌리엄 로, 잘랄루딘 루미, 혜능 등....(일독을 권한다). 스티븐 테일러의 <보통의 깨달음>은 시대와 문화와 종교를 관통하는 신비주의의 공통점을 잘 요약해 놓았다.
니체는 신의 죽음 이후의 허무주의에 흔들리는 삶의 기반에 대해 썰 하였고, 실존주의 철학이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들의 요지는 대략 이렇다. 아무런 의미와 목적이 없는 세상에 우리는 그저 던져졌다. 시지프처럼 살아있는 동안에는 반복되는 노동에 치이며 살다가 죽음으로 소멸될 운명이고, 살아있는 동안에도 뭐 그다지 대단한 (종교적) 삶의 의미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어떡하냐고? 의미가 없다면 너 스스로 그것을 세워라. 사회와 관습이 요구하는 정해진 길 따위는 집어치우고 네 스스로 정립한 가치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좋은 얘기에 대한 내 젊은 날의 의문은 이랬다.
"하지만 죽으면 다 끝인데요?"
임권택 감독의 1981년 작 영화 <만다라>에서, 법운스님(안성기 분)이 출가 전 대학생이었던 때에 들었던 고뇌와 유사하다. "사람들은 결국 죽어. 나도, 영주도... 그 죽는다는 명백한 현상에 난 승복할 수 없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 체념하고 무력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라면, 너무 허망하고 슬픈 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닐까?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이 세상의 어떤 학문이나 부귀와 명예도 무의미하다는 생각이야. 이것이 날 번민하게 하는 원흉이야."
다만 나는 이보다는 훨씬 덜 진지했을 뿐. 언젠가 명절에 조상의 묘 앞에서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여기 누워 계신 할아버지도 한 때 웃고 울며 살아 계셨겠지. 그러다가 결국... 근데 그게 그토록 긴 세월이었을까? 결국 나도 머잖은 때에 밥숟갈을 놓겠지.' 그리하여 내린 결론이 고작 이거다.
에이, 씨바ㄹ,
대충 살다 가자.
참을 수 없는 이 경박함이라니.
지금은 안다. 대충 살다 가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이라는 걸.
실존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듯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2년도 영화 <이키루(살다)>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청 공무원인 와타나베 과장은 위암 판정을 받은 후 여생을 어떻게 보낼지 고심한다. 아주 잠깐이지만 음주가무에 취해도 보지만, 그에게는 다 허망하기만 하다. 퇴근하는 길에 저녁놀을 보면서 그는 독백을 한다. "그동안 왜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았지?" 결국 죽기 전에 그는 의미 있는 일을 찾는다. 시청 직원들 모두가 미루기만 하는, 어린이를 위한 공원 공사에 착수하기로 한 것이다.
공사가 마무리되고, 눈이 내리는 어느 날에 와타나베는 공원의 그네에 앉아 나지막이 노래를 부른다.
[삶은 찰나의 것
소녀여, 빨리
사랑에 빠져라
그대의 입술이 아직
붉은색으로 빛날 때
그대의 사랑이
아직 식지 않았을 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삶은 찰나의 것
소녀여, 빨리
사랑에 빠져라
그대의 머릿결이 아직
눈부시게 빛날 때
사랑의 불꽃이
아직 다하지 않았을 때
내일 일은 아무도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진정으로 실존주의적인, 마음을 울리는 좋은 영화임에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젊은 날에 이 영화를 봤을 때 역시 다음의 의문이 떠오르는 것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세월은 생각보다 빠르고 머잖아 사랑이 불가능해지는 나이가 찾아올 테지. 그리고.... 결국에는 죽는다. 그런데... 결국에는 상실로 귀결될 인생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지? 이타적인 공원 설립이 의미라면, 왜 쾌락주의적 삶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치부하는 걸까? 어차피 결국에는 다 죽는데?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모든 것이 다 무상한데?
작금에는 삶의 의미 같은 건 그다지 찾지 않는다. 법륜스님의 말마따나 다람쥐도 위미 따위는 찾지 않고 그냥 사는데, 닝겐인 내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콱 죽어버릴 수는 없다. 왜 사냐고 묻거든... 그냥 웃자.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여전히 삶의 공허를 종종 느낀다. 빅터 프랭클의 말처럼,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의미'라서 그런 것일까?
그럴 때면 구약성경 중 <전도서>의 팝송 버전인 듯한 Kansas의 <Dust in the wind>의 가사가 귀를 스치는 듯하다.
[난 눈을 감아
잠깐 동안만, 그런데 그 순간마저 사라져 버려
내 모든 꿈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 마치 신기루처럼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결국 모든 것이 사라져 가는 먼지일 뿐
똑같은 이야기
끝없는 바다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처럼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도
결국은 무너져 내리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우리도 결국은 먼지 같은 존재일 뿐
이제 집착하지 마
하늘과 땅을 제외하면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
시간은 흘러가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단 1분조차 되돌릴 수 없어
바람 속의 먼지
우리는 결국 한 줌의 먼지일 뿐]
믿거나 말거나, '영원의 철학'은 우리가 한 줌의 먼지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늘과 땅은 물론 우리 역시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이 세상을 초월하는 세계가 있고, (헉슬리의 표현대로라면) '보편정신'이 어디든 편재해 있다고 한다. 보편정신을 브라만이라고 하든, 우주의 근원, 또는 신이라고 칭하든(그 외에 일자, 진여, 셀프, 빅마인드 등 뭐라 칭하든 간에) 그런 문자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고대의 플로티노스나 중세의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주장대로, 우리는 일자에서 파생된 존재이며, 다시 말해 신의 일부이다. 세상만물이 다 그렇다.
범신론일까? 그보다는 범재신론에 가깝다고 본다.
이 말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한(깨닫지 못하는 한), 아마도 믿음의 영역에 그칠 수도 있다. 가치관 정립이 스스로의 선택이라면, 유물론이나 실존주의를 추종해야 할까, 아니면 '영원의 철학'을 믿고 따라야 하는 걸까? 글쎄다. 뭐가 옳은지 나는 알 수 없다(그러니 누군가 제게 환각버섯 좀...). 그리고 아마도 이런 게 스님들이 말한 쓸데없는 '분별심'일 것이다. 다만 유물론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이들이라면 최소한 신비주의자들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해 보면서 '파스칼의 내기'를 마음에 새길 수는 있을 것 같다.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증명할 수 없다. 믿거나 말거나 둘 중 하나 중 택일.
-믿음을 가지고 죽은 후에 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면 천국행이므로 이득이다.
-불신의 마음을 지니고 죽은 이후에 신의 존재를 확인하면 지옥행이므로 손해다.
-죽었더니 천국 같은 건 없고 그냥 무(없음) 일뿐이라면, 속았다는 생각조차 못할 텐데 무슨 상관이랴.
여기서 "안 믿는다고 지옥을 보내는 신이 왜 선한 신이냐?"라고 따지는 것은 맥락을 한참 벗어난 거다.
믿고자 하는 자, 믿어라.
이제 명상을 할 시간이다.
깨어나면 세상은 물질로만 이루어진 죽은 장소가 아님을, 삶은 의미와 목적으로 가득함을, 우주는 우리에게 절대 무관심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깨어나면 의식이 단지 뇌의 작용이 아니라 우주의 근본 성질이며, 그 우주의 의식이 우리 개인들에게 흘러 들어옴을 알게 된다. 우리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다른 모든 생명체, 물질, 그리고 우주 전체와 같은 본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삶의 의미가 드러난다.
ㅡ스티브 테일러, <보통의 깨달음> 중에서
사족 :
유물론적 관점에 회의를 느끼는 분들에게 다음의 책들을 추천한다.
-칼 구스타프 융, <인간과 상징>
-콜린 윌슨, <아웃사이더>
-올더스 헉슬리, <영원의 철학>
-마이클 폴란, <마음을 바꾸는 방법>
-성해영, <내 안의 엑스터시를 찾아서>
-켄 윌버, <무경계>
-스티브 테일러, <보통의 깨달음>
-대니얼 골먼, 리처드 데이비드슨 공저, <명상하는 뇌>
물론 추천을 했다고 해서 내가 이 책들의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