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브 공작부인>에 대한 잡스러운 서평
[ La Princesse de Clèves ]
1678년 클로드 바르벵 Claude Barbin 출판사에서 저자 이름 없이 출판된 라파예트 부인의 소설이다. 이 작품은 불가능한 정념의 묘사와 미묘하고 간결한 문체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저자 이름 없이 출간된 것은 당시 귀족 여성에게 작가라는 직업이 그다지 명예스럽게 여겨지지 않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작가 : 라파예트 부인 (Marie-Madeleine de La Fayette, 1634년 ~ 1693년)
-발표 : 1678년
-장르 : 소설
-사조 : 프레시오지테, 고전주의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클레브 공작부인 [La Princesse de Clèves]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프랑스문학, 2013. 11., 이춘우, 김한식, 위키미디어 커먼즈)
➜ 아래의 글에는 지난날에 작성한 글들과 중복되는 내용이 다분함.
사랑의 진정한 비극은 무관심이라고, 서머싯 몸은 단편소설 <레드>를 통해 이야기한다.
주인공인 선장 레드는 어느 섬에서 한 원주민 처녀와 사랑이 빠지고 동거에 이른다. 그러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 둘은 이별을 하게 되고, 수십 년이 지난 후에 다시 섬을 찾은 레드는 그녀와 조우하지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세월이 지난날의 흔적을 마멸시켜 버린 것이다.
내게 있어 가장 슬펐던 영화의 한 장면은 1970년 작 영화 <해바라기>의 마지막 씬이다. 연인이었던 안토니오(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분)를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만 하는 조반나(소피아 로렌 분)는 연인이 탄 기차가 자신에게 멀어져 갈 때 울음을 터뜨리고야 마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나도 울었다.
이별은 슬프다.
그럼에도 이별은 ‘사랑의 진정한 비극’은 아니라고, 아니 무관심 보다는 좀 나은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이런 연유일까?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이별은 상대방을 마음속에 박제시킨다. 아니, 기억이라는 형식으로 영원히 살아 숨 쉬게 만든다. ‘Endless Love’라는 제목의 영화와 노래도 있는데, 어쩌면 사랑의 영원성은 강제적인 단절(이별)에 의해 보장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연유로 올리버는 제니를 영원히 사랑할 것이고(<러브 스토리>), 아처는 엘렌을 죽는 날까지 기억하게 될 것이며(<순수의 시대>), 블라디미르는 지나이다를 언제까지나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할 것이다(<첫사랑>).
사랑의 진정한 비극은 무관심이라는 <레드>>의 서사를 목도하노라면 <해바라기>와는 달리 눈에 물기가 고이는 대신 가슴 어딘가에 씁쓸함이 느껴진다. 왜 그럴까? 몽테뉴는 가장 깊은 슬픔은 절규하는 모습이 아닌, 그저 소리 없이 고개를 떨군 모습으로 드러난다고 했는데, 이 ‘사랑의 진정한 비극’ 앞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는 이유도 그런 것일까?
이 감정은 습기 가득한 비통이 아니고 건조한 씁쓸함이며, 상실의 격렬한 통증보다는 체념의 아릿함에 가깝다. 건조하다는 표현이 지나치다면, 뇌우가 아닌 슬며시 젖어드는 가랑비 같은 것이랄까. 소피아 로렌의 애달픈 울음이 아니라 어딘가로 발걸음을 돌리는, 70년대 미국 드라마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 마지막 장면에서의 데이비드 뒷모습 같다고나 할까. MZ는 절대로 공감활 수 없디.
<해바라기>에서 조반나가 생생한 현재의 슬픔, 즉 ‘애별리고’를 체감하고 있다면, <레드>에서의 레드는 만남 이후 먼 훗날에 무감각한 허무함을 체감하고 있다. 서머싯 몸은 아마도 슬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영혼의 각질화를 더 큰 비극으로 보는 것 같다. 꽃을 피울 수 없는 사막의 비극이랄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이 '공'하다는 ‘제행무상’을 체감하게 되면 대개 레드처럼 마음이 경화되고 마는 것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무감각은 해탈에 이르는 길이 아닐 것이다. 다만 아릿한 체념 속에서 일말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부처가 말한 '중도'를 터득하게 되면 우리는 에고의 좌뇌 상태에서 우주적 각성 상태인 우뇌 상태로 전환함으로써 상실감 또한 허상이라는 것을 간파할 수 있게 되리라. 간절히 원하는 것이 얻어지지 않는 일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것과 또 그렇게 힘들여 얻게 되더라도 만족감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것. 그리고 큰 기대감은 실망이라는 반대급부로 지불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
누군가 내게 물었다. “왜 사랑은 지속되기 힘들까요?” 내 대답은 간단했다.
질려서요.
이른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같다고나 할까. ‘있을 때 잘하라’고 말들 하지만 실상 ‘잘하게’ 되는 것은 없을 때다. 말이 좀 이상하긴 하다. 없는데 어떻게 잘하겠는가. 그런데도 감정적으로는 실제로 그렇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 알리사가 제롬에게 그러지 않았던가? 내가 널 가장 사랑했을 때는 네가 내 곁에 없었을 때라고. 부모님의 무덤 앞에서야 비로소 효자 되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아마 나도 그럴 것이다).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에서, 아처는 엘렌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무언가 놓친 게 있다는 건 알았다. 인생의 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너무나 아득하고 불가능한 일로 여겨져서, 그걸 불평한다는 건 복권에 당첨되지 않았다고 낙심하는 것과 같았다. 그 복권은 수천만 장이 팔렸고 일등은 오직 하나였다. 그가 일등에 당첨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엘렌 올렌스카를 떠올리면, 책이나 그림에 나오는 상상의 애인처럼 추상적이지만 고요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그가 놓친 모든 것을 한데 모은 영상이 되었다.]
연애에 있어 부재는 존재보다 강력하다. 부재가 일등 복권이라면 존재는 5천 원짜리 5등 복권이다. 이뤄지지 않은 첫사랑은 당첨되지 않은 일등 복권과 같다. 일등 복권은 너무나 간절하고 그것이 손에 닿지 않는 머나먼 것이라는 사실도 인지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향해 상상과 회한의 손길을 뻗는다. 욕망은 항시 내 손에 없는 것을 향하는 법이므로.
'질려서요'라니, 답변에 성의가 없긴 했다. 스님들의 말을 빌어 다시 말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몸의 세포도 7년 주기로 모두 교체되고 계절도 항시 변하고 국경도 변하고 종의 체질도 변합니다. 한마디로 제행무상입니다. 우리들 사랑인들 거기에서 자유스러울까요?
그러니까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는 틀렸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질문이 잘못되었다. <러브스토리>의 올리버에게 물어보라. 어떻게 사랑이 '안' 변하느냐고. 아마도 그는 이렇게 답변할 것이다. 일찍이 제니가 죽어버렸거든요. 자이가르닉 효과가 미완의 (남녀)관계에서보다 더 강력하게 기능하는 경우가 또 있을까?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이라면 아마도 이렇게 답변하리라. 안 변하죠. 적어도 3년, 아니 2년 동안은.
우리 교회의 한 장로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심 년은 무슨. 석 달이면 모를까.
내 절친 박 모 씨는 이렇게 얘기하였다.
수지면 6달은 가지. 제니라면 한 8달?
내가 물었다. 그럼 서현진은?
그가 대답했다. 현진이라면 일 년은 가지.
과연 내 친구다.
심리학 실험 중에 이런 것이 있다. 피실험자 앞에 설치된 스크린에 노란색 동그라미가 비친다. 없어졌다가 잠시 후 노란 동그라미가 다시 나타난다. 이후 점멸의 과정을 거치다 보면 최초, 또는 초기와는 달리 피실험자 뇌의 특정 부위는 더 이상 활성화가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동그라미가 다른 색으로 바뀌게 되면 다시 활성화된다. 이것은 소리로도 실험할 수 있다.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대상(현상)에 관심을 꺼버리는 신경과정을 ‘습관화’라고 한다. 주의 피로(attention fatigue)에 대한 반작용인 셈이다.
[우리는 보통 특이한 무언가를 위협적이지 않은 것으로 확신하게 되거나, 그것에 대한 분류가 확실히 끝날 때까지만 관심을 기울인다. 그 후에는 습관화라는 과정이 나타나, 일단 안전하다고 파악한 것 혹은 익숙해진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뇌의 에너지를 절약한다. 뇌 역학의 한 가지 단점이다. 익숙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벽에 걸린 사진이든, 밤마다 먹는 똑같은 요리든 그리고 어쩌면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습관화된다. 습관화는 삶을 관리할 수 있게 해 주지만, 약간 따분하게 만들어 타성에 젖게 한다.
-대니얼 골먼, 리처드 데이비슨 <명상하는 뇌> 중에서]
라파예트 부인의 <클레브 공작부인>에서, 클레브 공작부인은 이 ‘습관화’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냐고 물으셨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제가 그렇게 엄격했을 리 없지요. 당신이 제게 너무 특별하니까, 당신에게 집착하면 생길 불행이 그려져 그러는 거예요.”
과연 그녀는 <잡아함경>에서의 ‘독화살을 두 번 맞지 말라’는 격언을 충분히 체감하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나 역시 그렇다. (장원영을 닮은) 처자, 아니 아줌마를 만나게 되면 마음이 흔들리게 되는데, 이것은 첫 번째 독화살을 처맞은 것과 같다. 그러나 경솔하게 고백함으로써 ‘까임’ 이후의 이불킥 혹은 슬픔이라는 두 번째 독화살은 처맞지 않는다. 물론 클레브 공작부인의 두 번째 화살은 성격이 다르다.
아래의 대사를 보면 '습관화'에 대해 클레브 공작부인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남자들이 영원한 약속 안에서 그 열정을 계속 간직할 수 있을까요? 그런 기적이 제게 일어날까요? 제 모든 행복이 될 열정이 결국에는 사그라지는 걸 분명 지켜봐야 할 거예요.”
이런 말을 들으면 다수의 남자들은 뜨끔함과 동시에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대개 이렇게 항변하리라. 난 안 그래.
클레브 공작부인은 일견 예외는 인정하는 듯하다.
“아마 클레브 공작만이 결혼해도 사랑을 지켜나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거예요. 제 운명은 얄궂게도 제게 그런 행복을 주지 않았지만요. 하지만 그의 열정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던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제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그가 알아서였을 거예요.”
일부 예외를 인정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상 그녀는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가장 욕망하는 법이에요.
“당신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아요. 제게는 당신의 열정을 지속시킬 어떤 수단도 없을 거고요, 저는 우리 사이의 장애물이 당신을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걸요. 그 장애물이 당신의 의지를 불태우게 했고, 의도적이지 않았던 제 행동으로 혹은 우연으로 당신이 알게 된 것들 때문에 물러서지 않을 희망이 생긴 거지요.(…)”
그녀는 욕망에 대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훔친 사과가 더 맛있다.
-남자들의 이상형은… 처음 보는 여자다.
욕망의 변증법은 아마 이럴 것이다.
1. 욕망이라는 가지에 작은 불씨가 붙는다.
2. 욕망의 대상은 자꾸 불을 꺼뜨리려고 한다.
3. 욕망은 산불이 되어버린다.
초딩시절에 즐겨 본 소년소녀잡지 중 <어깨동무>에 다음의 내용이 실렸던 것을 기억한다. 제목은 대충 ‘남들을 골탕 먹이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그중 한 가지 방법은 이랬다.
1. 땅에 말뚝을 박아 놓는다.
2. 빈 깡통에 ‘절대 걷어차지 마시오’라고 적은 종이를 붙여 놓는다.
3. 깡통을 말뚝 위에 씌운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욕망이고, 하지 못하게 되면 똥줄이 타는 게 욕망이다. 그러니 (장원영을 닮은) 여자가 “오늘 바쁘세요?”라고 물으면 무조건 바쁘다고 대답하라. 오늘의 솜사탕은 내일의 쥐약이고, 오늘의 애무는 내일의 피멍이다.
“… 우리가 이루어지고 나면 저는 더 이상 당신의 행복의 이유가 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제게 그랬듯 다른 여자를 대하는 당신 모습을 보게 되겠지요. 저는 그런 당신을 죽어도 볼 수 없을 거예요. 주고 싶은 고통에 시달릴 테고, 질투라는 불행한 병을 갖게 되겠죠.(…)”
확실히 클레브 공작부인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저는 두 번째 독화살은 안 처맞고 싶어요.
이에 대해 어떤 조언이 가능할까? 철학자 강신주라면 아마도 이렇게 말했으리라. 영원히 지지 않는 건 조화예요. (진짜) 꽃이 언젠가 진다고 해서 꽃을 안 피우던가요?
김영민 교수는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을 즐기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환멸을 피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에 파묻히지 말아야 한다.” 음… 중용을 말하는 것인가? 이쯤 되면 되묻지 않을 수가 없다.
뭐 어쩌라고?
Queen의 프레디 머큐리가 대답한다.
Too much love will kill you.
그런데…. 젊은 시절에 너무 뜨겁지 않은 사랑이라는 게 가능한 일인가? 부처처럼 깨닫지 않는 한 말이다. 사랑을 대상화하는 직업적 픽업아티스트라면 또 모를까.
어제 누군가 내게 물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음으로 괴로울래요, 아니면 홀로 고독하더라도 즐거울래요?” 음…. 이런 밸런스게임은 마치 다음의 질문처럼 들린다. “무인도에서 장원영과 매일 된장국만 먹으면서 지낼래요, 아니면 지금 있는 곳에서 매일 뷔페를 먹으면서 홀로 지낼래요?”
인생에는 답이 없다고들 한다. 아마도 단지 선택의 문제라는 얘기일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진리는 있다.
제행무상이다.
고로 전자를 택하면 언젠가 가엾은 원영 양에게 다음과 같은 흰소리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야, 넌 매일 된장만 먹는 거, 지겹지 않니?" 음...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많이 들은 대사다. 글타. 허진호 감독의 영화 <행복>에서 영수(황정민 분)가 은희(임수정 분)에게 한 말이다.
"은희야... 천천히 밥 먹는 거, 이제 지겹지 않니?"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것인가. 시골, 또는 은희로 대변되는(은희는 심장병이 있어서 뛰지 못한다) '슬로 라이프'에 대한 반감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사다. 이후 영수는 은희를 버려두고 그리워하던 대도시의 밤 문화 속으로 빤쓰런을 친다.
작금에 이르러 되새김질을 해본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별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 이외의 타인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아니, 나 자신도 내 뜻대로 안 될 때가 있다.
-누군가 영원한 사랑을 말하면,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라. 생별이든 사별이든, 이미 헤어진 거라고.
-욕망은 금지된 것에 대해 더 가열된다. 하지만 결국엔 식다가 꺼진다. 영원할 것 같은 태양도 수명이 50억 년 밖에 안 남았다. 하물며…
-로맨틱 러브는 시대적 환상이자 호르몬 과다 분비에 따른 일종의 광기 상태이다. 진실한 사랑이라는 게 있다면 어쩌면 열기가 어느 정도 식은 미지근한 숭늉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미지근한 숭늉이 마음에 안 든다며 밥상을 엎어버리고는 다른 상을 차리려 들지 마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밥도 결국에는 식는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라. 난 그러지 못했다.
-이도저도 귀찮으면 그냥 혼자 살자.
아직 저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 마음속에는 많은 금기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될 일도 우선 안 된다고 합니다
혹시 당신은 저의 금기가 아니신지요
당신은 저에게 금기를 주시고
홀로 자유로우신가요
휘어진 느티나무 가지가
저의 집 지붕 위에 드리우듯이
저로부터 당신은 떠나지 않습니다
-이성복 <금기>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