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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다 좋아했던 미미

ㅡ역사적 철벽녀

by 지얼
스크린샷 2024-12-23 오전 11.52.54.png 열 번 찍어도 안 넘어간다. 그러다 네 도끼날 빠진다....


대학 동아리의 동기 중에 '수달'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20세의 어느 봄날에 그 친구가 내게 다가와서 물었다.


"너, 소개팅 나가지 않을래?"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학교 정문 근처의 어느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수다 떠는 것만큼은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았던 나였지만, 상대가 얼음공주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런 류의 여자에겐 대화의 물꼬를 트기는커녕 침묵을 방어하기조차 어렵다. 분위기가 이쯤 되면 '얘기'는 대화의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닌, 그저 침묵을 지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어색한 침묵을 지우기 위해 의무적으로 내가 물었다.


"아… 지금 나오는 이 음악, 제가 좋아하는 거예요. 미미(가명) 씨는 어떤 음악을 좋아하세요?"


눈을 마주치지도 않은 채 그녀가 최대한의 성의로 대답했다.


"다 좋아해요."


"……"


카페에 음악마저 흐르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아마 시계의 초침 소리만 과장되게 들려왔을 거다. 그러니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던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동작으로 뻘쭘함을 대체하는 수밖에.


커피잔은 물론, 어느덧 물컵도 다 비워졌다.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본래 질문이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런 경우엔 단지 '……'를 극복하기 위함일 뿐이다. 그리고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물음이란, 대개 진부하다.


"어제 TV에서 <XXX의 XX>라는 영화를 해주던데… 보셨어요?"


역시나 눈을 마주치지 않는 이 여자, 보지 못했다는 걸 침묵으로 대답한다.

대단히 입이 무거운 여자다.


"전 그런 영화가 재밌더라고요. 미미 씨는 어떤 영화 좋아하세요?"


내가 묻자, 고맙게도 침묵 아닌 육성으로 답변해 주는 친절함을 보인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다 좋아해요."


아... 다 좋아하시는구나. 되게 긍정적이시네요. 하하하....

혼자 횡설수설하다가, 다시 물었다.


"실컷 떠들었더니 살짝 배고파지려고 하네요. 미미 씨는 배 안 고파요? 나가서 뭣 좀 먹을까요?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그녀는 역시나 예상되는 대답을 했다. 다 좋아해요.

아.... 도무지 싫어하는 게 없는 여자. 세상의 무엇이든지 다 좋아할 것만 같은 여자.

그 이전에 다음의 대화에서 진즉에 간파했었어야 했거늘.


"며칠 전에 영화 <청춘 스케치>를 봤는데요.... 혹시 보셨나요?"

조용히 고개를 젓는 미미.

"그 영화에 박중훈 배우가 나오거든요? 근데 볼수록 재미있게 생긴 것 같아요."
"......"
" 어떻게 보면 잘 생겼는데 또 어떻게 보면 이상하게 생겼달까... 미미 씨 스타일은 아닐 것 같아요. 어떤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하시나요?"

물은 내가 븅신이지...

"다 좋아해요."


스크린샷 2024-12-23 오후 12.22.41.png 이 영화의 미미는 안 그러는데.


아.... 도무지 싫어하는 게 없는 여자. 세상의 무엇이든지 다 좋아할 것만 같은 여자.

딱 하나만 빼고.

다음 중 어느 것이 더 피곤할까?


나만 빼고 세상의 모든 것을 좋아하는 여자 VS 세상 모든 것을 싫어하고 나만 좋아하는 여자


후자의 경우가 차라리 낫다고?

이래도?


나 : 미미야, 짜장면 먹으러 갈까?

미미 : 싫어. 질색이야.

나 : 그럼 스파게티 먹으러 갈까?

미미 : 면 종류는 싫어.

나 : 그럼 한식 먹으러 가자.

미미 : 한식? 집에서 만날 먹는 걸 뭐 하러 돈 주고 또 먹어?

나 : 그럼 돈가스나 스테이크 어때?

미미 : 너무 기름져서 싫어. 차라리 채식이 좋아.

나 : 그럼 비빔밥, 콜?

미미 : 어제 먹었어.

나 : 휴.... 됐다. 관두자. 나 갈게.

미미 : 안 돼! 가지 마, 오빠. 사랑해....


막연한 욕망으로 얼버무리지 말고 구체적으로 요구를 하란 말이다!

하지만 그날 현실의 미미가 이럴 확률은 십만 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어쨌거나 이런저런 방식으로 다 까여봤지만, 긍정(다 좋아해요)의 방식으로 까인 건 그날 이후로 전무후무하다.

미미.

역사적 철벽녀인 것이다!


스크린샷 2024-12-23 오전 11.57.47.png



카페에서는 시인과 촌장의 노래 <가시나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미미 속에는 내가 하나도 없어서 내가 도저히 쉴 곳이 없었다!


[.... 이윽고 그는 그녀에게 영원한 위안을 줄 말을 떠올려봤으나 그것 또한 무용한 것임을 깨달았다. 이미 그녀는 모든 것을 인내하며 견뎌가고 있는 사람이었다. 무엇이든지 다!

-콜린 맥컬로우, <가시나무 새>중에서]


이윽고 나는 그녀에게 순간이나마 흥미를 줄 말을 떠올려봤으나 그것 또한 무용한 것임을 깨달았다. 이미 그녀는 내 모든 미끼를 인내하며 견뎌가고 있는 사람이었다. 무엇이든지 다!



스크린샷 2024-12-23 오전 11.49.24.png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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