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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ㅡ난해함이 의미로 다가오는 순간

by 지얼



오래간만에 찾은 미술관.


오랜만의 동행, 그리고

오랜만의 설렘.

쌩텍쥐페리가 그랬다지.

사랑은 한 곳을 같이 바라보는 것이라고.


<무제>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을 같이 바라본다.

맞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이해하지 못할 난해한 현대미술조차

의미로 가득한 그 무엇으로 느껴지게 한다.


가을날, 낙조의 온기가 사그라들듯이

손 안의 이 온기도 언젠가는 식어가겠지.

박피된 추억에 검푸른 딱지가 굳어갈 때

어떤 의미로 다가왔던 그림도

무의미한 혼돈으로만 지각되겠지.

그러니 오직 이 순간을 살뿐이다.

두 손을 꼬옥 잡은 채로.


순간들이 지나

한 덩어리의 지난날로 차갑게 응고될 때

우리는 각자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잿더미에서 작은 불씨를 찾아 그 누군가와

다시금 불을 피우려는 꿈을 각자 꾸게 될까.

아니면 단지 지금 이 순간이

꿈에 불과한 것일까.




눈을 뜬다.

맞다.

꿈이다.

손바닥의 온기는 아마도,

빤쓰가 덥혀주었기 때문이리라(왜 남자들은 잘 때 가끔씩 손이 부적절한 장소에 머무는 것일까).


자는 도중에 고양이들이 내 몸 위로 기어 올라왔나 보다. 검은 러닝셔츠에 털이 수북하다.

돌돌이(테이프 클리너)로 가슴팍을 마구 문지른다. 털이 들러붙은 페이퍼 한 장을 찢어내려다가 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접착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니 이걸로 방 청소를 해야겠다.

방바닥을 쓱 문지른다. 예상보다 효과가 좋다.


먼지와 과자 부스러기, 그리고 고양이털과 나의 못된 털(?)이 붙은 페이퍼 한쪽을 찢어낸다.

그리고 한참 바라본다.

헉, 이것은 뭔가,

예술 작품 같은데?

한참을 바라보다 제목도 붙여 본다.

<무제>

아니, 다시 짓는다.

<wicked pubic hair>


Wicked pubic hair



똥과 변기가 예술 작품이 되고 페인트를 묻힌 붓을 캔버스에 마구 뿌린 그림도 예술 작품이 되는 세상에서 돌돌이 페이퍼에 들러붙은 오물들이 예술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 하는 잡생각을 하다가 못된 털마저 붙어버린 그것을 구겨 휴지통에 넣는다.


헝가리 작가 에프라임 키숀은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에서 이렇게 썼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작품을 곧이곧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가장 놀란 것은 아마도 예술가 그들 자신이었을 것이다.” 예외가 있겠지만 대체로 현대미술은 철학적 의미로 가장한 낙서에 불과하다는 거다.

에프라임 키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의 작품 <wicked pubic hair>에도 ‘있어 보이는’ 작품평을 부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wicked pubic hair>는 모든 절대 가치가 붕괴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를 기존의 진부한 방식이 아닌, 기묘하고도 개성적인 방식으로, 즉 기존의 쓰레기로 구현하는 대신에 자신의 신체에서 이탈한 것을 활용함으로써 소외를 넘어 게토화 되기에 이른 '불온한' 존재에 대한 우리의 주위를 환기함과 동시에 자본주의에의 탈주를….. 씨부렁씨부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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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후배 중에 ‘헐크’가 있다. 그는 불의를 못 참는다. 특히 타인에 의한 민폐를 싫어한다. 폭주족 같이 운전하는 운전자든, 식당에서 저희 집 안방인 양 떠드는 아이들이든, 그의 엄청난 비난이나 야단, 경우에 따라서는 욕설을 피해 가기 힘들다.

그러던 그에게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난다.


여친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개자식이 난폭 운전을 하는 것을 보고 내가 “저 새낀 운전을 야매로 배웠나?”라고 한마디를 던지자 조수석에서 ‘헐크’가 조용히 말하는 것이었다.

“똥 마려운가 보지, 뭐.”

그렇게 그는 '헐크' 아닌 '데이비드'로 남았다.


글타.

난폭 운전과 아이들의 고성방가가 문제의 본질이 아니었다. 본능의 활로가 막혀버리는 데서 기인하는 신경증이 문제의 본질… 프로이트가 옳았던 걸까?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날 밤에 그가 이런 얘기를 했다. “형, 이렇게 내리는 비, 정말 멋지지 않아? 이런 날에 소주 한 잔이면 사는 것에 대해 족할 것 같아.” KBS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 간혹 등장하던, 야심한 밤에 대바늘을 자신의 허벅지에 꽂는 조선시대의 미망인을 능히 이해하고도 남을 심정으로 그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족하냐? 난 족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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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디든지 난폭 운전자는 있는 법이고, 언제든 폭풍우는 몰아치기 마련이다. 외부(세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기실 내부(마음)에 달려있다. 비틀스의 존 레넌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아름다운 발라드 <Oh, my love>의 가사는 이렇다.


Oh my love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My eyes are wide open

Oh my lover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My eyes can see


I see the wind

Oh I see the trees

Everything is clear in my heart

I see the clouds

Oh I see the sky

Everything is clear in our world


사랑을 하니 눈이 열리고, 그리하여 구름과 나무를 진정으로 볼 수 있게 되고, 이 세상 모든 것이 깨끗해 보이게 된다. 그리고 난폭 운전도 설사로 인한 급똥이 유발한, 어쩔 수 없는 행위로 이해되는 거다. 오, 위대하여라, 사랑이여.

그런즉, 오노 요코를 사랑한 존 레넌의 시선으로 내 작품을 보라. 블레이크가 말했나? 한 알의 모래알에서 우주를 볼 수 있다고. 그렇다면 나의 ‘못된 털’에서도 우주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소재가 똥이든, 변기이든, 못된 털이든

두 손을 맞잡고 보는 한 무조건 예술이다.


뭐,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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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u3QZVdqUidw?si=J1cXRHphjUs-zx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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