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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 일 년 후

ㅡ무상함에 대하여

by 지얼


빛나는 세계 명작, (고) 우수이 요시토 선생의 작품 <짱구는 못 말려(원제 : 크레용 신짱)>를 보면, 짱구 엄마 '영란'이 짱구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영란이 "그래서 왕자님과 공주님은 결혼을 약속했답니다"라고 동화책의 마지막 지문을 읽자마자 조숙한 천재 짱구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들의 앞에 놓인 위기를 예상하지도 못한 채....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루는 문학작품은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한다. 하나는 '로맨스'이고 또 하나는 '아나토미'이다.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게 '로맨스'이고, '위기는 감지하지도 못한 채'의 기조를 띄는 것이 '아나토미'이랄까. 사랑의 해부학적 접근.


고로 '로맨스' 같은 경우는 작가 밀란 쿤데라에 의하면 커튼 안의 진실을 은폐한 '키치'에 불과하므로, 아나토미적 접근이야말로 실존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문학'작품'의 진정성을 보증해 준다나 뭐라나.


구태여 양분하자면, 에탄 호크, 줄리 델피 주연의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로맨스, 그리고 <비포 미드나잇>은 아나토미에 가깝다고나 할까(아님 말고). 홍상수의 영화 <생활의 발견>은 당근 아나토미일 것이고, 알랭 드 보통의 소설들(<우리는 사랑일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등)은 물론 이디스 워튼의 <이선 프롬>이나 서머싯 모옴의 <레드> 같은 소설도 내가 보기에는 냉정한 아나토미다. 호르몬이 덧씌운 사랑의 분칠을 아나토미적 경험과 관점으로 무참히 벗겨버리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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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토미적 관점을 유지하는 영화로는 아마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도 포함될 듯싶다. 이 영화는 대학생인 츠네오와 뇌성마비 장애인인 '조제' 사이의, 장애와 난간을 극복한 '러브스토리' 따위가 아니다. 영화의 막판에 츠네오는 등에 업은 조제가 '무겁다'라고 느낀다. 그리하여 결국 조제를 떠난다. 이 영화의 감독인 이누도 잇신은 마치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 "어이, 네가 자칭 로맨티시스트라며? 그럼 너는 조제를 죽는 그날까지 업고 다닐 수 있겠어?" 마지막 장면에서 츠네오의 눈물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나 나나 기실 이것 밖에는 안 되는 것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여주 구미코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한 달 후, 일 년 후>의 여주 '조제'를 좋아해서 자신의 가명을 '조제'로 지었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의 등장인물인 '사강'을 자신의 필명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역시 아나토미적 관점으로 쓰인 연애소설이 아닌가?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믿을 때 우리는 다시 그것에 집착하게 되며, 실패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때 우리는 그것을 애써 추구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전에, 지인 몇 분이 승차한 차 안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사랑을 지속시키는 호르몬은 3년밖에 안 간다고 하잖아요?" 그랬더니 앞 좌석에서 무심하게 듣고 계셨던 한 어르신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3년은 무슨. 3개월이겠지."


사강의 소설 <한 달 후, 일 년 후>의 제목을 보자마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의도한 이 소설의 정확한 제목은 기실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한 달 후 불꽃, 일 년 후 잿더미


작가 다나베 세이코는 원작 단편소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에서 이렇게 썼다. [그 프랑수아즈라는 여류작가는 소설 속 여주인공의 이름을 조제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제는 이 작가의 소설에 마음이 빼앗기고 말았다. 야마무라 구미코라는 이름보다, 야마무라 조제가 훨씬 더 멋있어 보였다.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아니, 분명히 좋은 일이 있었는데, 조제라는 이름이 그런 행운을 가져다준 거라고 생각했다. 좋은 일이란, 그녀 앞에 츠네오가 나타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다나베 세이코가 <한 달 후, 일 년 후>의 여주 이름을 갖다 쓴 이유는 분명하다. 경험을 통해 아나토미적으로 해부해 본 적이 있는 작가라면, 로맨스 따위는 쓰지 않는다.


다행히 영화감독 이누도 잇신은 영화의 마지막에 조제를 마냥 잿더미로 남겨놓지는 않았다. 소설에서, 조제는 츠네오와의 마지막 여행 직후에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죽은 거야. 죽은 존재가 된 거야.'

[죽은 존재란, 사체다.

물고기 같은 츠네오와 조제의 모습에, 조제는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 츠네오가 언제 떠날지 알 수 없지만, 곁에 있는 한 행복하고,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제는 행복에 대해 생각할 때, 그것을 늘 죽음과 같은 말로 여긴다. 완전무결한 행복은 죽음 그 자체다.

'우리는 물고기야. 죽어버린 거야.'

-다나베 세이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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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변한다. 죽음만이 무변과 영원을 보장해 준다. 그런즉 <봄날은 간다>에서의 이영애는 무죄다.

사강의 작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민음사판 해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 사강의 작품이 강조하는 것은 사랑의 영원성이 아니라 덧없음이다. 실제로 사랑을 믿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농담하세요? 제가 믿는 건 열정이에요.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사랑은 이 년 이상 안 갑니다. 좋아요. 삼 년이라고 해 두죠."]


이것을 읽었을 때, 친구인 석촌동 현자 박 모 씨의 발언이 새삼 떠올랐다. 언젠가, 지난밤에 본 드라마 얘기를 하는 중에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수지, 예쁘지 않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쁘지. 수지라면(수지랑 사귄다면) 한 6개월은 가겠네

그래? 그럼 네가 좋아하는 제니(블랙핑크)는?

제니? 걔라면 10개월은 가지.

제니보다 길게 갈 수 있는 처자는 없음?

있음.

누군데?

서현진이라면 일 년은 갈 수 있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꼴값한다고 나무랄 필요는 없다. 똥 싸면서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기타로 연주했던, 범상하지 않은 석촌동 현자 박 모 씨는 김칫국을 마시는 게 아니라 필연적인 사랑의 유한성에 대해 썰 하고 있었던 것이니까.

사강은 <한 달 후, 일 년 후>의 말미에 조제의 입을 빌어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모든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죠?" 조제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미쳐버리게 돼요."]


미쳐버리지 않으려면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엔드리스 러브'를 기대해야만 한다. 늙어감은 기대감이 사그라드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문득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마지막 페이지에 나왔던 문장이 떠오른다.


["시몽, 시몽." 그런 다음 그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렇게 덧붙였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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