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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팅 클럽

ㅡ글쓰기 모임을 결성하면 안 되는 이유

by 지얼



강영숙 작가의 <라이팅 클럽>에 이런 얘기가 있다.


[글을 쓰겠다는 열망 품게 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환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 일 외에 다른 일에서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임신 초기의 울렁증처럼 평생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거기서 정도가 심해지면 바보가 된다.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그저 병을 앓는다.]


환자가 되어버리거나 정신줄을 놓아버릴 정도는 아니지만, 가끔 미친 듯이 글을 쓰고 싶어질 때가 있다.

문제는 그게 막연하다는 거다.

마치 딱히 사랑하는 연인도 없으면서 무작정 연애하고 싶다는 감정에 빠지는 것처럼, 딱히 쓸 소재도 없으면서 그냥 무작정 쓰고 싶어 진다.

그럴 때는 소재를 찾아 나의 과거지사를 뒤적여 본다.

대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생각이 나도 별 볼일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쓸 게 없다.

욕망은 여전한데 말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글을 쓰겠다는 열망에 반비례하게도 자신의 일과 관련된 소재가 떠오르지 않을 때, 사람은 굳이 뻥이라도 쳐서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욕망을 충족하려 드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소위 '작가'가 되는 건 아닐까?

[사진이 무언가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허구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하더라도 재구성하여 표현한다는 것은 결국 허구적인 것이 아닐까? 사건의 단순한 보고에 만족한다면 덜 허구적이겠지만, 자세히 표현하고자 하면 할수록 허구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야기 속에 허구를 많이 집어넣으면 넣을수록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더욱 흥미로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단순히 보고되는 사실보다는 허구적 서술에 보다 쉽게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에 대한 욕망이 생기는 게 아닐까?

-페터 한트케, <소망 없는 불행>중에서]




강영숙 작가의 <라이팅 클럽>을 재독 하다가

문득 생각난 바가 있어서 <당근> 앱을 열어 검색해 보았다.


글쓰기 모임


단 한 군데도 없다...

독서 모임은 부지기수로 많은데 글쓰기 모임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이해가 안 될 바는 아니다. 원래 창작보다는 소비가 더 수월한 법이니까.

좀 쪽팔린 얘기이지만, 뇌경색 발병 이후 할 일은 없고(손가락 고장으로 기타도 못 쳤다) 시간은 남아돌았던지라 큰맘 먹고 호러소설을 쓴 적이 있다. 한 120페이지 정도?

그때 깨달았다.

사건을 벌이는 건 고심하면 아예 안 될 바도 아니다. 하지만 수습은 어렵다. 고로 소설은 완결되지 못한다.

이런 내가 글쓰기 모임이라니.

아니지,

페이스북에 잡글 쓰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면 못할 바도 아니지 않을까?


라이팅 클럽을 결성해 볼까 잠시 생각해 본다.

그러다가 문득, 대딩시절의 과거지사가 떠오른다.

호프집에서 클래식기타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를 하던 날이었다. 2학년인 후배 상명(가명)이가 취기가 오른 채로 신입생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하고 있었다.


야, 동아리 활동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냐?

기타를 잘 치는 거?

연주회를 잘 치르는 거?

그런 게 아니야

동아리 활동에서 제일 중요한 건 바로 인간관계야

생각해 봐

사람이 먼저지 기타가 먼저겠냐?


나는 순간 그에게 데일 카네기가 빙의한 줄 알았다. 며칠 후에 나는 신입생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재교육을 시행함으로써 상명의 견해를 마구 짓밟아버렸다.


인간관계?

좋지.

근데 그게 가장 중요한 거라고?

아니, 그건 걍 기본 아니냐?

인간관계가 가장 중요하면 사교모임 같은 데나 가입하지 뭐 하러 기타 동아리에 들어왔냐?

연극 동아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극을 잘하는 거고

문학 동아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을 잘 쓰는 것이며

기타 동아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타를 잘 치는 것이야

알겠냐?


언젠가 한 어르신께서는 교회를 일러 '연애당'이라고 칭하신 적이 있다. 남녀공학이 사실상 부재했던 당시에 남녀가 조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공공의 장소가 교회였기 때문이었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당시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교회만큼 본말전도의 장이 펼쳐진 곳이 또 있었을까? 나 역시 첫사랑 그녀를 교회에서.... 오, 주여.


신이시여, 제게 왜 이런 시련을...



라이팅 클럽 <막지음>을 결성해 보려다가 관두기로 한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아무래도 글쓰기 모임을 빌미로 본말전도의 장이 펼쳐질 것만 같다. 어느 날 내가 신입부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일장연설을 절대 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글을 잘 쓰는 것보다는

사람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식구(食口)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먹을 식, 입 구 자를 쓰죠

그만큼 친근함 도모를 위해서는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태백도, 두보도 술이 없었으면 시를 짓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글쓰기 따위는 집어치우고)

한 잔 하러 가십시다


그 회식이 잦아질수록 관계는 더욱 화기애애해지겠지.

그리고 친해질수록 관계의 벽이 점차 낮아질 거고... 그러다가 언젠가 방송출연을 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안녕하십니까

아홉 시 뉴스입니다

강원도 XX에 사는 박 모 씨가 자신이 조직한 글쓰기 동아리 모임에서 술에 취한 정 모 씨를......


기자 : 왜 그러셨습니까?

나 : (음성변조의 목소리로)아... 제가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다만 제가 좀 많이 취했었거든요? 근데 자꾸 정 씨 아줌마가 옆에서....

이에 경찰은 박 모 씨를 형법 제 289조에 의거하여.....]




사족 :

나,

절대로,

그런 사람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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