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J.S.Bach

ㅡ음악의 아버지

by 지얼



1988년에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솔로 곡인 샤콘느(Chaconne BWV1004)를 처음 들은 이후로 아직까지 이 음악은 최애 음악이다. 12음을 고르게, 그리고 아름답게 배치해서 그런지 이 음악은 질리지도 않는다.

모든 변주들 중에서 마치 회상하는 듯한 정서의 메이저 부분이 제일 슬프다. 메이저 부분의 아르페지오가 끝나고 다시 나오는 마이너 부분의 정서는 회한으로 가득한 것 같아 마음이 뭉클해진다.

끝나기 직전의 아르페지오와 스케일은 마치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마지막으로 발화하는 느낌처럼 강렬하다.


이런 곡을 바흐는 300년 전에 썼다. 모든 예술에 신성을 거부하는 나이지만, 이 음악만큼은 신이 바흐의 손과 귀를 빌어 쓴 음악적 성경이라는 망상도 든다.


https://youtu.be/ai8NiHI1-eo?si=yZAuRZ8MwGGGzAXo

템포를 절제한 좋은 연주



힐러리 한의 Chaconne 연주를 듣다가 드는 여러 가지 생각들.


1.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바흐의 음악은 쉼이 없는 무궁동의 진행이 많다. 클래식음악의 입문으로는 절대로 추천할 수 없을 스타일이다.


2. 영화 <매트릭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길을 가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

ㅡ바흐의 음악을 들으면 문득 재즈와도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음악 형식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감상과 실연의 차원에서 그렇다는 점이다. 재즈음악을 일부분이라도 카피를 해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냥 들을 때는 그저 담을 넘어가는 구렁이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실제로 연주해 보면 해당 화성에서 벗어나는 음들로 인한 절묘함을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된다.

바흐의 음악도 그럴 때가 많다. 듣고 아는 것보다는 연주로 직접 경험해 보면 더 빨리 바흐의 진가를 느낄 수 있다. 심지어 난해해 보이는 푸가마저도.


3. 무궁동의 바흐 음악에서 캐치해야 할 포인트는 단선율의 흐름 안에서 시차를 두고 발생하는 대위법의 절묘함이다. 다성, 혹은 복음에서가 아니라 단선율에서의 시차를 이용한 대위법이라니!

심지어는 아르페지오마저 시차를 두고 대선율을 배치하기도 한다. 바흐는 수학이다.


4. 바흐는 조성을 넘나들면서 12음을 골고루 잘 배치하여 쓰는데 그 흐름이 정말 유려하다. 바흐라면 아마 표절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거다.


5. 바흐는 이 시대에 이미 메이저 7th코드를 즐겨 썼는데 7도 음과 8도음의 단 2도 불협마저도 적절하게 구사한다. 게다가 팝음악에서 효과가 좋은 보속음(페달포인트)도 이 시대에 이미 즐겨 사용했다.


6. 한마디로 '음악의 아버지'인 이유가 있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모르는 그의 음악을 들으면 때로는 수면에 이를 때가 있다.


8. 바흐는 생전에 1000곡 이상을 썼다. 교회에 예속되어서 가능했던 걸까, 아니면 100% 풍부한 영감과 음악적 계산에 기인한 왕성한 창작에의 의지 때문이었을까?


9. 바흐를 만나게 되면 이렇게 묻고 싶다.

"교회에 소속되어 예배 음악을 매주 만들어야 했는데, 가끔은 '아, 지겹다.… 이번 주는 대충 하자'라고 생각한 적 있다, 없다?"


10. 그의 푸가나 크랩캐논을 들으면 음악의 원천이 단순히(?) 신이 내린 영감만은 아니라 지극히 지적인, 고도의 계산ㅡ퍼즐게임이라는 생각이 든다(바로 아래의 영상 참조). 음악은 때론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쓴다.


https://youtu.be/xUHQ2ybTejU?si=Pw8maV3Q7pumbg2E

음악은 이성의 산물이기도 하다




사족 :

학창 시절에 바흐의 관현악 조곡 3번 중 Air를 이른바 'G선상의 아리아'버전으로 처음 들었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바이올린이 현을 긁으며 흐느낄 때 머릿속에서는 어느 가을날의 풍경이 펼쳐지는 공감각적 경험이었다.



https://youtu.be/CvglW3KNSsQ?si=6G892-mAPB-j0otW

첼로 연주로 듣는 Aria....


keyword
작가의 이전글라이팅 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