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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ㅡ소설과 음악

by 지얼
스크린샷 2024-12-25 오후 3.09.58.png 이 소설, 강추!



거리엔 괜찮은 사람 많은데

소개를 받으러 나간 자리엔

어디서 이런 여자들만 나오는 거야


015B의 90년대 초반 히트곡 <신인류의 사랑> 노래 가사 중 일부이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강의실 복도이든 카페든 어디에서든 담배를 뻑뻑 피워댈 수 있었던 그 아름다운 시절을 뒤로하고 이제는 흡연자들이 잠재적 경범죄자로 취급받아 게토화 되기에 이르는 이 암울한 시대에 저 노랫말을 생각해 본다. 작금에 저런 노랫말을 쓰면 PC주의자(?)들이나 페미니스트들에게 다구리를 당하지 않을까?


예쁘니까 착할 거야


예전에 한 여자 동기가 한 말이다. 예쁘니까 착하다... 문득 <기생충>의 대사가 생각난다. 부자들은 착하다고 했나?

예쁘니까 착하다는 말은 요즘처럼 '얼굴이 착하다'거나 '몸매가 착하다'는 따위의 뜻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예쁜 여자들이 착하다는 뜻이다. 콩쥐는 미녀, 팥쥐는 추녀, 뭐 이런 거다. 미와 선의 자웅동체랄까(그러고 보니 한 때 미선이라는 여자와....).


잘 생기거나 예쁜 사람을 추구하는 건 우월한 2세를 얻기 위한, 유전자에 각인된 무의식적 추동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치자. 그렇다고 인간이 언제나 진화심리학적 팩트로 모든 차별적 언사와 태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자연주의의 오류.

누군가에게 들은 얘기이다. 학우들과 함께 차를 타고 학교 정문 쪽으로 가고 있는데, 저 앞에 고도 비만의 한 여성이 걸어가고 있더란다. 차가 그녀 옆을 지나갈 즈음에 동승한 남학생 한 명이 창문을 열고 이렇게 소리쳤단다.

"야, 이 돼지야! 살 좀 빼!"


박민규 작가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젊은 날의 나 같은 인간의 뼈를 때리는 소설이다. 아니, '젊은 날의'는 빼도록 하자. 그냥 나 같은 인간. 누가 소개팅 해준다고 하면 먼저 "예쁘냐?"하고 묻는.

모든 글에 장원영이 빠지지 않는.

괴테 쌤이 말했단다. 늙음이란 미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거라고.

대체 나는 언제쯤 진정으로 늙게 될 것인가?


이 소설은 재밌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와 같은 열린 결말도 좋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박민규 작가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더 재미있다.

<죽은 왕녀...>나 <삼미슈퍼스타즈의...>나, 소재만 다를 뿐 결국 같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비교우위로 줄 세우기 하는 세상에서 탈주하자는.



https://youtu.be/zy8yvnrgjRg?si=gKdhPlWLgi8JPfOI


사족 :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봄날에 딱 어울리는 음악이다.

'봄의 환'이랄까.

피아니스트 랑랑의 말마따나 현실과 꿈 사이의 몽환 같은 것.

드뷔시는 인상주의라는 말을 아주 싫어했다지만, 색채와 경계선이 뚜렷하지 않은 모네의 <해돋이>나 <루앙 대성당> 그림을 보면 이들의 음악에 인상주의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참으로 적절해 보인다.


화음에서 내성의 단 2도 부딪힘은 묘한 정서를 일으킨다. 내용상으로는 모든 음정 가운데 가장 불협인 것임에도, 적절히 사용하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몽환을 불러일으키는데... 뭐랄까, 그리운 과거 어느 시점의 풍경처럼 색채와 형체가 모호한 기억과 같은 몽환이랄까.

예컨대,

C코드=도미솔

C7코드=도미솔시b

C9코드=도미솔시b레

C9(13)코드=도미솔시b레라

라고 했을 때,

라벨은 예를 들자면, C9(13) 코드에서, b7음인 '시b'음과 13음인 '라'음을 내성에 배치함으로써 단 2도 음정의 부딪힘을 야기하는데 이게 참,


황홀하다....


음악적 마약이랄까. 단 2도 음정으로 인해 부대껴야 하는 화음이 햇살을 받은 물결처럼 반짝인다.

안타까운 것은 이것을 기타 한 대로는 구현하지 못한다는 거다.

예전에 가브리엘 포레의 <꿈을 꾼 후에>를 기타 독주로 편곡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한 적이 있다. 그때 깨달았다. 19세기 후반에 기타가 쇠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교본에서 읽은 바대로, 기타 한 대가 19세기 후반의 복잡한 화성을 구현하기에는 무리였던 것.

당시 기타리스트들이 현대의 핑거스타일 음악에서 구사하는 무지막지한 변칙튜닝을 알았더라면 상황은 좀 달라졌을까?


스크린샷 2024-12-26 오전 5.07.23.png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 대한 모순형용적인 한 줄 평은 이렇다.


ㅡ과거를 소환하는 모던한 감성


내성의 단 2도 음정, 부분 부분 들려오는 5 음계, 그리고 도리안 선법의 결합이 이러한 감성을 이끌어내는 듯하다. 음악적 천재만이 만들 수 있는 곡이 아닐까.

이 음악만 들으면 무의지적으로 소환되는 꿈 같은 과거 때문에 마음이 촉촉해진다.

라벨은 천재다.


다음 생이란 것이 있다면 기타 말고 피아노를 치자.


스크린샷 2024-12-26 오전 5.08.58.png



https://youtu.be/6_j1Hsbcrj0?si=8X1Iq14bFxI0h6Wx

랑랑, 표현의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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