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2015년 2월 2일 일기
후배 K군과 길을 가는데 어여쁜 처자 두 명이 지나간다.
"예쁘지 않냐?"
내 물음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쌍둥이 아닌가요?"
우리 둘 다 웃었다.
그 처자들을 비웃을 자격은 없다. 못생긴 여자를 희화하는 걸 주 소재로 삼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면서 덩달아 웃는 나 같은 남자들이 성형 붐의 주범이 아닌가.
다만 이런 생각은 든다. 성형수술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지나치게 스탠더드 한 미모를 추구하는 건 좀 말리고 싶다. 외모에 대한 완벽주의가 개성을 말살하는 것뿐만 아니라 외려 미감을 해치니까 말이다.
에드거 앨런 포우의 공포소설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리지아(또는 '라이지아'라고도 번역)'라는 이름을 가진 아내에 대한 어느 팔불출... 아니, 애처가의 자부심이다.
… 얼굴의 아름다움에 관해서라면 그녀보다 뛰어난 아가씨는 없었다. 그것은 마치 아편이 취해 꾸는 꿈속의 빛줄기 같은 반짝임ㅡ델로스 아가씨들의 꿈꾸는 영혼 속을 오가는 환상보다도 더욱 아련하고 신비하여 영혼까지도 숭고해질 것만 같은 용모였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잘못된 숭배를 가르치는 이교도들의 예술작품처럼 전체적인 균형미를 갖추고 있지는 않았다. '최고의 미는 어딘가에 균형을 깨는 기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라고 베이컨이 미의 모든 형태와 장르에 대해서 아주 적절한 표현을 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미는 전형적인 균형미와는 다른 것이었다.
ㅡ에드거 앨런 포우 <리지아> 중에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어떤 그림이 생각난다. 소실점(실제로는 평행하는 직선을 투시도상에서 멀리 연장했을 때 하나로 만나는 점)을 향하는 선분들로 원근법을 시도하여 어느 실내의 정경을 그린 그림이다. 그 그림 안의 사물들은 원근법의 선분 안에서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데, 단 하나의 의자만이 실내의 정리 정돈을 조롱하듯 삐딱하게 놓여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이 비뚤어진 의자 때문에 생명력을 지닌다. '최고의 미는 어딘가에 균형을 깨는 기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
외모에 대한 완벽주의에의 추구는, 이 원근법의 그림에서 의자를 치우는 것과 같다. 고소영의 코에서 점 빼기, 즉 개성의 말살이다.
성형수술의 과도한 유행이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현상도 있다. 외모에 대한 완벽주의에의 추구로 탄생한 몰개성화된 '예쁜' 얼굴들이 넘치면 넘칠수록, 그다지 예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개성이 있는 '자연산'의 얼굴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거다. 어쩌면 김태희의 얼굴을 보고 예쁘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다소 변태적이 미감을 가지고 있는 나 같은 인간만 그리 느끼는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사족 :
'늙음, 그것은 외모의 세계로부터 천천히 후퇴하는 것이다.'라고 괴테는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이 말이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못생겨진다는 단순한 의미는 아니라고 본다. 나이를 먹어 이성의 외모에 초연해질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 남자의 경우 수지 보기를 돌 같이… 아니, 수지 보기를 '그냥 사람' 같이 할 때 비로소 사람 노릇을 하게 되는 거다……
……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기실 외모의 세계로부터 후퇴한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미감을 상실한다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얘기는 아닐는지. 그러니까 '외모의 세계로부터의 후퇴'가 아니라, 무색무취의 무감(無感)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것.
잎은 많아도 뿌리는 하나입니다.
내 청춘의 거짓 많던 시절에는
태양 아래에서 잎과 꽃을 흔들었건만
이제는 나도 진실 속에 시들어 갑니다.
ㅡ W.B. Yeats,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온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