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반에 제목의 인상 때문에 읽게 된 소설이 있다. 카슨 매컬러스의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The heart is a lonely hunter)>이다.
주인공은 존 싱어라는 이름의 청각장애 벙어리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와서 삶의 고충과 외로움을 털어놓는다. 그러는 이유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벙어리인 존 싱어는 마을 사람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고충을 떠벌이고 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타인의 얘기를 들어준다는 것, 또는 공감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다. 존 싱어에게는 타인들의 삶의 고충이나 외로움을 해결할 능력까지는 없다. 다만 그는 그들의 얘기를 (청각 장애인이라 들어줄 수 없기에) '마음으로' 들어줄 뿐이다.
어쩌면 이 소설은 경청이나 공감 이전에 청각 장애인에게나마 호소할 수밖에 없는 각자의 고독감의 무게에 관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더 적확할 것 같다.
지인 분을 통해 알게 된 어떤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그분의 친구분들과 대략 대여섯 시간의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이로써 5일 연속 음주다. 이 기간 동안 혼술은 단 한 번도 없다.
밤이 깊어지고, 나는 의도하지 않게 별 효용이 없는 리스너가 된다. 존 싱어가 된 거다.
나 또한 때로는 이 분들의 얘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청각장애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 분들이 과음을 했기 때문이다.
동가식서가숙 생활을 2~3개월간 하면서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 극빈층의 절대 빈곤의 처지가 아닌 한, 보유 재산이나 안락함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누구나 대체로 삶은 권태롭거나 외로우며, 나름대로 버겁다는 것.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양아치 황정민이 그랬다. "삶은 고통이야... 몰랐어?"
어떤 철학자는 삶의 근본 조건을 '불안'으로 파악한다. 사실 불안은 생존이라는 (진화심리학적) 진화에서 비롯된 필연이란다. 고로 우리의 삶은 둑카(Dukkha : 슬픔, 번민, 불만족, 고통, 절망 등의 의미)라는 바다 위의 난파선처럼 위태하다.
때로는 나도 그들의 고통이나 외로움, 혹은 불안을 들어주는 존 싱어 같은 존재가 된다. 나는 법륜스님도 아닌, 단지 저들과 똑같이 외롭고 불안한 존재일 뿐임에도. 상관없다. 어차피 나는 존 싱어와 하등 다를 바가 없을 테니까. 들어도 제대로 들을 수 없고, 그나마 들은 것은 어느 선에서는 발설하지 않을 테니까.
소설 속 존 싱어는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벙어리인 절친 안토나폴로스가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벙어리 리스너였던 존 싱어에게는 외로움과 고충을 토로하고 공감 받을 대상이 없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모든 사실을 입 밖에 내어 얘기하다 보면 풀릴 것 같았다. 블라운트는 귀머거리 주변을 어슬렁대다가 그를 골라서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하려 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이 끓어올라 독이 되기 전에 누군가에게 던져버려야 하니까. 그래야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