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분 33초

ㅡ나는 예술적 보수주의자일까?

by 지얼


언젠가 많은 청중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다.
연주곡목은 <4분 33초>.


https://youtu.be/JTEFKFiXSx4?si=gaQDtH43EjsZssjU

내가 유일하게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 곡.



존 케이지의〈4분 33초〉는 세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고, 각 악장의 악보에는 음표나 쉼표 없이 TACET(연주하지 말고 쉬어라)라는 악상만이 쓰여 있다. 악보에는 음악의 길이에 대한 지시가 따로 없다. 처음 연주했을 때에는 시간을 무작위로 결정하여 1악장을 33초, 2악장을 2분 40초, 3악장을 1분 20초씩 연주하였다.

〈4분 33초〉는 1952년 8월 29일 뉴욕주 우드스탁에서 David Tudor의 연주로 초연됐다. 연주자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몇 분 뒤 그는 뚜껑을 다시 닫았다. 피아니스트는 뚜껑을 열었다가 다시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Richard Kostelanetz는 실험음악의 권위를 가진 연주자 David Tudor라면 청중들이 우연히 소리를 내도록 유도하는 것이 비음악적인 소리로 작품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 존 케이지의 음악에 부합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연주자와 청중이 소리를 죽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콘서트 홀에는 소리가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아직도 음악의 정의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진다.

ㅡ위키백과에서



꿈보다 해몽인 건지, 이 음악에 대한 견해도 참 다양하다. 어떤 이는 무음(無音)의 음을 듣는 역설을 강조하고, 또 어떤 이는 악음을 벗어난 소음(기침소리, 웅성거리는 소리 등)에서 음악에 대한 편견을 넘어선 인식의 확장을 확인하고, 또 어떤 이는 주역(周易)까지 들먹이면서 '도가의 사상체계에서 보면 무음은 소리의 소멸 상태임과 동시에 모든 소리의 근원이며… 어쩌고저쩌고.'


현대의 언어철학자들이라면 혹시 이러지는 않을까?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음악의 인식적 확장에 기여한 것일까? 이건 난센스(nonsense)다. 그는 단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음악'이라고 칭하는 것의 범위를 자의적으로 파기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음악이라고는 칭하지 않는 것을 음악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우기는 것일 뿐이다. 즉, 그가 한 일은 단지 음악이라는 낱말의 외연을 자의적으로 확장한 것에 불과하거나, 언어규칙(특정 낱말의 공유된 의미)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


혹자는 '있음'의 효용은 '없음'으로부터 나온다는 노자의 얘기를 들먹이면서 위의 음악을 해석할지도 모르겠다.

노자(老子) 가라사대,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으로 인해 그릇의 쓸모가 생겨난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에 아무것도 없음으로 인해 방의 쓸모가 생겨난다. 그러므로 유(有)는 이로움을 위한 것이지만 무(無)는 쓸모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역설적 의미로 '무음(無音)의 유음(有音)'을 강조한 의미라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할 수도 있다.


집을 구하러 온 존 케이지에게 어떤 집주인이 건물조차 세워지지 않은 공터를 보여주며, "집의 쓸모는 (가운데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인해 생기는 법이지요. 이 텅 빈 공간도 집이므로, 당신에게 세를 놓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존은 정색을 하며 "난 집을 구하러 여기에 왔지, 공터 따위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집주인이 응수하기를,
"난 음악을 감상하러 음악회에 갔지, 정적 따위를 감상하러 간 것은 아니라오."


빈 곳(공간)이 유용하다고 해서 빈 곳 자체를 집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처럼, 음악에서 쉼표가 유용하다고 해서 무음(無音) 자체를 음악이라고 명명할 수는 없다. 물론 '공터 역시 건물이다'라고 생각하는 건 개인의 자유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터 역시 일반적인 건물과 마찬가지로 '건물'이라고 명칭해야 한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내가 텅 빈 공터를 건축물이라고 생각하여 주거용 주택의 용도로 세를 놓을 수는 없는 것처럼, 무음 일색을 음악이라고 생각하여 연주회장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건 난센스(nonsense)이다……라고 <4분 33초>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주장하지 않을까?


뭐, 물론 예술가가 똥을 캔에 담은 후 예술품이라고 우기면 그냥 예술이 되기는 한다. 그들은 이렇게 응수할 테다. "난센스야 말로 우리의 사명이다."
예술의 범위를 한정하는 건 자유로운 예술가가 할 일이 못 된다는 거다. 다만 이 경우 예술가가 하는 일은 새로운 예술을 창조했다기보다는 '예술'이라는 낱말의 쓰임을 자의적으로 확장한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하기는… 어차피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정의가 불가능한 신기루다. '이거다!'하고 움켜쥐는 순간 미끄러져 빠져나가며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 버리는 그 무엇.


그런데 <4분 33초>가 의미하는 건 단지 '무음의 음'이라는 역설뿐이었을까? 케이지는 과연 어떤 의도로 작곡(?)을 한 것일까? 혹시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내가 개꿈을 꿔도 해몽가들은 예지몽이라고 해석한다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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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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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 만초니의 작품.
"예술가의 똥. 정량 30그램. 원상태로 보존됨."이라고 쓰여있다.

자신의 똥을 담은 이 작품은 2007년에 8만 달러에 팔렸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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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만초니의 속뜻은 예술의 외연에의 확장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반(反) 예술적 견해는 아니었을까.

"전시회장이 깡통(캔)이라면, 예술은 기실 똥일 뿐이라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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