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력(어느 인생)

ㅡ오직 자연주의의 관점으로

by 지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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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 작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1893)의 <여자의 일생(Une Vie)>.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수도원에서 교육을 마치고 귀향한 주인공 잔은 그녀의 자연친화적인 성향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바다가 인접한 레 푀플의 별장으로 부모님과 함께 이사를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줄리앙 라마르 자작의 구혼에 응하여 결혼하지만, 행복에의 애초의 희망은 줄리앙의 바람기와 냉대로 점차 얼어붙어만 간다. 하녀를 임신하게 한 뒤 수습을 위해 얼마의 땅을 주고 집에서 내보낸 줄리앙은 이후 어느 이웃의 귀족 부인과 정분을 통하게 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부인의 남편에 의해 살해당한다. 한편 오랫동안 지병을 앓고 있었던 어머니도 비슷한 시기에 숨을 거두게 되고, 생전에 어머니가 옛 추억을 더듬듯 되풀이해 읽곤 하던 편지를 발견한 잔은 편지의 진실을 알게 되어 망연자실하게 된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자신과 유일한 아들을 돌보아주던 이모와 아버지가 사망하게 되어 홀로 남게 된 잔은 아들 폴에게 인생의 모든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그러나 인생은 그러한 그녀의 기대를 배반하는데……


이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녀의 인생은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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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일생>의 한 대목을 보자.

"인생이란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닌가 봐요."
남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없는 거야. 얘야. 우린 어떻게 할 수 없단다."


'어떻게 할 수 없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한계, 혹은 결정론을 표현한 말이다. 인간의 삶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삶은 내 의지로 온전히 이끌어갈 수 없는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인 것이라는 얘기다. 결정론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아래 만화의 견해는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헛소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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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김성모 作, <돌아온 럭키짱>중에서


일단 위의 만화부터 까고 보자.

'세상의 관점으로 제 아무리 성공한 인간이나 천하다는 인간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 자체 개개인의 능력은 대충 비슷하다'는 위 견해는, 일단 '성공한 인간'의 대척으로 '천하다는 인간'을 놓았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천하다'의 대척은 '고귀하다'이지, '성공하다'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건 일단 차치하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노력을 좀 더 많이 한 자가 성공한다'는 것인데, 이 얘기를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노력을 안 했거나 아니면 덜 한 사람들'이라는 빤한 얘기일 거다.


사실 이 견해는 겉만 그럴싸하지 사실 허언에 불과하다. 일단 세속이 평가하는 대로 '성공'을 부의 축적 정도에 따라 가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해 보자. 그러면 노력을 더 많이 한 자가 성공한다는 얘기는 수긍할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걸까? 세상에는 열심히 했으나 일이 꼬이고 꼬여서 쫄딱 망해버린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나 구조적 불평등은 차치하고, 다만 이 점은 되묻고 싶다. 어떤 사람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즉 가난하게 살고 있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성공한(부유한) 사람이 성공한 이유가 그의 노력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같은 논리를 적용하여 성공하지 못한(가난한) 사람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그의 부족한 노력 탓이라고 일축하리라. 한마디로 게을러터졌기 때문이라는 거다.


이들 루저들은 대체 '왜' 게을러터졌는가? 노력 여하에 따라 미래의 생활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 자명함에도 왜 그들은 게으른 삶을 살았을까? 그러면 아마도 이런 답변이 돌아오리라. '그들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는 대신 당장 즐거운 대상을 쫓아 오로지 삶을 낭비했기 때문'이라고. 답변이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렇게 되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위너처럼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당장의 쾌락을 주는 대상들만 쫒아 루저가 되었는가?'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답변하리라. '그들 루저들은 인내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이렇게 되묻는다. '왜 그들 루저들은 인내력이 약한가? 그들의 인내력을 약하게 만든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실패의 원인을 노력의 부족으로 단정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은 한정적인 답변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떤 결과에 대한 원인을 깊이 추궁할 의지의 부재로 인한 피상적인 답변으로 결론지으면 일면 후련하기는 하지만 심층적 진실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고대 로마의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동정이란 현재 눈앞에 있는 결과에 대한 정신적 반응이고, 그 결과를 낳은 요인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반면에 관용은 그것을 낳은 요인까지 고려하는 정신적 반응이라는 점에서, 지성과도 완벽하게 공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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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인 것 말고도 인연에 의한 결정론도 고려해야 한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한 대목을 보자.


7년 전 '우연히' 테레사가 살았던 도시의 병원에서 복잡한 뇌병 케이스가 하나 나타났다. 그래서 토마스의 과장(의사) 선생님은 급한 대진 부탁을 받았다. '우연히도' 그때 과장 선생은 좌골신경통을 앓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토마스를 대리로 그곳 지방 병원으로 보냈다. 그 도시에는 다섯 개의 호텔이 있었다. 그런데 토마스는 '우연히도' 테레사가 일하고 있던 곳에서 내렸다. '우연히도' 그에게는 기차가 출발하기 전 다소의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테레사가 '우연히도' 일하는 시간이었고 '우연히도' 그가 앉은 식탁의 시중을 들었다. 따라서, 마치 토마스 자신이 전혀 그녀에게 가려하지 아니한 것처럼, 그를 그녀에게로 밀치기 위해서는 여섯 번의 우연이 필요했다.


어디 여섯 번뿐이었겠는가. 위의 소설에 따르면,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데는 무수한 우연의 발생이 전제되어야 한다. 생각해 보면 한 인간의 성격이나 성향이 결정되는 것에 그 부모의 유전자가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데 그 부모의 만남 또한 우연의 산물이지 않은가? 한 인간이 유별나게 게으르거나 온정적인 것을 유전적인 그 무엇으로 파악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결국 이러한 타자들 간의 우연적 마주침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어떤 유전자(a)와 어떤 유전자(b)가 만나서 결합하여 이러이러한 유전자(a+b)가 생성되었다고 설명해 봤자 최초 만남의 근원적 원인까지 파악할 수는 없다손 치더라도.


이렇게 말하고 보니 어쩐지 게으름이나 불성실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듯이 보인다. "우리 세대의 최대의 발견은, 인간은 정신세계를 바꿈으로써 그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한 철학자도 있다. 자유의지는 가능할까? 잘 모르겠다. 자연주의적 관점에서는 불가항력의 결정론적인 것들, 혹은 우연은 확실히 존재한다(우연과 결정론은 상반되는 듯이 보이지만 기실 같은 매듭, 아니 뫼비우스의 띠로 엮여있다). 따라서 노력 여하에 따라 순위가 정해진다는 건 순진한 발상이다. 재능은 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낙오된 선수들을 모아 '외인구단'을 조직한 후에 무인도에서 생사를 건 지옥 훈련을 시켰더니 100%의 승률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창출했다는 건 만화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라는 가상에서 벗어나 주체의 근원적 타율성을 적합하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해방의 참된 조건"이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 온갖 노력을 경주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성공이라는 열매로 보답받으리라는 자명성 따위는 애초에 없다고 여기는 것이 정신의 해방에 좋다. <청춘의 문>의 작가 이츠키 히로유키가 저서 <타력(他力)>에서 말하고자 한 바도 아마 이런 비슷한 것이리라.

나 혼자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큰 사회적 변동이나 시대의 흐름 앞에서는 거의 무력하다고, 어딘가 몸속 깊은 곳에서 느끼고 있는 듯합니다.

안 되는 건 안 되고, 못하는 건 못한다, 개인의 노력이나 선의도 보답받지 못할 때는 보답받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그런 경우가 많은 게 인간세상이다,라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략)
노력이 보답받는 일 또한 드물게 있습니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분명히 있긴 있습니다. 노력이 헛되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건 이 세상에서 몹시 보기 드문,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기적 같은 사건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닙니다.(…) 노력이 보답받는 경우는 거의 드뭅니다.
(중략)
"내 소관이 아니다."
이 말이 제 머릿속에 항상 메아리치며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하고, '하지만 저절로 꼭 되어야 하는 방향으로 될 것이다'라고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디서부터 인가 불가사의한 안도감이 찾아오는 것을 느낍니다.
(중략)
타력(他力)에 대해 설명할 때 저는 종종 나룻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엔진이 달려 있지 않은 나룻배는 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 상태에서는 달릴 수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산들바람조차 불지 않는다면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룻배 위에서 아무리 애써봤자 헛수고입니다. 타력의 바람이 불지 않으면 사실 우리의 일상도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법입니다.

병과 싸우겠다고 아무리 결의해 봤자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왔을 때 나룻배의 돛을 내리고 앉아서 졸고 있다면 달릴 기회도 놓치게 됩니다. 따라서 바람이 불지 않는 상태가 아무리 계속돼도 꾹 참으며 주의 깊게 바람이 불 낌새를 기다리고, 하늘을 살피고, 또 바람을 기다리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노력을 '자력(自力)'이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의 자력도 필요한 셈입니다. 그러나 최근에서야 겨우 납득할 수 있게 되었는데, 바로 그 '자력'으로 보이는 노력도 사실은 '타력'이 작용한 게 아닐까요.

바람이 없어도 굴하지 않고 가만히 바람을 기다리며 언제라도 바람에 대응하는 긴장감, 그 노력을 사공에게 부여하고 '언젠가 바람은 불어온다'라는 강한 신념을 지속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타력'의 작용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 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마음이 절로 들게 하는 불가사의한 힘, 그것이 바로 '타력'의 작용의 본질인 것입니다.
저는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을 '진인사 즉 천명(盡人事卽天命)'이라는 식으로 임의대로 읽고 있습니다. '천명'을 '타력'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필사적으로 최선을 다하자고 결의하고 그것을 완수한다, 그것이야말로 '타력'의 후원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이츠키 히로유키 著, <타력>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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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여자의 일생>으로 돌아가자.

모파상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한 인생(잔느의 인생)의 비참을 과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모파상의 속내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삶이란 지뢰밭 가로질러 건너기다. 만일 네가 운이 좋다면 요행히 무사히 건너편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은 아름답다고 쉽게 말하지 말라. 그것은 주변의 흔하디 흔한 참혹한 상황을 보지 못하는 윤리적 불감증이나, 아니면 근거 없는 낙관주의에 불과하다. 볼테르의 말마따나 '낙관주의란 나쁜데도 불구하고 좋다고 우기는 것'이 아닌가?
대체로 그렇듯이 더럽게 운이 없다면 M16대인지뢰를 밟아 폭사할 것이고, 그보다는 운이 낫다면 M14발목지뢰 정도만 밟아 불구가 되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후자의 경우, 불구에 대한 보상을 너 자신이 아닌 타 존재에게서 구하지 마라. 네가 방패라고 믿은 그것은 어느 순간 부비트랩으로 변모할는지도 모른다. C`est la Vie.



지금의 중학생, 고등학생에게 '인생은 기쁨과 희망에 가득 차 있다'라고 해봤자 아마 전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인생은 스스로 내던질 만큼 지독하진 않아'라고 하는 게 그나마 와닿을지도 모릅니다.
(중략)

이 세상은 새가 울고 꽃이 피는 낙원이 아니라 괴로움과 절망, 좌절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울면서 태어납니다.
'모든 것에 기대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각오를 굳히는 게 좋을 것입니다. 만일 그때 의외의 소통이나 공감과 조우하게 된다면 그것은 기적적인 일이라 여기고 감격하면 됩니다.

-이츠키 히로유키 著, <타력>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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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Guy de Maupassant(1850~1893)



소설 <여자의 일생>은 주인공 잔의 여종인 로잘리의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난다.

"인생이란 보시다시피 그렇게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가 봅니다."

로잘리가 이런 얘기를 한 맥락은 대충 이렇다. 믿었던 남편과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한 비탄에 위안이 되어주었던 아버지와 이모가 사망하자, 잔은 유일한 혈육인 자신의 아들 폴에게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폴은 그런 기대를 외면하고 잔의 남은 재산을 조금씩 갉아먹는 소위 '빈대'로 전락한다. 결국 무리한 욕심에 빚더미에 올라앉는 신세가 되고, 더불어 폴과 여생을 함께 하려는 잔의 소박한 바람마저 무위가 되고 만다. 폴은 어머니에게 양육을 부탁드린다는 편지와 함께 자신의 어린 자식을 잔에게 맡긴다. '인생이란 그렇게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는 여종 로잘리의 말은 손주를 품에 안으며 사랑스럽다는 듯이 키스를 퍼붓는 잔을 향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모파상의 의지를 찾는 것도 가능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가당찮은 얘기라고 생각한다. 인생에 대한 관점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 아이가 나중에 자라서 기대에 완전히 어긋날 가능성은 항시 존재한다. 물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어찌 될지는 현시점에 전혀 알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인생이란 그렇게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는 말이 일종의 판단 보류를 선언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왠지 나는 이 대목이 모파상이 어물쩍거린다는 생각이 든다. 온갖 비참을 겪은 잔느의 삶에 대한 독자의 연민을 보듬기 위한 작가의 정신 승리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달까. 새옹지마의 불확실한 삶 앞에서 최소한 마음만은 다독일 수 있으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아들에 이어 손주에게까지 행복을 바깥 혹은 타자에게서 찾으려는 한, 잔은 끝없이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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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들 폴의 비행이나 배덕은 사실 어느 정도 잔에게도 책임이 없지 아니하다. 남편을 잃은 잔의 유일한 잘못이라면 상실감을 보상받기 위해 자식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으로 불리어도 무방할 '무분별하고 맹목적인 애정'을 과도하게 쏟아 폴을 응석받이로 키웠다는 거다. 중학교 교육을 위해 폴을 입학시켜야 한다는 주위의 충고에도 자신의 곁을 떠나게 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격하게 반대한다.


상실감을 보상하기 위한 애정이나 자신의 좌절된 희망이나 이상을 자식에게 투영하는 것에 대해 잔의 아버지는 이렇게 충고한다.

"폴은 곧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된다. 그때엔 너를 원망하게 될 게다. 어머니의 이기주의에 희생이 되어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됐다고 말이다. 어머니의 무분별하고 맹목적인 애정으로 말미암아 이 따위밖에 못 되었다고 따지고 들면 넌 뭐라고 대꾸하겠니?"
이에 대한 잔의 대답.
"여태껏 저는 말할 수 없이 불행했어요. 이 애만이 단 하나의 희망이고 기쁨이었어요. 그런데 이젠 이것마저 빼앗아가려는 것이군요. 전 이 애 없이 혼자서 살아갈 수 없어요."


잔의 증세는 사실 이것보다 더 심각해서 병리적인 집착이라 할 만한 수준의 것이다. 폴의 동거녀에 대한 질투를 보라.

무서운 고통이 잔의 심장을 뒤집어 놓았다.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 바로 그녀의 품에서 자식을 빼앗아간 여자에 대한 미칠듯한 증오가 끓어올랐다.(중략)… 잔은 알지 못하는 그 여자에 대한 적개심으로 차라리 자식을 내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오를 정도였다.


다음은 잔의 치명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구절.


그러한 계집과 자식을 공유하느니 보다 자식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에리히 프롬 식으로 말하자면, '공유'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잔은 폴을 '존재'로서 대한 것이 아니라 '소유'의 대상으로 대한 것처럼 느껴진다. '가질 수 없으면 차라리 그것을 소멸시켜라.' 이것은 욕구 충족이 좌절된 어린아이의 심리 아닌가? 다른 아이의 장난감을 뺏으려다가 무위로 그치자 그것을 부숴버리는 어린이의 심리.
어른도 마찬가지다. 욕망의 대상을 온전히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파괴한다. 변심한 애인을 살해하는 이들이 존재하는가 하면, 욕망의 대상을 파괴할 용기(?)가 없어서 파괴의 표적을 (표면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삼고 자살하는, 경계선 인격 장애의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잔을 단죄하기 이전에 역시 과오의 인과를 캐지 않을 수 없다. 잔의 남편이 바람둥이가 아닌 착실한 자였다면 벼랑에서 굴러 떨어져 죽을 일도 없었을 것이고 잔의 자식에 대한 과도한 집착도 그만큼 심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 근원을 따지려 한다면, 잔의 남편 줄리앙이 그렇게 된 심층적인 원인도 있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런 것들은 잔이 어찌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남편의 바람기를 알고 결혼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잔의 잘못이라면, 남편의 애정에 대한 상실감의 구멍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사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자식이라는 존재로 무리하게 채워 막으려는 데 있을 것이다. 자유의지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면, 그녀는 자식에 대한 병적인 집착으로 나아가기 전에 자신을 제어하는 길을 선택했어야 한다고 추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왜 그녀는 제어하지 못했을까? 제어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것은 일종의 환상은 아닐까?


여성의 사회 참여나 꿈의 실현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던 시대(귀족 여자의 경우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졸업 후 귀족 남자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양육하는 일 말고는 다른 삶의 길이 차단되었던 시대)에 잔이 심리적 충격을 극복할 다른 수단은 대체 무엇이 있었단 말인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잘 기르는 것이 여자의 유일한 의무와 미덕으로 강제되었던 시절에 잔이 위로받을 수단은 그녀의 아들 이외에 또 무엇이 있었을까? 종교마저도 환멸로만 남은 그녀에게.

이렇게 잔의 비극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볼 수도 있을 거다. 그러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해소된 상태에서는 자식에 대한 병리학적 집착이 어느 정도 완화가 될까? 글쎄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건 사회학자가 밝힐 문제다.


종종 TV드라마를 보면서 쓴웃음을 짓곤 하는데 특히 어머니가 아들의 딱히 행실이 바르지 않은 것도 아닌 연인에 대해 못마땅해하며 결혼을 결사반대하는 장면이 나올 때 그렇다. 현대판 '잔'이요, '모렐 부인'이다. 이런 어머니들은 아마도 행복해질 확률보다는 불행해질 확률이 월등하게 높을 것이다. 타 존재를 마리오네트(꼭두각시 인형)처럼 좌지우지함으로써 만족을 얻는 인간은 타인의 손에 가위가 들려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할 무렵부터 점차 불안감이 가중될 터이니.

요컨대 바라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잠재적 실망의 대상도 비례하여 증가한다. 그리고 잠재적인 것들의 상당 부분은 현실태가 되어 우리의 주름살을 늘린다.
위에서 인용한 이츠키 히로유키의 말은 그래서 교훈을 준다.


"모든 것에 기대하지 않는다."





사족 :

위의 서평은 어디까지나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쓴 것이다. 사실 자연주의의 '강한 결정론'적 관점은 많은 비판을 받아온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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