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파기 요망
그레이엄 그린의 단편소설 <The Innocent(한국어 판 제목은 '귀향')>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나'는 연인과 함께 불현듯 고향을 찾는다. 많은 변화를 겪은 마을을 배회하다가 우연히 어린 시절에 다녔던 댄스 학원을 향한다. 첫사랑 그녀를 생각하다가, 그곳 대문의 목조 부분에 나 있는 작은 구멍에 그녀에 대한 애정 표시로 뭔가를 그린 종이를 마치 타임캡슐을 보관하듯 넣어둔 것을 기억해 낸다.
그것을 꺼내어 확인하는 순간, '나'는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란다. 그것은 '외설스러운 나그네가 화장실 벽에다 그려 놓음직한' 일종의 춘화였던 거다.
한 후배의 방에서 발견한 케케묵은(1978년 출판) 수필집 <사랑에 눈 뜰 무렵>. 후배의 아버님께서 보신 책이란다. 더 찾아보니 <백범일지>도 있는데.... 헉! 이건 1964년 출판이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세로 읽기의 경험.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손예진은 읽지도 않을 장서들을 헌책방에서 구입하는 취미가 있다. 의아해하는 김주혁에게 오래된 책에서 나는 향기(냄새라고 해야 하나)가 좋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책에 코를 파묻고 맡아보니 과연 그렇다. 세월의 냄새라고 해야 할까.
종이의 모서리는 쉽게 바스러져 버린다. 세상에 나온 지 겨우(?) 46년밖에 안 되었는데.
신학계의 '역사적 예수'에 관한 논쟁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예수에 대한 전기라 할 복음서는 외경을 제외하고 왜 네 권밖에 없을까? 아니, 그보다는 각 복음서는 왜 이리 분량이 적은 걸까? 복음서 저자(혹은 기자)들이 더 많이 썼다면 역사적 예수에 대한 보다 명료한 그림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을.
분량이 적은 이유에 대해서 학계가 뭐라 하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애초에 구전된 내용이나 Q문서(복음서 저자들이 참고했을 거라 추정되는 가상의 문서)의 분량이 적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저자들이 가난해서가 아닐까?
종이가 없던 당시에 양피지나 파피루스는 가격이 꽤 비쌌을 거다. 고로 길고도 상세하게 쓰기에는 주머니 사정이 좋지 못했던 거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일종의 원시 공산주의 생활 방식을 했다는 기록(사도행전)을 보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종이가 더 일찍 발명되어서 싼 가격에 보급되었다면 아마도 장편소설 분량은 되지 않았을까? 물론 그랬다면 성경은 전해지지 않았을 거다. 세월의 풍화에 종이가 다 바스러져 버렸을 테니.
그럼에도 종이는 최소한 우리네 수명보다는 길다. 이 사실은 일종의 공포다.
사랑에 눈 뜰 무렵ㅡ인터넷이라는 것도 없고 따라서 E-메일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원시시대인 쌍 8년도에ㅡ연애 편지질(?)을 시작했다. 어쩔 것이랴. 양피지가 아닌 종이 위에 수놓아진 미문(?)의 오글거림을.
'상심의 낙엽이 포도 위를 뒹구는 낙조의 어느 가을날에 멀리서 이 편지를 쓴다. 찬바람이 겨울을 재촉하지만, 겨울이 너보다 빨리 다가올 것만 같은 서글픔에.... 주절주절....'
혹은,
'인파가 한껏 물러난 고적한 해변가에서 저 머나먼 수평선보다 멀리 있는 너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편지를 쓴다. 인파로 가득하여도 너의 부재로 인해 텅 빈 바닷가일 뿐인데... 나는 내 고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여기 이곳까지..... 주절주절....'
생각날 때마다 이불을 힘껏 걷어차고 싶어진다.....
가끔은 두렵다. 그녀들 중 무심한 누군가가 책상 서랍 깊은 곳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방치해 둔 나의 창작물들을, 그녀들 측근의 누군가가 우연히 발견하여 오글거리는 문장을 보고 포복절도하게 되는 것이.
이것은 공포다.....
고 기형도 시인은 이별의 심정을 담은 <빈집>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후략)]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
그래, 바로 이런 뜻인 거다. 타인에게 남겨진 흰 종이들은 그 자체로 공포다. 과거의 내 열정과 진지함이 한갓 웃음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수치와 공포. 뭐, 자의적 해석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내게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은 그런 뜻이다.
그나마 양피지에 쓰지 않은 것을 위안 삼아야 할까. 그러니 부디,
그녀들이 무심하지 않았기를. 부디 휴지는 쓰레기통에.
간혹 생각한다. 어떤 형식이든 글 같은 것은 남기지 않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작위적인 과잉 고뇌가 미문의 탈을 쓴, 네다섯 권에 이르는 지난날의 일기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정신적 유치함과 미망으로 가득한 저 글귀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언젠가는.... 머지않은 미래에 나는 저 유아적 단상들을 화형시켜버려야만 한다.
다시 그레이엄 그린의 <귀향>.
소설 말미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 그림의 깊은 천진성을 깨달았다. 그 당시엔 무엇인가 독특하고 아름다운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그리고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 그림이 음란하게 보이게 된 것은 30년의 생애를 보낸 뒤의 일이었던 것이다.'
표절한다.
.... 그러나 나는 그 편지와 일기의 깊은 천진성을 깨달았다. 그 당시엔 무엇인가 간지 나고 아름다운 문장을 쓰고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 편지와 일기가 오글거리게 보이게 된 것은 30년의 생애를 보낸 뒤의 일이었던 것이다.
https://youtu.be/iHzx0ELJKFM?si=LFTpFggxpeSsZ2Yg
1889년 9월 21일(토)
색다른 일기를 쓰고 싶다. 9살 이후 나는 여러 해 동안 일기를 써왔다. 그러나 오늘 그 일기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일기의 내용이 너무 유치하게 느껴졌고 나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ㅡ루시 모드 몽고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