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의 세계

ㅡ결정론

by 지얼



누군가 내게 기타를 배우게 된 계기를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중딩 때 숙명여대 출신의 한 교생 쌤이 교내 합창대회 때 찬조출연으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셨는데 너무나 개 멋있었고, 나도 그분처럼 되고 싶었다."


당시에 교생 쌤이 남자였다면 (남자가 기타 치는 걸 멋있다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기타 따위는 가까이하지도 않았을 테고, 내 인생도 바뀌었겠지.

오늘 점심도 삼양라면 대신 미슐랭 쓰리스타의 요리를 먹을 수도 있었겠지.

'처음처럼' 대신 로마네꽁티를 마셨을 수도 있었겠지.

저녁에는 수지를 쏙 빼닮은 딸에게 목말을 태워주었겠지.

(아님 말고...)

무수한 인연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별의별 무늬로 직조되는 것,

이것이 인생(BGM : ELP의 '쎄라비').


스크린샷 2025-01-03 오후 1.42.57.png <봇치 더 록>



엊그제 술 먹다가 친구에게 한 얘기는 이렇다.

"내가 XX시에서 살게 된 건 (매킨토시 컴퓨터와 아이폰의 창시자인) 애플의 스티브 잡스 때문이다."

근거는 아래와 같다.


1. 대딩 시절, 권 모 씨(일명 음해선생)는 매킨토시 컴퓨터에 푹 빠져있었다.

2. 권 모 씨는 교내 매킨토시 동아리를 결성했다.

3. 그 동아리에서 현재의 부인 님을 만났다.

4. 그런데 부인 님께서는 XX시 출신이었다.

5. 세월이 흘러 권 모 씨는 아이티 업계를 떠나 부인 님의 고향으로 낙향했다.

6. 세월이 조금 더 흘러 나는 친구 따라 강남... 아니, XX시로 낙향했다.

7. 이 모든 게 다 매킨토시를 만든 스티브 잡스 때문이다.


스피노자 쌤은 <에티카>에서 이렇게 썼다.

[정신 안에는 절대적인 의지, 다시 말해서 자유로운 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은 이와 같은, 또는 그와 같은 것을 의지하도록 원인에 의해서 결정되고, 이 원인도 마찬가지로 다른 원인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다시 이 후자도 또 다른 원인에 의해서 결정되어 무한히 나아가게 된다.]


얼라였을 때 내가 신었던 축구화에는 나와 똑같은 축구화를 신은 축구선수가 그려져 있었다. 당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축구선수의 축구화에는 또 같은 신발을 신은 축구선수가 그려져 있을 테고, 또 그 축구선수의 신발에는 역시나 같은 신발을 신은 축구선수가 그려져 있을 테고, 또 그 선수의 신발에도....... 이른바 무한역행.

글타.

무수한 무한역행의 인연으로 작금의 생이 결정되었다.


만일 스티브 잡스의 양아버지가 폭압적인 사람이어서 스티브 잡스에게 의학이나 법학을 강제했다면.... 혹은 온갖 전기제품과 공구들이 갖춰진 창고를 양아버지가 가지고 있지 않아 스티브 잡스가 어린 시절부터 전기제품에 가까이할 수 없었더라면....

스티브 잡스의 친아버지의 아버지(그러니까 스티브의 친할아버지)가 가난하여 아들을 시리아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보낼 수 없는 처지였다면 미국에서 백인 여성을 만나 결혼할 일도 없었을 테고, 그러면 스티브 잡스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고..... 그러면 권 모 씨가 매킨토시 동아리를 만들 일도 없었을 거고..........

................ 내가 XX시에서 살게 될 일도 없었을 거다!


만약, 그 교생쌤이 무언가에 홀려 기타를 배우는 일이 없었더라면..... 숙대가 아닌 이대를 갔더라면.... 우리 학교가 아니라 다른 학교로 교생실습을 갔더라면..... 그전에 교생쌤의 부모님들이 결혼 전에 헤어졌더라면........

.............. 내가 기타를 치게 될 일도 없었을 거다!


이것 이외에도 인연, 혹은 연기(緣起)의 그물망은 무수하다.

이렇게 삶을 통해 결정론을 이해한다.


훗날, 그래미 수상식에서 한국의 한 아티스트가 이렇게 소감을 피력할는지도 모른다. "내가 '올해의 롹 앨범'상을 받게 된 건 어렸을 때 기타를 가르쳐주신 박 모 쌤 덕분입니다."

물론 그에게 다른 인생이 펼쳐질 수도 있다. 예컨대 의대 교수가 된 그는 이렇게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 한때 기타를 너무 배우고 싶었지. 그래서 박 모 쌤에게 레슨을 받았고 기타에 미치게 되었지만 언젠가 그가 점심으로 혼자 라면을 먹는 모습을 보고 '아,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어 그 후 기타 같은 건 때려치우고 공부에 매진하게 되었지. 아,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어떤 식으로든 나는 그에게 영향을 미친 거다. 아, 이 천변만화의 연기의 세계여....


스크린샷 2025-01-03 오후 1.44.48.png <봇치 더 록>


이제 바라는 게 있다면, 나로부터의 영향 따위는 바라지도 않으니 부디 제발 내게 기타를 배우는 초딩 여학생들이 학원에서 세븐틴이나 스트레이키즈의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대신 전기기타 치는 아이리 언니의 영상을 보고 '오.... 개 멋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기타에 열심이었으면 하는 거다.

글타.

여자가 전기기타 치는 건 간지작살이다.

때로는 소심한 성격도 기타를 통해 개선할 수 있다(<봇치더록>을 보라!). 기타가 자존감도 높여줄 수가 있고 긍정적인 마인드의 소유자로 변모시켜 아이리 언니처럼 항상 웃으며 살게 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그대 초딩이들도 언젠가 기타 잘 치는 교생이 되어 찌질한 남자 중딩이에게 인생의 한줄기 빛을 내려줄 수도 있게 되지 않을까. 누군가의 삶에 변곡점으로 남아 오랫동안 기억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제발,


춤 좀 그만 추고 기타 연습 좀 해라....


스크린샷 2025-01-01 오후 7.39.29.png 아이리 언니. 멋있잖아?
스크린샷 2025-01-01 오후 7.41.52.png 이것도 나름 괜찮아





https://youtu.be/YqUQpAkQgJ0?si=0HdhmN8whF4Ix2n8

이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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