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미 죽어있다 2

ㅡ가속의 시간, 상대성의 시간

by 지얼


네덜란드의 한 심리학자가 쓴 <왜 나이 들수록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라는 제목의 매우 흥미로운 책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들을 다루는데, 그중 한 가지만 간략하게 말하자면 대충 이렇다.

젊은 시절은 삶의 다양한 '첫' 경험들과 대면하는 시기이다. 처음 조우하는 학우들, 처음 경험하는 캠핑, 처음 본 바다, 처음으로 맛본 술과 담배, 처음 만져 본 기타, 첫사랑, 첫 키스, 첫 ㅅ....(19 禁)


비교적 다채로운 경험들이 나날에 색채감을 입힌다.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만일 평생을 여행으로 채울 수 있다면 날마다 조우하는 낯선 환경과 상황들은 우리의 대뇌에 다양한 정보들로 축적될 것이고(따라서 하루가 길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고), 삶은 늘 등속으로 흐르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을 글로 기록하게 되면 엄청나게 두꺼운 분량의 책이 나올 것이라고.


하지만 평범한 삶...그것도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이후의 삶은 알다시피 직장에 얽매인 삶이다. 어제와 오늘이 비슷하고 아마 내일도 그러할 것이다. 성경의 <전도서>처럼 말하자면, 해 아래 새로울 것이 전혀 없다. 고로 이것들을 기록해 봤자 1년 365일을 일주일 정도의 삶으로 압축한다 해도 큰 무리가 없다. 그래서 (본서에서 조사한 누군가의) 자서전의 절반 이상 분량이 26세까지의 나날들을 언급하고 있음에 반해, 나이가 들어 갈수록 페이지의 분량이 점차 감소한다는 것.

뭐, 대충 이런 얘기다.





2년 전인가, 오래간만에 찾은 대학의 동아리방에서 오래 전의 입회원서를 찾아보게 되었다. 증명사진 속 모두의 얼굴은 당연히 젊디 젊다. 그것들을 보면서 누군가 진부한 한마디를 토해낸다.

"야, 이거 바로 엊그제 같은데!"

진부함에 대한 반감일까. 나는 참신한(?) 말을 내뱉는다.

"엊그제 같은 그 시기로부터 오늘까지의 시간의 거리만큼 또 시간이 지나간다면....."

잠시 뜸을 들인다.

"그때는 이 자리에 없는 사람도 있겠지."

병풍 뒤에서 향 냄새를 맡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는 것을 다른 관점에서 말하자면, 죽을 날이 그다지 멀지 않았다는 얘기다.

압축되는 시간들, 혹은

압사되는 나날들.

대학생 신입 시절이 엊그제라면, 밥숟갈을 놓게 되는 날은 그저 내일모레일 뿐이 아닌가.

시간은 가속으로 흐르니까.


Memento Mori.


https://youtu.be/WZ0iKKBPhoY?si=G8XbnmognCZZvlwh



어린 시절에 비틀스의 <Yesterday>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와..... 이거 진짜 옛날옛적의 음악이구나!'

작금에 존 메이어의 데뷔 앨범 <Room for squares>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이거 엊그제 즐겨 들었던 음악들인데?'


객관적인 시간 개념으로는 비틀스의 '옛날옛적'이나 존 메이어의 '엊그제'는 비슷한 시간의 길이이다.

어렸던 그 시절, 당시의 시간을 기준으로 비틀스의 음악은 대충 20년 전 음악이었고,

작금의 기준으로 존 메이어의 음악도 대충 20년 전의 음악이었으니.

같은 20년의 경과임에도, '옛날옛적'과 '엊그제'라는 체감상의 시간 차이가 발생한다. 언어 표현의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내 안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있다.

이렇게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는 가설을 증명해 낸다.

시간은 등속이 아닌 가속으로 흐른다.


이 사실은 다소 씁쓸한 인식을 가져온다.

젊은 시절이 엊그제 같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는, 젊은 시절의 '나'와 작금의 '나'는 변한 게 없다는 인식을 거울은 무참하게 깨뜨려 버린다.

얼굴, 그것만큼은 극심한 변화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나는 젊은이의 마인드를 가지고 인지부조화의 늙은이로 살아왔던 건 아니었을까?


학원에서의 일.

"오늘 연습할 곡은 악동뮤지션의 <다리 꼬지 마>야."

덧붙여 말한다.

"악동뮤지션 알지? 그리 오래된 노래는 아니야"

그러자 초딩이 원석(가명) 군이 말한다.

"이거.... 완전 옛날 노래인데요?"

내게는 그리 오래된 게 아닌 것이 원석 군에게는 '완전 옛날'의 것이 된다.

생각해 보니 악동뮤지션이 그 노래를 발표했을 때 원석 군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 같다.

시간은 가속의 페달을 밟음과 동시에 상대적으로 작동한다.


문득 깨닫는다.

밥숟갈 놓을 날도 그리 멀지는 않았다는 걸.

아니, 어쩌면 죽음의 신으로부터 이미 고지를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너는 이미 죽어있다






삶은 찰나의 것

소녀여, 빨리 사랑에 빠져라

그대의 입술이 아직

붉은색으로 빛날 때

그대의 사랑이

아직 식지 않았을 때

내일 일은 아무도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이키루>중에서



https://youtu.be/jhSTEJ89V4M?si=um6ULDiqUmPiscS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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