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슬지 말기

ㅡ눈이 내린다

by 지얼


"저기... 첫눈이 오면..."

승민의 머뭇거리는 말을 자르며 서연이 말한다.

"우리 만날까?"

영화 <건축학개론>의 대사다.

정호승 시인의 시, <첫눈 오는 날 만나자>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그런가 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오래전, 먼 곳(다시 말해 나 아닌, 누군지 모를 개자식)을 바라보고 있는 수지(가명)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ㅡ마음이 정리되면 내게로 와.

ㅡ......

ㅡ기다릴게. 올 가을이 끝날 때까지만...

오랫동안의 기다림에 지친 내게 수지는 분위기 파악 못하고 부러 뜬금포를 날린다.

ㅡ가을이 끝나는 때가 언제인데?

"얼음이 생기는 날..."이라고 답변하려니 영 멋대가리가 없다. 하여 생각해 낸 답변이라는 게,

ㅡ첫눈이 오는 날이야.

이때는 낭만이 있었던 걸까?

작금에는 오글거리는 이불킥의 추억이다.


그날의 잔향 때문인지 첫눈은 음악적으로 말하자면 내게 'fine(피네:끝)'의 이미지다. 혹은 영화 엔딩 크레디트의 하얀 글자들 같은.

황지우 시인은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의 착어(짤막한 평)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기다림은 삶을 녹슬게 한다'라고.

첫눈은 더 이상 녹슬지 말라는 경고다. 네 시퍼런 녹을 하얗게 다 덮어줄 테니 부디 이젠 그만.


K선생과, 후배 영석(가명) 군과 함께 첫눈을 맞으러 학원 밖으로 나온다. 떨어지는 눈 사이로 하얀 담배 연기를 날리며 영석 군이 말한다.

"내 이럴 줄 알았어.... 형들하고 첫눈을 맞게 될 줄 알았어!"

내가 그녀가 아니라서 미안하구나.

그만 좀 녹슬자...


스크린샷 2025-01-05 오후 5.36.29.png 이 수희 작가 님의 작품



첫눈이 왔다는데 흔적이 없다

깊이 잠든 사이 소리없이 내리다

사라진 눈


네가 가는 길을 지우고

낡은 기억을 지우며

그렇게 함박눈 내리면


뽀드득 뽀드득 눈 밟으며

발자국을 남기면

기억의 길을 찾아갈 수 있으려나


첫눈을 만나지 못한 날

텅 빈 그리움의 길을 열며

하늘 가득 쏟아지는 함박눈이

가슴으로 쌓여든다


ㅡ목필균 <첫눈> 전문



스크린샷 2025-01-05 오후 5.26.05.png





첫눈을 여성이 아닌 나와 맞이한, 불쌍한 영석 군이 내게 건의를 한다.

"형한테 화성학 좀 배울까?"

"돈 내라."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알았어. 레슨비 줄게."

"근데 화성학은 뭐 하러 배우려고?"

"뭔가에 집중하면 좋잖아."

"그보다는 차라리 영어 회화를 배우는 게 어떨까?"

"왜?"

"내가 아는 영어학원의 쌤이 예쁘거든."

"어휴…그 여자가 대체 나랑 뭔 상관이야?"

"넌 반 고흐의 그림을 너랑 뭔 상관이 있어서 좋아하는 거냐? 어차피 네 손에 넣을 수도 없는 건데?

"뭔 얘기야?"


이런 애기지.

우리는 매력적인 이성에게는 순수한 관조만으로 만족하려 들지 않는다. 관계상의 기대 충족 여부가 중요하니까. 고로 기대 충족의 불가능성이란 무가치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테스토스테론 호르몬의 낭비랄까.

문학평론가 정여울은 버나드 쇼의 소설 <피그말리온>의 서평에서 이렇게 썼다.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는 누군가의 간절한 기대가 그 기대의 대상을 통해 그대로 실현되는 경향을 말한다.(…)이 피그말리온 효과의 결정적 딜레마는 ‘나의 소원’이 ‘타인의 힘’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즉, 기대는 이쪽에서 하는데 정작 그 기대를 이루어주어야 할 사람은 저쪽인 셈이다.”


<잡아함경>에서 그랬다. 독화살을 두 번 씩이나 처맞지 말라고. '수지'를 봤으면(독화살을 한 번 맞았으면) 반 고흐의 그림을 보듯이 관조의 대상으로만 남겨두어야지, 왜 쓸데없는 기대와 소망을 품는 탓에 두 번째 화살까지 처맞으려는 것이냐고.

타자(他者)는 대개 나의 기대를 배반한다는 사실을 빨리 깨달을수록 인생은 덜 피곤해진다.

신경숙 작가는 <깊은 슬픔>에서 이렇게 썼다.

“너는 너 이외의 다른 것에 닿으려고 하지 말아라. 오로지 너에게로 가는 일에 길을 내렴. 큰길로 못 가면 작은 길로, 그것도 안 되면 그 밑으로 가서 너를 믿고 살거라.”


너의 기대는 네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혹은 스스로 충족시킬 수 있는 것만으로 한정해라. 예컨대 아침에 산책하기, 네 내공의 깊이에 걸맞은 기타 곡 연습하기, 크리스마스 듀엣곡 편곡하기, 길냥이들에게 매일 사료 주기, 떡볶이 요리하기, 비 오는 날 막걸리 마시기, 친구가 사주는 김치볶음밥을 맛있게 먹고 난 후 그 친구의 몫까지 뺏어 먹기, 영화 <서브스턴스>를 재미있게 보기(강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기... 아, 이건 좀 아닌가.... 뭐, 어쨌든.


그리고,

월광보합(80년대 오락실의 모든 게임을 모아놓은 중국산 게임기)의 게임들 중 하나인 <로드러너>를 끝까지 깨기.


그리하여 피그말리온조차 하나의 관조의 대상으로써만 고정시켜 놓을 수 있는 불혹의 내공을 쌓기.

첫눈을 반드시 이성과 맞이해야 한다는 미망에서 벗어나기.

독거의 크리스마스는 비참하다는 편견을 버리기.

그리고 무엇보다,


그만 좀 녹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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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gRfp6jwfg_4?si=SJn0rRS92OIWk0J5

클로드 드뷔시, <눈 위의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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