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나이를 밝힌다는 것
이래의 글은 몇 년 전에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식후연초불로장생'을 실천하러 기타 학원 밖으로 나왔다. 비가 더 오려는지 하늘이 어둡다. 어두운 하늘만 보면 꽤 자주 이 노래가 떠오른다.
검은 구름 하늘을 가리고 이별의 날은 왔도다
알로하오에 알로하오에
꽃 피는 시절에 다시 만나리
전방 10m 지점에서 20대 초반의 어느 처자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어딜 가나 이놈의 인기란....' 뭐, 물론 이런 생각은 절대로 들지 않는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사람은 삭을수록 고개가 숙여지는 법이니까.
"안녕하세요." 환한 웃음을 띠며 젊은 처자가 인사를 건넨다. 인공 수정체를 달고 사는 통에 초점이 맞지 않아 사정거리 밖 인물의 얼굴은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네 걸음 다가가서 누군가 확인해 보았더니 20년 전에 부득이하게 헤어진, 나의 숨겨놓은 딸...... 은 물론 아니고, 인근에 새로 개업한 카페 사장 아주머니의 따님인 나영(가명) 씨다. 저번에 인사차 한 번 들러서 안면을 튼 적이 있다.
"시간이 어떻게 되세요?" 그녀가 묻는다. "저, 시간 무진장 많아요"라거나, "조금 바쁘긴 한데..."하는 따위의 머저리 같은 답변은 날리지 않는다. 그런 나이인 것이다.
"오전 10시부터 밤 9시까지예요."
그녀가 물은 것은 레슨 시간이다.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곁에 있던 카페 사장님도 적극 권장하신다. 훌륭하신 어머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번에 내게 원두를 선물해 주셔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이로서 처자 수강생 제1호가 탄생하였다. 불모지 무인도에 피어날 최초의 꽃.
기재한 수강신청서를 보니 1993년생이다.
"93년생이면...." 산수를 무진장 못하는 내가 머뭇거리자 그녀가 대답한다.
"스물다섯이에요."
내가 말했다.
"흠.... 그럼 저와 몇 살 차이 안 나네요."
그녀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호호...' 하는 웃음소리가 왠지 이렇게 들린다.
헐~~~
두 번 다시 이런 썰렁한 농담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
그로부터 3개월쯤 지났을까. 학원으로 문의 전화가 오래간만에 왔다. 기타 반주법을 배우고 싶단다.
세 시간 후, 그녀가 학원을 방문했다. 기타에 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한 후 회원 가입 신청서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다 쓸 필요는 없고요, 쓰고 싶은 것만 쓰면 돼요. 이름하고 전번은 꼭 써야겠지만."
신청서에 나이를 기재하는 순간 살짝 머뭇거리는 기미가 보인다. 어쩌면 나의 오해일 수도 있다.
"사람이 자신의 나이 듦을 의식하게 되는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내가 물었다. "바로 이런 서류들에 생년월일을 기재하기 싫어질 때예요." 물론 나의 의도는 '아직은 망설일 나이가 아닌데...'였지만 혜승(기명) 씨의 표정에서 대답을 읽는다.
'헐, 그런 얘기를 왜 나한테...'
웃으며 던진 농지거리이긴 해도, 아주 실없는 얘기는 아니다.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여성들의 경우 대략 30대 중후반부터 나이를 명시하는 것을 꺼리는 것 같다.
작성된 학원 등록 신청서를 보니 주소와 이메일 기재란은 비워 놓았고, 성명과 전번 포함, 생년월일은 명시해 놓았다. 이번에도 1993년생이다.
며칠 후.
바로 옆 건물의 카페 사장님이 나를 부르더니, 맥주를 건네며 "근데, 선생님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하고 묻는다. "음......" 약간의 뜸을 들인 후에 숫자상의 나이를 밝힐까, 그냥 생년으로 밝힐까 잠시 생각한다.
"197X생입니다."
나이를 밝히는 것에 대체 뜸을 들일 필요가 뭐가 있을까. 그리고 나이를 묻는 질문에 왜 생년으로 답변하는 걸까. 이 두 가지 지연의 심리에 깔린 정서는 아마도 거리낌일 것이다.
물론 생계와 생존을 위한 은폐에의 의도가 없지 아니하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레슨을 하려면 아무래도 나이는 숨기는 편이 좋다(내 지인 분들 중에서는 그런 이유로 나이를 대폭 하향한 분도 있다). 전공생 이외의 일반 대중의 경우, 한의사와는 정반대로 음악 선생은 젊은 사람을 선호하니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정말 그 이유가 전부일까?
젊음에 대한 심리적 선호가 더 직접적인 이유가 아닐까?
우연히 아래의 노래를 듣게 될 때마다 조용필의 <Q> 노래 가사(아아, 돌아서면 잊으리....)처럼 일종의 반어, 혹은 자기 최면이나 처절한 셀프 위무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어느 날 우연히 거울 속에 비쳐진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세월아 비켜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
나이를 먹게 되면, 소위 '정신 승리'를 해야 할 일이 많아지는 것 같다.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80년대에 이런 가사의 노래도 있었다.
묻지 마세요
내 나이는 묻지 마세요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
내게 기타를 배우는 세 명의 초딩이들이 하라는 연습은 안 하고 잡담을 일삼는 도중, 뭐가 그리 궁금했는지 내 생년을 묻길래 입에 침도 안 바르고 "198X년이야"라고 대답해 주었다.
잠시 각자 계산을 하더니,
"그럼 서른X 살! 맞죠?"라고 말한다.
아무렴. 내가 어떻게 벌써부터 불혹이겠냐.
고무적인 일은 "개뻥", 혹은 "뻥까지 마세요"같은 의혹의 말은 그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다는 거다. 아이들에게는 나이 든 아저씨의 나이를 맞추는 게 어렵기 때문이겠지만, 동안의 힘이라 생각하며 '정신 승리'를 한다.
잠시 주민등록상의 생년을 위조할 방안이 없을까 생각해 본다.
한두 달 전, 단골이 된 카페 <XX>에 친구 S군과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들렀을 때의 일이다.
바리스타 나영 씨와 짧은 대화를 하는 도중, 친구 S군이 뜬금없이 그녀에게 "우리, 몇 살로 보여요?"하고 묻는 다. 아, 진짜.....
별로 궁금해할 것 같지도 않을 그녀에게 S군은 구태여, 쓸데없이, 불필요하게, 무의미하게, 부질없게, 괜스레 셀프 인증을 해버리고 마는 게 아닌가.
"저희, 4X 살이에요."
아예 민증을 까지 그랬냐....
"형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하고 말하려다가 이미 쏟아진 물임을 알고 그만둔다. 그가 이렇게 묻지 않았던가. "'우리' 몇 살로 보여요?"그리고 확인 사살."'저희' 4X 살이에요."
S군에게... 아니, S형님께 바란다. 이런 경우에는 '우리'나 '저희' 같은 운명의 공동체에서 부디 저를 배제해 주시기를.
[(건축 현장에서) "석판!"이라는 외침은 하나의 문장인가, 아니면 낱말인가? (중략)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략적 문장이다.―그렇지만 우리의 생략적 문장은 "나에게 석판을 하나 가져오라!"라는 문장의 단축된 형태일 뿐이다.(중략) 그러나 당신은 어떻게 "석판!"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뜻하는 일을 아는가? 당신은 단축되지 않은 그 문장을 속으로 말하는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19절]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는 도중에 층계참 한가운데에 누군가 싸질러놓은 똥을 발견했다고 치자. 그것을 보고 내가 "똥!"이라고 말했을 때 옆에 있는 한 친구가 "그럼 저게 똥이지 된장이겠냐?"라고 반문한다면 그 친구는 맥락 파악에 실패한 것일 게다. 나의 "똥!"이라는 한마디의 맥락적 의미는 다음과 같을 테니까.
'어떤 개자식이 여기다가 싸질러 놓은 거야?'
철학은 언어 규칙을 오해한 데에서 기인한 거대한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표상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낱말들의 목적이 아니다."
내가 "똥!"이라고 외쳤을 때 이 낱말은 똥의 실물을 가리키거나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똥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라는 얘기일 게다. 여기에는 "대체 누가 이런 데다가 똥을 싸질러 놓았어!" 하는 맥락상의 의미가 포함된 것일 테니까.
일종의 '기호'인 사람들의 웃음소리("하하하" 혹은 "호호호")도 마찬가지일 터. 웃음에도 각각의 상황과 맥락에 따른 숨은 의미가 있다.
어제 W시 소재의 한지테마파크에서 <한지 문화제>가 시작되었다. '코리안 페이퍼'를 전시하고 각종 공연과 장터가 열리는 소규모 축제다. 공원 위쪽에는 젊은이들이 판매대 위에 놓은 저마다의 상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개중에는 헌책을 판매하는 이들도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월든>이나 <모모> 같은 좋은 책들도 눈에 띈다. <키다리 아저씨>를 집어 들고 3,000원의 가격을 치르는데 판매하는 처자들 중 가냘파 보이는 한 처자가 묻지도 않았음에도 이런 얘기를 한다. "저희는 독서 모임에서 나왔어요!"
판매대 위를 바라보니 간략한 독서클럽 가입 희망 원서가 있다. '심심한데 가입이나 해 볼까...'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고개를 들고 그녀들에게 웃으며 물었다.
"가만..... 나 같은 아저씨가 가입하면 불편할 거 아녜요?"
그러자 이 처자들이,
"싫긴요.... 독서 토론에 남녀노소가 어딨나요."
"괜찮아요. 100세 할아버지라도 환영이에요."
"나이 드신 분들이 외려 저희한테 도움이 되는걸요."
라고 말했으면 좋았으련만, 그녀들은 대답 대신,
"호호호..... 호호호....."
"헤헤헤... 헤헤..."
"까르르...."
문제) 위 상황에서 "호호호", "헤헤헤", "까르르"가 의미하는 것은?
1. 대환영이에요!
2. 아저씨는 싫지만, 선생님 같이 멋진 분은 좋아요.
3. 저희는 세대 간 장벽 따윈 없답니다.
4. 알면 됐어요.
정답은 물론.... 2번이지.
비트겐슈타인 형님이 무덤에서 기어 나오더니 내 뒤통수를 한 대 갈긴다.
구매한 <키다리 아저씨>를 펼쳐 본다. '키다리 아저씨'는 가난한 처자의 도우미를 자처한다.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이 있다.
명작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대한 어느 네티즌의 평은 이렇다.
"와... <나의 아저씨>라는 작품, 나이 차 존나 나는(24년) 아재랑 주인공 괴롭히는 젊은 사채업자 새끼 중에 골라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아저씨를 고를 수밖에 없는 거구나. 존나 현실적인 드라마다...."
존재의 가치 측면에서 대한민국의 '아저씨'는 젊은 '사채업자 새끼'에 갈음한다.
아니, 그래도 '아저씨를 고를 수밖에 없다'라고 하니, 아재가 쪼끔은 나은 것일까?
오다기리 조, 아오이 유우 주연의 영화 <오버 더 펜스>에서, 돌싱남이자 40대인 자신을 조롱하는 20대 젊은이들에게 오다기리 조는 이렇게 비장한 일침을 놓는다.
"지금 너네 웃었지? 지금 많이 웃어두는 게 좋을 거야. 곧 웃을 일 따위 없어질 거니까. 금방이야, 금방. 그냥 살아가기만 하게 될 거야. 재미있는 일 하나 없이 단지 일하다 죽을 뿐. 그게 너희의 인생이야."
나는 저렇게 저주하는 대신 이렇게 일깨워 주고 싶다.
-잠시 눈 감아 볼래?
-네? 왜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해봐.
-감았어요.
-계속 그러고 있어.
ㅡ아, 뭐예요, 시발.
-그러고 있다가 눈을 뜨면...
-뜸들이지 말고, 그래서요?
-40대인 너 자신을 보게 될 거야.
-헐. 말도 안 돼. 그러는 아저씨는요?
-나?
잠시 생각한 후에 조용히 말해줄 것이다.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걸
https://youtu.be/OuVIJlSDOs0?si=mlA_Ta7AxntgbWGu
Od man 올드맨
Old man
-Neil Young
Old man look at my life.
I'm a lot like you were.
Old man look at my life.
I'm a lot like you were.
어르신, 제 인생을 보세요.
당신의 인생과 많이 닮아 있어요.
어르신, 제 인생을 보세요.
당신의 인생과 많이 닮아 있어요.
Old man look at my life.
Twenty four
and there's so much more.
Live alone in a paradise
That makes me think of two.
어르신, 제 인생을 보세요.
스믈넷, 아직 창창한 날들이 남아 있죠.
천국 같은 곳에서 홀로 살고 있어요.
그래서 다른 누군가를 그리워하죠.
Love lost, such a cost.
Give me things that don't get lost.
Like a coin that won't get tossed
Rolling home to you.
사랑을 잃고 고통에 빠져 있어요.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뭔가를 제게 주세요.
계속 간직하고 다닐 수 있는
동전같은 것 말이죠.
Old man take a look at my life.
I'm a lot like you.
I need someone to love me
the whole day through.
Ah, one look in my eyes
and you can tell that's true.
어르신, 제 인생을 한번 들여다보세요.
난 당신과 아주 많이 닮았어요.
내겐 하루 종일 날 사랑해 줄
누군가가 필요해요.
내 눈을 들여다보면
내 말이 진실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Lullabies, look in your eyes.
Run around the same old town.
Doesn't mean that much to me
To mean that much to you.
달콤한 자장가, 당신의 눈을 들여다 보네요.
변화가 없는 오래된 동네를 돌아다니죠.
당신에게 내가 중요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굳이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요.
I've been first and last.
Look at how the time goes past.
But I'm all alone at last,
Rolling home to you.
난 성공도 했고, 실패도 경험했어요.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보세요.
결국 난 혼자가 됐어요.
당신에게로 가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