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

ㅡ서러워라, 늙는다는 것은

by 지얼


2017년 4월의 어느 날.

이른 아침, 피곤한 몸을 일으키고 중얼거린다. "염병할 학원장 교육!" 일 년에 한 차례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학원연합회 주관의 교육 행사가 있는 날이다. 투덜거리며 교육장인 XX 예술관으로 향한다.


예술관의 콘서트 홀에 들어서니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중간 즈음에 자리를 잡고 지루한 교육 시간 동안 잠이나 잘까 생각하고 있는데 옆 자리에(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자리 건너 옆 자리에) 나이를 정확하게 짐작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연배는 아닌 어떤 아리따운 처자(사실 처자인지 유부인지 알 길은 없다)가 착석을 한다. 대딩 시절의 여자 후배 N양의 이미지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 나는 그녀의 전번을 알고 있다.


"저기요..." 내가 말을 건다.

"네?"

"혹시 미술학원 선생님이세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직감입니다."

"아, 네..."

"혹시 그쪽 전번 좀 알 수 있을까요?"

"제 전번은 왜요?"

"제가 미술에 관심이 있어서요.... 모네와 세잔을 좋아하거든요."

그리하여 지금 내 전화기에는 그녀의 전번이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낯선 처자에게 전번을 따내는 나의 스킬이 출중한 덕분이....


...... 전혀 아니다. 나는 등 떠밀리지 않는 한 낯선 처자에게 찝쩍거리는 짓거리는 잘 하지 못한다. 고로 위의 내용은 픽션일 뿐, 팩트는 이렇다.


"저기..." 그녀가 내게 말을 건다.

"네?"

"제가 전화기를 잃어버려서 그러는데요... 혹시 전화기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젠틀한 나는 호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낸 다음, 내 전화기의 통화 기능을 모를 수도 있을 그녀를 위해 친절하게 통화 화면까지 열어서 건네준다.

전화를 걸어 가방 깊숙한 곳에서 전화기를 찾은 그녀가 내게 전화기를 돌려준다.

"전화기 찾으셨어요?" 내가 물었다.

"네."

"다행이네요."

그리하여 지금 내 전화기에는 그녀의 전번이 기록되어 있다.

본의 아니게 전번이 '따진' 것이다.


나는 반성한다.


일 년 후.

학원 밖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데 학원 건물 모서리에 시커먼 자동차가 참으로 개념이 없는 주차를 한다. '벽에 더 붙여야 하는데...'하고 생각하고 있는 도중에 차주가 내리더니 나를 보자마자 아는 척을 한다. 누군가 했더니 며칠 전 바로 옆 건물의 카페 사장 아주머니로부터 간단한 소개를 받은, 미모의 XX시 오케스트라 단장님이다.

"기타 배우고 싶은데 친구랑 같이 가면 할인해 주실 거죠?"라고 묻길래 "당연하죠"라고 대답하곤 곧바로 후회한다. 아, 또 싸게 굴었다...

그녀는 잠시 허리를 숙여 차 안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내 전화기가 어디 있지?" 하며 혼잣말을 한다. 타인의 곤란을 모른 척할 수 없어 대뜸 말을 걸었다. "전화기 빌려드릴까요?" 그리하여 이번에는 내 의지로 전번을 따내는 데에 성공.

세대의 장벽 같은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사회의 윤리적 장벽 앞에서 별다른 수작을 부릴 생각은 꿈도 꾸지 않은 채 점심은 뭘로 때울까 고민하는 도중 문득 유부초밥 생각이 났다.

가능하다면, 현실 가능한 전번을 따내고 싶다.


길거리에서 처음 본 여자들에게 전번을 따는 짓거리를 보다 젊었을 때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떠밀려 억지로 하긴 했었다. 친구들이 숫기가 없는 통에 그들보다는 '비교적' 낯짝이 두꺼웠던 내가 그 십자가를 짊어졌던 거다.

승률?


5전 5패


그 당시에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들러붙는, 임시완을 닮은 친구 원형(가명)이가 얼마나 부러웠던가. 그에게는 전번 따는 짓거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전번을 따이는 입장이었으니.

어떤 처자 유튜버가 말한다.

"여러분~여자들은 남자들의 외모를 보지는 않아요."

놀고 자빠졌다.

내가 여자라도 마빡이 정종철보다는 임시완을 선택하겠다.




2024년 여름.

학원의 여학생 초딩이들이 말한다.

"쌤, 스트레이키즈의 리노, 넘 잘생기지 않았어요?"

혹은,

"쌤, 세븐틴의 원우, 짱 잘생겼어요!"

그러면 선생으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얘들아... 얼굴이 전부가 아니야. 인성이 좋아야지 얼굴이 중요하니?"

나도 안다. 하나마나 한 얘기라는 것을.

"그러는 쌤도 뉴진스 하니 좋아하잖아요."

이럴 줄 알았다...

외모지상주의 만세!




다시, 2017년 4월.

교육이 끝나고, 예술관 건물 인근의 주차장 도로에서 그녀와 스쳐 지나간다. 봄 햇살이 그녀의 노랗게 염색한 머리와 선글라스 위로 반짝인다.

찬연한 개화의 시기에 <낙화>를 생각한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름다운 뒤태를 남기며 나는 생각한다.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었었다.


남미 작가 아리아스 수아레스의 단편 <서러워라 늙는다는 것은>을 떠올린다. 20년 만에 고향을 찾은 '나'는 옛 연인이었던 메르세데스와 재회하지만, '나'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메르세데스가 아니라 그녀와 너무나 닮은 딸 로사리오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 나이 차는 죄가 된다고 생각하는 '나'는 로사리오에게 마지막 키스를 하고 그곳을 떠난다.

떠나기 전, '나'는 로사리오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 그런데 로사리오, 보석이니 뭐니 해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값있는 것은 오직 젊음과 아름다움뿐인 것 같아."


봄 햇살에 반짝이는 그녀의 황금빛 머리칼을 떠올리면서 예전에 한 여자 선배님이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해 낸다. 뇌경색 후유증으로 신경이 죽어버려 슬럼프에 빠졌던 시절이었다. "너, 기타 열심히 연습해. 잘하면 젊은 애들하고 썸 탈 수도 있어."

단순한 위로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왠지 롤리타를 사랑하는 험버트 아재가 되어버릴 것만 같다. 게다가 나의 오른손은 죽어버렸고, 무엇보다 '작업' 도구로서의 유용함을 기대하기에는 무리인 나이다.


연습실에 돌아와 늘 그러했던 것처럼 기타를 안고 연습에 돌입한다. 물론 봄날의 햇살과도 같은 '작업'에의 충동 때문이 아니라, 사막의 황사와도 같은 '직업'에의 소명 때문에.

작업을 행하기에는 젊음이 죽어버렸고, 직업을 행하기에는 손의 신경세포가 죽어버렸다.

자존감의 근간이 붕괴된 아재에게 저절로 획득된 전번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인가.

서러워라, 늙는다는 것은.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https://youtu.be/eFjjO_lhf9c?si=oq3Rm76-8CxBSvwL


Summer of `69

-Bryan Adams


I got my first real six-string
난 처음으로 진짜 6줄짜리 기타를 샀어

Bought it at the five and dime
5달러 10센트를 주고 샀지

Played it 'til my fingers bled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연습했지

Was the summer of '69
1969년의 여름일이야


Me and some guys from school
학교의 나와 몇몇 친구들은

Had a band and we tried real hard
밴드에서 진짜 열심히 연습했어

Jimmy quit and Jody got married
지미가 그만두었고 조디는 결혼을 했지

I should've known we'd never get far
난 우리가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Oh, when I look back now
오, 지금 되돌아보니

That summer seemed to last forever
그 여름은 영원한 것 같아

And if I had the choice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Yeah, I'd always wanna be there
물론, 난 그때로 항상 돌아가고 싶지

Those were the best days of my life
그때가 내 인생의 최고의 나날들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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