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긴 삶

ㅡ희미해져도 괜찮아

by 지얼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수치이다."

ㅡ커트 코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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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레슬러>에서, 주인공인 미키 루크는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80년대의 롹음악을 들으며 이렇게 말한다. "롹 음악은 역시 80년대가 최고이지. (90년대의) 커트 코베인이 다 망쳤어."

대본에도 없는 이 대사는 80년대 후반에 빌보드 차트 1위로 데뷔한 롹밴드 Guns & Roses에 대한 간접적인 찬사임과 동시에 (커트 코베인의 밴드인) Nirvana에 대한 직접적인 디스일 테다. 찬사는 아마도 미키 루크가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Guns & Roses의 보컬리스트 액슬 로즈에게 영화 <더 레슬러>에 그들의 음악을 써도 되느냐고 의뢰했을 때 그가 돈 한 푼 안 받고 허락했던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일 테고, 액슬 로즈와 주먹다짐을 할 정도로 사이가 나빴던 커트 코베인에 대한 디스는 은인에 대한 대리 복수가 아니었을까.


액슬 로즈는 LA음악계에서 자주 마주치는 코트니(커트 코베인의 부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코트니를 '사기꾼 계집'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물론 그는 커트도 좋아하지 않았다. 커트는 건스 앤 로지즈의 성 차별주의나 동성애 혐오증을 곧잘 공격하였고, '불쌍하고 능력 없는' 밴드라고 헐뜯었기 때문이다. 액슬은 커트를 싫어하면서도 언젠가 너바나에게 자기들과 함께 투어를 하자고 제안했다가 보기좋게 퇴짜 맞았다.

-이안 핼퍼린, 맥스 월레스 공저<Who killed Kurt Cobain>중에서


롹음악이 보다 테크니컬해지고 세련되어 가던 80년대 후반에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는 초절기교(게리의 표현대로라면 '서커스 쇼')에 경도된 듯한 당대의 롹 음악계에 환멸을 느껴 블루스 음악으로의 회귀를 선언했다. 그러던 상황에 등장한 것이 커트 코베인의 밴드 Nirvana이었으니, 기존 롹커들의 요란하고 화려한 복장 차림에 반해 거의 부랑자 행색에 가까웠던 커트 코베인은 당대의 서커스 쇼에 종지부를 찍기라도 하듯 보다 원초적인, 펑크를 바탕으로 한 롹음악으로 당대의 음악 흐름을 바꿔놓았다.

당시에 커트 코베인이 다음의 생각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잉베이 맘스틴이나 밴 헤일런처럼 기타를 잘 치지도 못하고 디오나 커버데일처럼 노래를 잘하지도 못하지... 이런 내가 음악은 무슨 음악이냐...' 이랬다면 미키 루크는 조금이나마 더 행복했으려나.


Nirvana의 1992년 레딩 라이브를 들어본다. <Love buzz>에서의 커트 코베인의 연주는 한마디로 '개판'이다. 기타 연주 전에 조율은 기본 아닌가? 커트는 곡이 시작되고 나서 기타의 첫 음을 내는 순간 깨달았을 것이다. 왓더뻑, 음이 왜 이래?

연주 중에 대충 조율을 마친 커트는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중간에 그는 기타를 패대기친다. 커트는 자신의 돌발적 행동에 깜짝 놀랐는지 다급하게 기타를 주워 든다(이 장면을 보면 영화 <우아한 세계>의 마지막 장면이 연상된다. 라면을 먹다가 밥상을 뒤집어엎은 송강호가 멋쩍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 바닥을 치우는, 다소 비루한 장면이). 그런데 어쩌랴. 던져진 통에 조율은 더 심하게 틀어진 것을. 그럼에도 커트는 음도 안 맞는 개판 연주를 우직하게 밀고 나간다. 아마 속으로 이랬을지도 모른다.


뻑,

네버 마인드

이게 나야


단지 '약빨'이었을까?

사실 너바나의 음악은 음반으로 들어보면 이 정도로까지 개판은 아니다(물론 몇몇 곡에서는 의도적인 개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전반적으로는 정교함이라든지 초절 기교 따위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미키 루크가 "커트 코베인이 롹음악을 망쳤다"라고 토로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을 거다.

커트 코베인은 아마도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정교하고 깔끔하고 테크닉 끝내주는 롹음악? 그런 건 기타 잘 치는 니들이나 해라, 나는 내 꼴리는 대로 할 테니. 쌈마이 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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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천부적 재능을 시기한 살리에리에게는 '마이 웨이'의 마인드가 부족하였던 건지도 모른다. 그는 신의 불평등함에 분노하여 십자가를 벽난로 불에 태워버린다.

나도 가능하다면 커트 코베인처럼 되고 싶다. 그럼에도 살리에리의 좌절이 너무나 이해가 된다.

사실, 살리에리는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그렇게 '쌈마이' 3류 음악가가 아니었다. 그는 어엿한 궁정의 음악 감독이었고, 베토벤이 자신의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 했던 나름 '잘 나가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살리에리는 잊혔고, 모차르트는 기억되었다.


"제가 독일 유학 시절에 깨달은 건데... 조기 교육을 받은 영재들과 비교하는 한, 제가 피아노를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지인 분의 말이다. 나 역시 유튜브를 통해 악기로 초능력을 발휘하는 연주자들을 보면 감탄과 동시에 우울해진다. 손가락이 고장 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손가락이 멀쩡했어도 그들처럼 될 수는 없다.

노력만으로 누구나 다 손흥민이 될 수는 없다. 천재란 1%의 영감(재능)과 99% 노력의 결과라고 하지만, 기실 대부분의 이들이 범재로 머무는 건 그 1%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CF의 영향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 "2%가 부족해"라는 말이 관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2%가 부족하다는 것은 기실 상당히 부족하다는 얘기다. 1%~2%의 부재가 천재와 범재를 가른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 모짜르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케사르가 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에 전직 클래식 기타리스트이자 <다시 연습이다>의 저자인 글렌 커츠는 말한다. “모짜르트에게는 이 말이 훌륭한 좌우명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울적한 협박에 불과하다.”




"기억해 다오. 점점 희미해져 가는 삶보다는 일순간 불타오르는 것이 낫다는 것을."

커트 코베인은 유서에 이렇게 썼다. 남이 되기를 거부하고 오직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원했던 그는 엽총으로 스스로를 불태움으로써 '짧고 굵은 삶'을 완성하였다.

점점 희미해지더라도 단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가늘지만 긴 삶'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법륜 스님의 말마따나) 다람쥐처럼 삶의 목적이나 의미를 애써 찾지 않고 그저 살아간다는 자체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인간만이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은 단지 일종의 '정신 승리'일 뿐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커트 코베인의 밴드명이 Nirvana(열반)인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X japan의 기타리스트인 히데는 창작력이 절정에 이르렀던 30대 초반에 사망했다(자살인지 사고사인지 불분명하다고 한다). 그 짧은 기간에 그가 남긴 음반들을 들으면 호불호를 떠나 그가 참 열정적으로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굵고 짧은 삶이었달까.

히데의 죽음을 생각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약관의 나이라고 가정하고) 신께서 왕림하셔서 내게 제안을 하신다. 다음의 두 가지 삶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히데처럼 굵고 짧게 살다 갈래,

아니면 (너처럼) 가늘고 길게 살다 갈래?


그러면 약관의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가늘고도 긴 삶을 지향하는 사람은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새삼 윌리엄 제임스의 행복 공식이 떠오른다.


자존감=이룬 것/기대하는 것


기대하는 것이 크면, 다시 말해 욕망이 크면 자존감 하향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여기서 자존감을 행복감으로 치환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스크린샷 2025-01-12 오후 11.16.10.png 히데(1964~1998)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들이마셔 봐요, 다르델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무의미를 들이마셔 봐요. 그것은 지혜의 열쇠이고, 좋은 기분의 열쇠이며..."

ㅡ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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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화 얘기. <더 레슬러>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비록 퇴물 취급을 받기는 해도 한 때 유명했던 레슬러로서의 삶을 접고 마트의 식당 종업원으로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미키 루크. 그에게는 '가늘지만 긴', 평범한 삶이 남았지만 그마저도 녹록하지는 않다. 사랑하는 이들은 떠났고 그는 늙고 병들었다.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은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비교하는 것. 결국 목숨을 걸고 다시 링으로 돌아가는 미키 루크. 링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저게 내 세상이야."

레슬러로서의 삶의 관성, 혹은 인정투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의지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평범한 삶으로서 극복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과거가 영광스러웠던 그에게는 점차 희미해지는 삶보다는 일순간 불타오르는 삶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어머니는 되는대로 살아오셨어."

"그게 어쨌다는 거지?"

"그건 마치..."

"마치?"

"마치 손에 바느질 도구를 든 채, 생각은 엉뚱한 데에 가 있었던 것과도 같아."

"그건 마음속을 들여다보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야. 그 속에 아무것도 없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라구."

-캐롤 쉴즈 <스톤 다이어리> 중에서



https://youtu.be/GBKBxVnKE30?si=C7RVu5prXojx2-I4

작곡 : 이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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