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is...

ㅡ검댕이 귀신

by 지얼

2016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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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타 보는 기차.

'삶이란 무엇일까' 하는 사색에 빠져 차창 밖 먼 곳을 바라보곤 했던 그 옛날에는 승무원이 여러 가지 먹거리가 담긴 밀차를 밀면서 질문에 대한 답을 던져주며 지나가곤 했다.

"삶은 계란이나 사이다."

별 의미없는 억지춘향격의 '꿈보다 해몽.'

살다 보면 목이 메이기도 하고 뚫리기도 한다는.


언젠가 한 여자 인터뷰어가 김훈 작가에게 삶은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그런 거창한 질문을 싫어합니다." 우문현답이다. 차창 밖을 뚫어지게 응시해 봤자 풍경들은 삶이 뭔지 안 가르쳐준다.

창밖 어둠의 틈 사이로 무언가가 점멸한다. 고장 난 가로등이다.

안구에 물이 아롱질 때 가로등의 빛 번짐을 바라보면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탓인지 문득 모든 것이 환영, 혹은 무의미한 농담 같다는 생각이 든다.


XX역을 나와 택시를 타고 집에 가려니 거리가 다소 어중간하다는 생각이 들어 주저한다. 택시 타고 가기에는 너무 가깝고 걸어가자니 조금 멀다.
다이어트를 핑계 삼아 걸어가기로 한다.
역전 삼거리에서 거리상으로 제일 가까울 것 같은 가운데의 언덕길로 향했다.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는 도중에 어여쁜 젊은 처자가 친근하게 말을 건넨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무시해 버렸으나 잠시 후 또 다른 처자가 말을 건다. 아, 귀찮다. 예나 지금이나 이 놈의 인기란....
문득 예전에 본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라면 먹을래요?"하고 제안하며 플러팅을 시도하는 이영애가 떠오른다. 역전의 그녀들은 라면 대신 그저 놀다 가시란다.


그렇게 치맛자락을 뿌리치며 밤거리를 터벅터벅 걸어간다.

명료한 홍등의 밤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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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초봄.

아침에 눈을 뜨니 기분이 바닥 침을 느낀다. 심심풀이로 '오늘의 운세'를 보니 그런 날이란다. 산책을 권하길래 운동 겸 광합성을 위해 뒷동산에 오른다.

동산 뒤편을 지나가다가 비석 없는 봉분을 발견한다. 봉분 바로 앞에 푯말이 꽂혀 있길래 가까이 다가가 봤더니 붙여놓은 쪽지에 이런 게 적혀있다.

<이장, 평장, 개화장, 납골당... 010-XXXX-XXXX>

잠시 생사의 대조ㅡ생의 원색적인 처절함과 죽음의 무색무취한 평안함에 대해 생각하다가 30초간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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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을 거의 내려가니 이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푯말이 나무에 걸려있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 사는 개는 기르는 개입니다. 잡아가지 마세요.>

그리고 푯말 하단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동물을 사랑하자.
(동물 애호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개는 보이지 않는다. 푯말을 지나 언덕 위쪽으로 올라가 보았더니 엉성한 울타리 너머에서 황구가 나를 향해 짖는다. "왈왈~왈왈왈(저리 꺼져)!"
면식일 리가 없을 그 동물애호가 분에게서 인간에 대한 신뢰가 느껴진다. 개도둑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니. 푯말이 오히려 '여기에 훔쳐 갈 법한 개가 있어요'라고 알려주는 꼴 아닌가.
우짖는 황구를 뒤로 하고 작별 인사를 건넨다. 잘 있거라. 부디 생계의 처절함에 처한 개장수들의 표적이 되지 않기를.

나 또한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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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동산에서 내려와 골목길을 걷다가, 익숙한 캐릭터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추어 선다. '이웃집 토토로'다. 카페 이름도 '검댕이 카페'다. 검댕이 귀신, 혹은 ㅡ마쿠로 쿠로스케! 밝은 곳에서 갑자기 어두운 곳으로 들어갈 때, 비문증의 유사 거머리들처럼 실재하지 않지만 눈에는 보인다는 아롱진 그것.

가게 안에는 토토로, 원피스, 케로로 등의 온갖 피규어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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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떠나고 연습/레슨실로 향한다. 햇살이 무척이나 따뜻한 것이 마치 4월 초의 날씨 같다. 여전히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로 가득한 뒷동산을 흘낏 돌아본다. 그리고 거리든 마음이든ㅡ이유가 무엇이든ㅡ멀리 있어서 만나지 못할 누군가에게 마음속으로 작별인사를 건네며 생각한다.

헤어짐도 그저 무색무취의 소멸로 남았다.

가끔은 원색적이지 않은 잔영, 잔상만이 마음속에 검댕이 귀신처럼 들러붙어 있다.


멀리서 바라보지 않아도

가끔은 삶이 덧없는 환영이나 무의미한 농담 같기만 하다.




https://youtu.be/59xYyYyPeXc?si=-L6dshGehYQ07Z-4


49년의 파리를 기억합니다

I remember Paris in '49

샹젤리제, 생 미셸, 오래된 보졸레 와인

The Champs-Élysées, Saint Michelle and old Beaujolais wine

그리고 나는 당신이 내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And I recall that you were mine

그 파리지엔느 시절에

In those Parisienne days


사진들을 돌아보며

Looking back at the photographs

모퉁이 카페 밖에서 보낸 그 여름날

Those summer days spent outside corner cafes

오, 나는 당신에게 한 단락을 쓸 수 있었어요

Oh, I could write you paragraphs

나의 오래된 파리지엔느 시절에 대해

About my old Parisienne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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