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코털과 생각의 노화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산울림>의 <청춘>이라는 노랫말이다. 가사가 다소 모호하다. 꽃잎은 져도 해가 바뀌면 또 피지만 청춘은 지고 나면 두 번 다시 피지 않는다.
전체로서의 꽃잎들은 언제나 부활하겠지만, 개체로서의 꽃잎 하나는 지고 나면 끝이다.
청춘은 후자와 같다.
최소한의 품위 유지를 위해 전동 코털제거기를 구입했다. 콧구멍 속에 기기의 끝부분을 삽입 후 작동시키면 콧구멍 가득 면도기와 같은 상쾌한 음향이 울려 퍼진다.
문득 생각한다. 약관의 나이일 때 총 여섯 번의 미팅을 가졌다. 모두 연애로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섯 번은 적어도 썸까지는 갔다. 문제는 단 한 번의 단호한 까임. 어쩌면 그녀('미미')는 나의 삐져나온 코털을 발견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코털 제거 후 기기의 헤드 부분을 분리하여 책상 위에 탁탁 치니 절삭된 코털의 시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그 순간 나는 충격을 받는다.
그것을 처음 발견했던 것은 머리에서였다.
몇 년 후 그것을 허리하학적인 위치에서 발견했을 때 <청춘>의 선율이 흘러나왔다.
이제 그것은 콧구멍 속에서도 발견된다.
멜라닌 세포의 감소로 인해 생겨난 그것.
백모.
나이 먹음에 대한 자각의 속도보다 백모의 증가가 훨씬 빠르다.
어쩌면 무의식 중에 거부하며 살아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저곳에서 증식하는 백모에 탄식하기 훨씬 이전에, 젊었던 생각과 가치관은 청춘과 함께 한참 전에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지고 또 '안' 피는 꽃잎처럼.
2017년 1월.
하루종일 홀로 방에 콕 처박혀 있다가 오후 9시경 맥주와 안주거리를 사러 오피스텔 건물을 나선다. 바깥바람이 몹시 차다.
소시지 안주에 맥주 두 캔을 비운 뒤 케이블 TV에서 방영해 주는 영화 <천장지구>를 보는 둥 마는 둥 재 시청한다. 이 영화만 보면 하얀 웨딩드레스와 가스통이 먼저 떠오른다.
나중에야 '천장지구'라는 제목이 노자의 도덕경에서 따온 것임을 알았다. 검색해 보니 '하늘과 땅은 영구히 변함이 없음'이라는 뜻이란다. 문득 궁금해진다. 감독은 왜 이것을 제목으로 삼았을까?
미래가 불투명한 건달과 양갓집 규수의 러브 스토리. 참으로 식상하다. <맨발의 청춘>이었던가. 이런 스토리에는 필연적으로 규수 부모의 극심한 방해공작이 등장하는데, 이런 부모는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는 관객의 공분을 사기 마련이다.
청춘이 지나가도 한참 지나가버린 나이에 이르러 규수의 부모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청춘이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부모 세대들은 경험상 생활이 사랑보다 장구함을 안다. 가스통이 웨딩드레스보다 장구하다. '곳간에서 사랑 난다'는 얘기가 괜히 나온 건 아닐 테다.
<자기 앞의 생>을 통해 로맹가리는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라고 말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사랑이 없어도 곳간의 안정감만으로도 잘 살고는 있는 듯하다.
극중 유덕화가 가스통에 맞아 요절하게 됨으로써 저들의 사랑은 하늘과 땅만큼 장구해진다. 생활의 장구함이 저들의 사랑을 질식하게 할 일은 없어진 거다.
결혼 생활의 실패가 곳간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는 지인들의 경험을 상기하다가 씁쓸한 기분에 젖는다. 마켓에서 직불카드를 긁으며 속악하게도 로맹가리의 말을 비틀어서 마음속으로 뇌까린다.
사랑은 곳간 없이는 살 수 없다.
청춘이 오래전에 지나가기는 했다.
지고 또 '안'피는 꽃잎처럼.
https://youtu.be/jqZ2Ie4pd30?si=fAr7v1aMgFU-isI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