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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새 Mar 24. 2022

물소리길을 걷기 시작하다

양평 물소리길 1코스

 <양평 물소리길 1코스> 문화유적길(양수역~ 신원역) 8.3km. 소요시간 3시간.

 양평 물소리길 1코스를 간 것은 3월 첫째 주였다.

 아침부터 반가운 봄비가 내렸다. 산행기를 쓰기 시작한 이후로 맑은 하늘을 만난 적이 별로 없다. 그래도 봄이 오려면 비가 와야  하니까 고맙게 생각해야겠다. 원래 2월이면 땅이 녹아 등산로가 질척 질척해서 불편하기 일쑤인데, 전날 호암산에 갔을 때 길이 대부분 말라 있었다. 이번 겨울에 눈이 적게 와서 그런가 보다. 내릴 바엔 흠뻑 내렸으면 도움이 많이 될 텐데 그렇지 못하고 하늘만 흐린 것이 아쉽다.
 비가 많이 내려서 봄을 빨리 데리고 왔으면 좋겠다. 농사꾼들에게 그럴 수 없이 좋은 일이고, 메말라있는 자연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다.
 5도 2촌 양평 살이가 8개월째라 이제 내 동네처럼 편안하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서울 아파트가 그럴 수 없이 편하고 좋더니, 출퇴근할 필요가 없으니까 자꾸 흙냄새가 맡고 싶어 진다. 마당에서 햇살을 가득 안아보고도 싶다. 집에 있는 화초들이 그렇게 노래하는 것처럼 나도 어느새 그 화초들을 따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렇게 양평은 나와  내 화초들의 희망 1번지가 되고 있다.
 사실 요즈음 조금 우울해졌다. 확실한 거라곤 내 이름으로 된 토지뿐. 건축 허가도, 기초 공사도 아직 멀었다. 자재값은 자꾸 오르고, 집 설계도만 그림으로 나타날 뿐이지 실체가 없다. 화단을 만들고자 해도 아직 실천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봄을 매우 기다리는 것도 그런 답답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일 게다. 게다가 씨앗으로 발아한답시고 아파트 베란다와 거실 창가에 가득 화분을 어지러이 놓아두고, 새싹이 이제나저제나 나오나 눈 빠지게 들여다보는 일이라든지, 애써 심은 씨앗이 녹아 없어지고, 발아된 싹을 화분에 따로 옮겨 심었다가 시들어버리는 꼴을 몇 번 당하고 나니 빨리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더 강해진 것 같다.

 기다림이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수행 같은 이 현실이 내겐 버겁다. 양평 물소리길을 빨리 시작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던가, 봄이 오기는 왔지만 아직 봄 같지가 않다. 그래도 꽃으로 가득한 봄은 반드시 올 것이다. 미래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나는 꼭 내 땅에 집을 짓고 마당에서 흙을 밟으며 햇살을 받으며 살게 될 것이다. 자, 걷기 시작하자.

 양평 물소리길은 특징이 전철역에서 전철역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마지막  6코스만 종착역이 용문산 관광지다. 보통 자차 이용일 경우 출발지 역 가까이에 주차를 하고 코스를 걷고 난 다음 전철을 타고 되돌아오면 된다. 6코스일 경우 군내버스를 이용하면  용문역으로 회귀가 가능하다.

 우리는 양수역에 주차를 하고 역 뒤편으로 가서 출발점을 찍는다. 양수역 안에 있는 멋진 시 '양수리로 오시게'가 우리를 반긴다. 출발 시각 오전 10시.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가정천과 만나게 된다. 가정천은 흘러 남한강으로 합쳐지고,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만나 너른 한강의 품에 안기리라. 지금은 비록 작은 개천이지만 큰 강의 일부가 되려는 그의 희망은 그저 꿈이 아니라 실현이 확실한 일이다.

 물소리길 1코스는 특징이 마을과 산을 번갈아 걷는 것이다. 제주 올레길의 '올레'가 길에서 집까지 이어지는 길이라는 뜻이라는데, 여기가 꼭 그렇다. 마을에서 마을로 이어지는데, 그 사이에 산이 있다고 보면 된다. 서울 접근성이 높은 양서면에는 전원주택이 많기 때문에 멋지게 지은 집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만큼 수요가 많기 때문에 개발의 바람이 산 하나를 송두리째 엎어버리는 안타까운 모습을 만나기도 했다.

 봄은 오고 있다. 겨우내 얼었던 개천은 쉬임 없이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흐른다. 비어있는 논밭 가장자리에도 자세히 보면 푸릇푸릇 새싹들이 마른 풀잎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빈 논, 빈 밭은 작년 가을 우리에게 수확을 안겨 주고 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뭐든 채워보라고. 빈 자리, 빈 그릇. 비어 있어서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채울 수 있어서 넉넉한 모양새다. 사람도 너무 꽉 채워 살지 말고 빈 곳을 만들어야겠다. 빈 곳이 있어야 기대앉고 싶어 하는 이웃이 쉽게 접근하지 않을까 싶다.  

 몇 년 전에 우리는 물소리길 6개 코스를 모두 걸었다. 패스포트를 우연히 얻어서 모두 인증 도장을 찍었지만 따로 완주 인증서를 받지는 않았다. 제주 올레길도, 지리산 둘레길도, 서울 둘레길도 걷기는 했지만 완주한 적은 없다. 그 세 곳에 비하면 사실 부담이 적은 곳이기도 하거니와, 양평 물소리길을 꼭 완주하고 싶다는 나의 바람을 남편이 함께 해준 덕분이다. 양평은 그만큼 내가 애정하는 고장이다.

 물소리길 1코스가 약간 달라졌다. 전에는 목왕리에서 도로를 따라 걷는 구간이 있었는데, 인도가 따로 없어 위험한 느낌이 들었었다. 길을 새로 내었는지 한음 이덕형 신도비까지는 개천 옆길로, 신도비 지나서는 산길(오솔길)로 인도한다. 경기 옛길인 평해길(구리~양평)과 나란히 간다. 리본이 두 가지다.  평해길 인증 박스가 예쁘다.

 온통 갈색인 산속에 갑자기 나타난 푸른빛. 키 큰 나무는 삼나무로 보이고,  나중에 심은 듯 키가 작은 나무는 구상나무로 짐작이 되었다. 우중충한 날씨에 반짝 기운을 돋우어주었다.

 안개비가 조금씩 내려 시야가 온통 회빛이다. 이런 날씨를 곰탕 날씨라고 한단다. 내 눈에는 신비스럽기만 하다.

 고개를 넘어오는데 동네 주민이라는 아주머니 한 분이 앉아 쉬고 있다가 말을 붙인다. 고개 너머에 약수터가 있단다. 못 보고 왔는데. 궂은 날씨에도 찾는 걸 보니 아마 거의 매일 약수물을 떠다 나르는 모양이다. 몽양 여운형 기념관에서도 말을 붙이는 주민이 있었다. 아마 우중충한 날씨에 스틱을 들고 큼직한(사실은 날씨에 맞춰 바꿔 입을 겉옷을 여유로 가지고 다닌다.) 배낭을 멘 젊지 않은 두 여행객이 신기했겠지.

 이번부터 도시락을 준비했는데, 갑자기 비가 굵어질까 봐 걱정이 되었다. 기념관 옆에 있는 조선 스포쓰 도장 (이름이 재미있다.)이라는 공원에서 비가림막이 있는 운동기구 시설 아래에 돗자리를 펴 놓고 점심을 먹은 다음, 묘골 애오와 공원을 지나 신원역으로 향한다.

 비는 그쳤지만 날씨는 흐리다. 하지만 갤 것이 틀림없으니까  사람들은 날씨가 흐린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날씨처럼 약간 울적했던 내 마음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천 가능한 미래를 준비 중이니까...

 우리가 오늘 걸은 거리는 총 9.4km, 총 3시간 40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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