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은 추억이 많은 산이다. 지금은 갈 엄두도 못내는 한계령 - 중청 - 대청봉 - 중청 - 한계령 원점회귀 코스를 두 번 정도 걸은 것 같다. 밤새 차를 타고 가서 새벽 3시 조금 지나서 머리에 랜턴을 맨 채로 줄줄이 그 험한 산길을 오르던 일이 꿈만 같다. 아파트에 살아서 쉬 볼 수없던, 쏟아지듯 반짝이는 별들을 잠깐 동안 볼 수 있었다. 금방 날이 밝아지고 어둠 속에서 잘 안 보이던 단풍이 햇빛을 받아 피어오르듯 빛을 찾아가던 광경도. 크레바스라고 부르며 마치 칼처럼 생긴 바윗길을 조심스레 걷던 기억. 손에 잡힐 듯 추억의 창고 속에서 빛나고 있다.
이제는 설악산도 체력에 맞게 십이선녀탕계곡, 수렴동계곡, 흘림골을 선택하여 다니고 있다.
흘림골은 단풍철 단골 산행지였다. 흘림골 - 등선대 - 주전골로 이어지는 이 코스는 아름다운 단풍이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해낸다.
흘림골은 아름다운 만큼 그 산세도 험하다. 몇년 전(2015년 8월) 낙석 사고로 인명피해가 난 후 오랫동안 등산로 공사로 탐방로가 폐쇄되었다가, 작년부터 개방되었다. 작년에도 갔지만 올해 또 가고 싶어서 다시 찾았다.
오색약수터 주차장 도착이 오전 7시. 아침을 휴게소에서 해결하려고 했으나 이른 시간에 아침 식사를 할 수 없는 휴게소가 가끔 있는데, 홍천휴게소가 그랬다. 할 수 없이 주차장 차 안에서 여유있게 싸온 샌드위치로 아침을 해결하고 출발했다.
오색약수터 주차장에서 흘림골까지는 택시를 이용했다. 처음에는 한계령으로 가는 줄 알고 고생 각오하라면서 추임새를 넣던 택시 운전기사는 흘림골까지 간다고 하자 금강산을 가보았다면서 흘림골이 금강산 못지 않다고 극찬한다.
살짝 한계령에서 대청봉으로 다시 가고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무릎이나 다리가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
흘림골은 탐방객 수를 제한하고 있어서 미리 예약을 해야하는 곳이다. 태양광 발전기 공사 등으로, 집에 있어야 하는 날짜와 겹쳐서 몇 번의 예약과 해약 끝에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산행날짜를 잡게 되었다.
아침 8시부터 입장이지만 7시 40분 정도에 등산객들을 입장시켰다. 우리도 예약을 확인하고 흘림골 탐방로 들머리로 들어갔다.
하늘에 구름이 한 점도 없기가 쉽지 않은데, 정말 파란 도화지같은 하늘이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이 우리 눈 앞에 펼쳐졌다. 구름이 예쁜 날도 좋지만, 이렇게 파란 하늘 앞에서는 찬사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행복할 뿐이다.
출발하자마자 만나는 쉼터는 별로 환영을 못받는다.
생각보다 등산객이 많지 않았다. 단체가 한 팀 정도 있는 것 같았지만, 붐빌 정도는 아니었다.
등선대까지는 가파른 산길이다. 초입에는 계단이 설치되어서 편했지만, 올라가는 경사진 길에는 헉헉댈 수 밖에 없다. 언제부턴가 계단을 빨리 올라가면 숨이 가쁜 증세가 생겨서 오르막길에서는 일부러 천천히 걷는다.
등선대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하는 데도 올라가는 사람이 많다. 기암괴석을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높은 곳에서 조망되는 경치가 그만큼 더 멋져서 이기도 하겠지만, 바람을 만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장소인 것 같다. 동해 바다에서 등선대까지 아무런 막힘이 없기 때문일까. 똑바로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거세다. 그곳에서 인증사진을 찍으려고 줄 서 있는 탐방객들. 우리도 그 중의 한 팀이었다.
다시 내려와 삼거리에서 주전골 쪽으로 내려간다. 등선대까지 오르막이 심하지만, 등선대 삼거리를 지나면 완만한 내리막길이라 흘림골 - 주전골 코스를 그리 힘든 산행지로 여기지 않는다.
고도가 낮아지면서 단풍색이 보이기 시작한다. 기암괴석과 어울리는, 금강산 못지않은 풍광이 우리 앞에 펼쳐지기 시작한다.
곱디고운 단풍,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멋지겠지만, 가을은 멋짐에 화려함이 덧붙여진다. 엽록소가 파괴되고 안토시아닌이 생성되면서 생기는 그런 자연현상의 설명 말고, 그냥 예쁘다, 아름답다, 멋지다, 화려하다로 직관적인 표현으로 족하지 않을까.
하늘은 또 어찌 이리 눈이 시리도록 예쁜지, 사진찍는 남편보고 하늘! 하늘! 했더니 파란 하늘을 자꾸 찍어댄다.
쓰러진 나무에 칡넝쿨인지 엉켜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넝쿨이 칭칭 동여매어 얼마나 나무를 못 살게 굴었으면 뿌리가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을까. 그것도 자연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의 한 부분이리라
오래된 서어나무의 깊은 골은 늙은 할미의 깊은 주름살 같다
이런 아름다운 길을 걸을 수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축복이다. 나의 두 다리가 튼튼해서 더 오래 이런 아름다운 산길을 걸을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남편도 같이
십이폭포교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었다. 열두폭 물길이 새색시 너울처럼 길게 드리웠다. 나이 드신 어머니도 젊은 시절이 있었고, 그때 20대 꽃다운 새색시가 시집갈 때 쓰셨던 하얗고 긴 너울이 연상되는 폭포같은 물길이다.
용소폭포 쪽에서 반대 방향으로 오는 탐방객이 없다했더니, 대부분 용소폭포까지 와서 되돌아가는 탐방객이 많은 모양이다.
우리도 사람 많은 출렁다리길을 지나서 용소폭포 구경을 하였다.
우리가 내려온 용소폭포 삼거리다. 예약을 하지 않은 탐방객들이 들어가려다 제지를 받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오색약수터에 대기 줄이 길지 않은 편이다.
되돌아오도록 구름 한 점 없었다.
늘어선 차량들이 피크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오색약수터 주차장 건너편에 있는 도로변 간이 쉼터에 앉아서 싸가지고 간 간식을 먹었다.
배는 좀 고팠지만, 마음은 꽉 찬 멋진 단풍산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