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새해 첫 산행
새해 첫 산행은 오대산으로 정했다. 더 젊었을 때도 새해 일출 산행은 한 적이 없다. 대신 첫 산행을 시무식 하듯 의미를 부여하며 산을 올랐다.
올해도 첫 산행의 설레임을 마음에 가득 담은 채 새벽에 일어나 준비하여 안개 자욱한 양평을 빠져나와 강원도로 행했다. 오대산을 만나기 위해서다.
올해 남편이 칠순이다. 한국 나이로 친 것이니, 내년이면 꼼짝없이 70대 산행객이 된다. 한 살 차이인 나도 2025년이면 70대이니 예전처럼 큰 산을 거침없이 다닐 나이는 아닌 것 같다. 작년에는 "이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라고 하면서 오른 산이 꽤 되었다. 올해도 어느 산까지 갈 수 있을지, 또 어느 산을 접어야 할지 생각하면서 다닐 생각이다.
오대산은 첫눈 산행의 즐거움을 맛보게 해 준 산이다. 첫눈 산행에서 만난 멋진 설경을 오대산에서는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그 첫 경험의 감동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은 채 내 기억의 창고 속에 곱게 모셔져 있다. 그래서 겨울만 되면 가슴이 뛴다. 치악산, 소백산, 선자령, 덕유산, 선운산, 백덕산 등 여러 산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설국이 선사하는 빛나는 순간순간을 다시 만나고 싶다. 그래서 겨울에도 산을 오른다.
오대산에 큰 눈이 왔을 때 양평도 눈이 꽤 왔었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 멀리 가지 않고도 설경을 만날 수 있는 작은 기쁨도 누렸다. 하루가 지나자 조금씩 녹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곳곳에 눈이 남아있다.
오대산에 눈이 얼마나 왔을까. 주차장 주변의 나무는 모두 눈을 털어버린 모습이었지만, 도로와 주차장만 겨우 제설을 끝냈을 뿐. 바닥은 흙도, 개천의 물도 거의 보이지 않는 하얀 세상이었다.
깃대종 캐릭터 올바기(긴점박이 올빼미)를 하산하면서 보았다. 남편이 미리 찍어놓았다. 흰 눈과 잘 어울리는 깔끔하고 귀여운, 친근감 가는 올바기가 곧 오대산의 명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예전에 오대산 정상을 지나 북대사로 내려오는 길에 부러진 나뭇가지를 보고 궁금해하던 내게 지나가던 스님이 설화 때문이라고 일러주셨다. 눈꽃이 아니라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져 버린 가지가 눈에 화를 입은 것이라는 뜻이었다. 눈의 무게는 생각보다 은근히 무겁다. 튼튼해 보이는 나뭇가지가 설화를 당해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다.
상원사 입구에 있는 커다란 비석을 지나는 것이 산행의 시작이다.
세조와 관련 있는 관대걸이도 흰 눈에 덮여있고,
중대사자암 표지석도 머리에 하얗게 눈을 뒤집어썼다.
상원사 입구 - 중대사자암 - 적멸보궁까지는 약 1.5km. 일반 방문객이나 신도들은 대부분 한 시간 거리인 적멸보궁까지 다녀오기도 한다. 계단 길이기는 하지만 경사가 급한 편이 아니라 부담없이 다녀올 수 있는 길이다.
중대사자암은 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4층의 형태로 지어져 있다.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만 걸어도 눈 구경은 실컷 할 수 있다.
눈 속에 파묻힌 용안수 약수터를 그냥 지나쳐 버릴 뻔했다.
적멸보궁은 왼쪽, 비로봉으로 가는 길은 직진이다. 비로소 흰 눈이 제대로 쌓인 등산로의 시작이다.
양평에서 출발할 때의 기온이 영하 4도였는데, 오대산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기온은 영하 13도였다. 다행히 바람이 별로 불지 않아서 체감 온도가 더 떨어지지는 않았는데, 오후에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해서 보온을 철저히 했다.
턱까지 덮을 수 있는 방한모자, 목이 허전한 것을 싫어해서 늘 얇은 목수건을 메고 다니는데, 거기다 버프까지 착용하고, 방수가 되는 따뜻한 방한 장갑을 끼었다. 보온 효과가 좋은 기모 티셔츠와 등산 바지는 물론, 외피와 내피가 한 세트인 등산 재킷을 이중으로 입고, 속에는 발열 내의를 입었으니, 움직임은 둔하나 추위를 거의 못 느꼈다. 아이젠 필수, 눈이 혹시 신발에 들어갈 까봐 스패츠도 착용했다. 흰 눈이 반사되어 눈이 부셔서 선글라스도 준비했다.
아래에서는 잘 안 보이던 상고대(?)가 산 위를 하얗게 뒤덮었다.
가지가 하얗게 눈꽃을 피우고 있다. 이 모습을 보려고 겨울 산을 오른다.
파란 하늘과 흰 눈을 같이 보아야 제격이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가 겨울 산행의 큰 조력자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평소에 접하던 상고대의 모습이 아니다. 얼음이 가지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눈이 햇볕에 녹아 물이 되는 순간에 다시 얼어붙었을까? 눈꽃이 아니라 얼음꽃이다.
십여 년 전에 노인봉에 갔다가 얼음침을 만난 적이 있다. 눈이 녹다가 얼어버렸는지, 어는 순간에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지만, 가지마다 뾰족뾰족 날카로운 얼음침이 빽빽하게 달려있는 것을 보고 감탄했었다.
이번에 본 얼음꽃은 상고대와 비슷한 모양으로 눈과 얼음이 녹다가 얼다가를 반복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법 굵은 모양도 있어서 가지가 무거울 것 같았다. 보기 드문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느낌이다. 또 하나의 추억 거리가 생겼다.
이건 또. 역고드름처럼 우뚝 서 있는 얼음 기둥이 재미있다.
내가 참 좋아하는 풍경이다. 눈꽃 사이로 보이는 눈 덮인 산그리메의 모습이 단아하다.
정상석을 만났다. 해발 1563m다. 걱정했는데 다행히 바람이 별로 불지 않았다.
적멸보궁에서 비로봉까지의 등산로는 꽤 경사가 큰 편이라, 나한테는 부담이 되는 등산로인데, 선자령 산행 이후 보름 만의 산행이라 쉽지 않았다. 지쳤는지 500m 전방부터는 다 왔냐고 몇 번이나 물어보다가, 50m 남았다고 하자 먼저 가라고 하고는 천천히 올라왔다.
첫눈 산행 때 울타리마다 상고대가 두텁게 얼어붙어 장관을 이루었었는데. 몇 번을 왔지만 그 모습을 다시 보지는 못하였다. 내 기억 속에는 생생한데, 그때는 풍경 사진을 많이 안 찍을 때라 저장된 앨범에서도 그 모습을 찾지 못해 못내 아쉽다.
나무도 풀도 땅도 모두 하얀 눈 세상.
전투 식량이라고 한단다. 인터넷으로 사 두었던 것을 처음 가지고 올라왔다. 바깥 봉지에 물을 붓고 발열체를 넣으면 물이 끓어서 밥이 든 봉지를 데워서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소고기 비빔밥과 김치 비빔밥 두 가지였는데, 물을 좀 많이 부어서 약간 질척했을 뿐 먹을 만했다. 특히 따뜻한 봉지는 난로 같아서 한참을 손에 쥐고 온기를 즐겼다. 차가운 눈밭에서 펄펄 끓어오르는 수증기를 보는 것만 해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상고대라기보다는 눈이 얼어붙어 생긴 눈꽃에 가깝다.
새 한 마리가 먹을 것이 있나 들여다보고 있다. 꽤 가까이 접근해서 먹이를 주면 손바닥에도 앉을 태세다. 견과류라도 챙겨 올걸. 점심 도시락은 박박 긁어먹어서 먹이로 줄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아서 아쉬웠다.
먼 산에 낮게 깔린 구름 층이 신비로움을 더한다. 그곳은 안개 속이려나. 산신령이 있을 듯한 분위기다.
우리보다 늦게 올라온 단체객들의 환성이 소란하다. 아마 아래에서는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설경에 절로 터져 나오는 감탄사일 것이다. 정상까지 올라와야 볼 수 있는 이 모습을 보려고 낑낑대고 겨울 눈산을 오르고 또 올랐을 테니, 그 성취감이 대단할 수밖에.
평소에는 비로봉에서 상왕봉을 거쳐 북대사 가는 길 쪽으로 하산하여 내려오는데, 시간도 부족하고 아무래도 무리가 될 것 같아 비로봉에서 적멸보궁 쪽으로 바로 하산하기로 했다.
울타리가 길인 줄 짐작이 갈 뿐 많은 눈이 쌓여 계단인지 돌길인지 알 수 없는 이 길에 움푹움푹 발자국 딛는 곳이 만들어져 있다. 적멸보궁 - 비로봉 길은 경사가 급해서 잘못 디디면 미끄러져서 사고 나기 쉬운 곳이다.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더 미끄럽고 위험한데, 이런 발자국 길은 친절하게 발 딛는 곳을 안내해 주니 참 고마운 발자국이다.
울타리도 없는 길은 등산로인지 그냥 숲길인지 짐작을 할 수도 없다. 예전에 선자령에서 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걸어갔음에도 결국 길을 찾지 못해 선두가 포기하고 돌아오는 바람에 뒤따르던 우리도 되돌아 나온 적이 있다.
눈이 많이 와서 등산로를 구별할 수 없는 곳에 길을 내는 것을 러셀이라고 한다. 다져지지 않은 눈을 쾅쾅 힘 있게 무릎과 발로 다져가며 길을 내다보면 길이 만들어진 곳을 산행하는 것보다 몇 배나 힘이 들기 마련이다. 더구나 평소 많이 다녀봐서 등산로를 훤히 뚫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일을 해낼 수 없다.
열 명만 같은 길을 걸어가면 길이 생긴다고 한다. 눈길은 특히나 더하다. 열 명만 지나가면 잘 다져진 안전한 눈길 등산로가 만들어진다.
우리는 그렇다. 다져져서 잘 만들어진 눈길에 아이젠을 콱콱 박아가며 안전하게 겨울 눈 산행을 행복하게 즐기는 수준이다. 우리가 걷기 전에 눈길 등산로를 잘 만들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
눈이 얼마나 온 걸까. 며칠 지났으니 눈이 가라앉기도 했을 텐데, 눈에 보이는 높이가 50cm가 넘어 보인다.
울타리가 아예 파묻힌 곳도 있다.
적멸보궁이 가까워졌다. 올라갈 때보다는 덜 지친 듯한데, 무릎에 신호가 오기 시작한다.
아침에도 눈을 쓸고 있더니, 하산길에도 눈을 쓸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적멸보궁까지 신도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훤히 드러난 계단이 부처님 마음처럼 훈훈하다.
겨울새는 늘 배가 고플까. 사람들을 보고 피하지도 않는다. 견과류를 꼭 가지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또 한 번 한다. 두 마리나 내 앞에서 3초 정도 날개를 흔들며 정지 상태로 멈추어있다가 날아가는 바람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아침에 올라온 계단길로 내려가지 않고 상원사 쪽 길을 선택한다. 눈 속의 상원사를 사진에 담고 싶은가 보다.
눈 속에 침엽수림이 푸르르다. 전나무인 것 같다.
결국 아대를 꺼내어 왼쪽 무릎에 대었다. 보름 만의 산행에다 오대산의 급한경사를 내려오는 것이 무릎에 부담이 된 모양이다. 전에 아프던 곳이라 걱정이 되었는데, 하룻밤 자고 나니 언제 아팠느냐 싶다. 대신 허벅지 통증은 며칠 갈 것 같다. 운동 부족을 실감한다. 통증이 풀리면 또 산길을 찾아 나서야겠다.
상원사에서 꼭 만나고 싶은 연잎 소년. 눈밭에서 여전히 연잎을 우산처럼 쓰고, 무언가를 찾고 있다.
뭘 찾는 거니? 아직 못 찾은 거니? 외로움, 쓸쓸함, 애잔함, 그리움... 여러 단어들이 소년의 주변을 맴도는 듯하다.
상원사의 저 큰 눈더미는 봄이나 되어야 녹으려나.
북대사 쪽에서 내려오는 임도를 잠시 바라본다. 저 길을 여러 번 내려왔는데, 이번에는 그 길을 걷지 못해 아쉬웠다. 또 걸을 수 있으려나 싶으니 더욱 섭섭해진다.
블로그 이웃 글에 태백산 14km를 4시간에 걸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우리는 일반 등산객들이 걷는 시간에 한두 시간은 더 더해야 산행이 끝나는 편이다. 이번에는 운동 부족에 무릎까지 불편해져 시간이 더 오래 걸린 것 같다.
상원사 들머리 - 비로봉 - 원점 회귀. 총 7km. 똑같은 높이를 더 짧은 거리로 걷는다는 것은 그만큼 경사가 급하고 길이 험하다는 뜻이기는 하다. 우리가 걷는 데 걸린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